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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문을 여시고 인자를 보이신 하나님 (겔 1:1~3, 행 7: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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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공직에 계시다가 은퇴하신 어떤 분이 자서전적 책을 쓰셨습니다. 그 내용 중에 특이한 것을 싣고 있습니다. 살면서 조심해야 될 사람이란 대한 대목인데 이런 유의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흉보는 이중인격자’, ‘매사에 반대만 하는 사람’, ‘큰소리만 치면서 책임지지 않는 사람’, ‘남의 직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 ‘의도적으로 일을 훼방하는 사람’, ‘남에게 대접은 않으면서도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 ‘세상에만 집착하는 사람’ 등입니다. 이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세상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일을 알아야 세상도 압니다. 하늘의 이치는 세상을 사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알고, 하늘을 봐야 세상에서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수도 없이 하늘 문을 여시고, 보여주시고, “짠” 하시면서 신비한 것을 보여주시는데 둔한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늘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기를 누설하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절대로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알리라”고 하시며 모두가 다 알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3:11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하늘의 비밀은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1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비밀취급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면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미리 예고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인자를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면 더 이상 보일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여실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실 최고의 볼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실 최상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서 2:2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가장 큰 선물이며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뜻입니다.

  첫 순교의 은혜를 입은 스데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가장 큰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스데반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순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실 최대의 선물은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광경을 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 신비한 스데반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오늘 본문 55절에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자를 보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인자를 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고 절대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자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를 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는 밤에 왔지만 밤손님이 아니라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을 설명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67에는 “그 부친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이 훌륭한 선지자요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자가 된 것은 성령이 충만한 부친 덕이었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성령 충만이 여러분의 후손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후손들이 훌륭한 사회인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의 후손들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인자를 보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6:3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첫 직분자를 선택하는 자격은 성령이 충만한 자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교회의 일을 맡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직분자들이 성령 충만하고, 칭찬 받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자를 보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4에는 120명의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여 방언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8에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4:31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7에는 다메섹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너로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13:9에는 바울이 구브로에서 마술사 엘루마를 만나 성령이 충만하여 엘루마를 향하여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라고 책망합니다. 아마 성령이 충만하지 못했으면 그렇게 책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1:24에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많은 사람을 더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늘의 명령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늘을 보고 삽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에 빠지기 않고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우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채워야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세상을 사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세상을 바꿉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기 위한 촉매제(bond)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순간순간 하늘 문을 여는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이신 인자가 보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55절에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하늘을 봤더니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인자가 보였습니다. 하늘을 봐야 하늘 문이 보입니다. 하늘을 보는 자에게 하늘 문은 열립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보입니다.

  사람은 하늘을 향한 존재입니다. 헬라어의 사람이란 말은 ‘안트로포스’입니다. 이 말은 하늘을 향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땅을 향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지어졌습니다. 하늘을 향해 살아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땅을 바라봤자 땅의 것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늘 하늘을 향해 살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죽음의 위험이 괴롭히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땅의 위험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잠시도 두려움이 없어질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두려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수도원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면 수도사들은 한 둘씩 나와 사막을 산책합니다. 저도 그들을 따라 사막으로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조심스럽고 무서워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땅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막에 뱀도 있고 전갈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니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땅은 두려움을 주고, 하늘은 용기를 줍니다.

  아브라함은 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밖으로 나갑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창세기 15:5에 보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봐야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하늘을 봐야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늘을 봐야 희망이 보입니다. 하늘을 봐야 비로소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만 봐서는 세상을 알 수 없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란 소설에 보면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땅에 발을 디디고, 땅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땅에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만 땅에 살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땅만 바라보는 것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세요. 이 때가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고, 희망이 있는 순간입니다.

  에스겔 1:1에는 “서른 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니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사무친 포로의 억울함을 해소합니다. 마음의 답답함이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과의 미묘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과의 작전통제권과 그 외의 일들이 있습니다. 일본과의 야스꾸니 신사참배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가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이런 모든 답답함이 하늘이 열리면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소됩니다.

  유대 동화에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임금님께 탄원하였습니다. 일 년의 여유를 주신다면 임금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말을 하늘을 날도록 가르쳐 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록 날지 못하면 사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의 동료 죄수가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일년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일년 내에 임금님이 죽을지도 모르고, 혹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더욱이 그 말이 죽지 말라는 법도 없지. 그리고 일년 뒤에 말이 정말 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야”라고 하였답니다. 임금님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보다 말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중요합니다. 죽음 앞에서의 희망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 문만 열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창세기 28:12에서 야곱은 하늘이 열려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자에게 하늘 문은 열리고, 하늘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이미 하늘에 있는 자인 하늘나라 사람들을 보세요. 계시록에는 하늘 문이 열리는 말씀이 많습니다. 4:1에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하늘의 사람이 되면 항상 열린 하늘 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아름다운 광경과 그 안의 하나님의 보게 될 것입니다.

  잘 아는 복음 성가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세요.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는 위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결론

  어느 글에서 톨스토이 마지막 기도를 발견했습니다. “마음에 슬픔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똑같은 슬픔을 느끼며 잠을 깬다. 나는 모든 걸 견딜 수 없다.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여, 생명의 원천이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 얼마나 애절합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열린 문을 보는 것은 최후의 소망입니다. 최후의 은총입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최대의 봉사입니다. 최고의 예배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의 마지막 순간, 잠이 들기 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종말적 사건을 맞이할 때, 피곤하고 지친 어려움이 있을 때, 죽음 같은 고통이 엄습할 때, 이때가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는 시간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한 하늘 문이 우리 앞에 열리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신비한 경험이 우리의 삶의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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