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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룬 것을 누리는 방법 (느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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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룬 것을 누리는 방법
느헤미야7:1-7

제가 몇 가지 쉬운 질문을 할 터이니 답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맥도널드 햄버거 회사는 햄버거를 팔아서 돈을 버는 회사이다.“ 이 문장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맥도널드 햄버거 회사가 햄버거를 파는 회사라는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 일 것입니다. 그러나 맥도널드 회사는 햄버거만 파는 회사가 아니고 부동산 회사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목이 좋은 사거리에는 모두 맥도널드 햄버거 점포가 들어서 있는데, 상권이 조금 가라앉으면 철수하면서 소위 권리금이라는 프리미엄을 받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햄버거를 팔아서 얻는 소득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이라고 합니다.

"자동차 회사의 수익 중 가장 많은 부분은 자동차를 팔아서 생긴 수익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 문장이 맞을까요 틀릴까요? 이 말도 역시 틀렸답니다. 자동차 회사는 차를 만드는 제조업체이나 동시에 금융업체라고 합니다. 자동차를 팔아서 얻는 수익보다 자동차 할부금에서 발생하는 이자로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얻는다고 합니다.

"카드 회사의 수익 중 가장 큰 것은 가맹점 수수료이다.“ 이 말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이 정도 되었으면 당연히 틀리다고 대답해야 하겠지요. 신용카드 회사의 매출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현금서비스 수수료라고 합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박성준씨가 지은 “목욕탕에서 만난 백만장자의 부자이야기”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월급받아 먹고 살고 가르치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6년도 노동부의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 자료를 보면, 대학을 졸업한 직장인이 30세부터 54세까지 25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을 때 벌 수 있는 평균 임금 총액이 10억 9천 4백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 금액에서 매월 생활비 200만 원을 기준으로 25년을 계산해보면 무려 6억 원이 소비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자녀 1인당 총 교육비가 1억 5천 정도이므로 자녀가 둘일 경우에는 3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추가적으로 본인의 주택마련 자금과 자녀의 결혼비용을 포함하면 총액이 10억 원을 훌쩍 넘어 평범하게 살 때는 통장은 텅 비거나 빚에 허덕이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론은 재태크가 없이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번 돈으로 생활하면서 저축하고 남은 돈을 다시 투자로 연결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7개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경매와 공매, 아파트, 땅, 주식과 채권, 해외투자, 골동품, 그리고 세무회계분야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나 좀더 잘 살아 보자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꿈일 것입니다. 형태만 조금 다를 따름이자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과거 느헤미야 시대도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포로 2세 3세로 살아가는 느헤미야도 출세하여 잘 살아 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포로의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가난을 벗어버리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여서 좀더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출세를 하였습니다. 이방인으로 당시 최대 국가인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는 의전실장 정도가 되었습니다. 음식을 담당하는 비서관이 된 것입니다. 포로 출신 2세, 3세가 당시 최대 제국의 왕의 총애를 받고 지금 말하면 왕실의 의전실장 정도가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얼마나 출세를 하였습니까? 우리 아들 딸이 미국에 가서 이만한 위치에 오르면 만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조국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벽 재건을 시작하여 52일만에 완공을 해 버렸습니다.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포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지만 70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한 민족적 과업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단시일에 완공해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입니다. 놀라운 성취이며 성공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것같은 일이 이루어진 이 성과는 우연히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 정도 주어진 일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 자식을 기르는 일, 사업하는 일, 계획하는 일이 이렇게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천국에 가기 전에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만명의 아이들을 매달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열린 교회를 통해 해외에 100개의 교회가 지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가 종교부지를 받았는데 종교부지에 지상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이 느헤미야처럼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제목과 저의 기도제목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의 힘으로 능으로 못할지라도 우리 성령님께서 이루워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사도 바울의 믿음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이 불가능할 것같은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느헤미야의 고백을 보십시오.
지난 주 살펴본 6장 16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의 성공의 비결은 이미 2장 1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왕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 움직여 주었습니다. 2장 8절을 보십시오. 동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귀인들과 방백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한 도움의 손길을 보고 참여하였습니다(2:18). 업신여기고 비웃고 조롱하며 반대하던 적들의 꾀를 하나님이 폐하여 주었습니다. 4장 15절을 보십시오.

우리도 주어진 과업들을 이렇게 느헤미야처럼 우리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함께 일할 사람들을 붙여 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반대하는 적들을 물리쳐 주셔서 성취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상에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통하여 헌당예배를 드리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의 사업터가, 우리 성도님의 자녀가, 우리 성도님의 가정이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으로 느헤미야와 같은 성취의 축복, 이룸의 축복, 성공의 축복, 형통의 축복을 받았다는 고백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룬 것을 누리는 것도 더욱 중요합니다. 이룸의 축복만 받으면 온전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누림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룬 것을 사는 동안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울은 이룸의 축복은 받았습니다. 잃은 나귀를 찾아다니는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행복하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왕의 축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일평생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늘 불안한 마음에 살다가 악신이 들었습니다. 결국 불레셋 나라에게 나라는 망하고 자신과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 이룸이 축복을 받았지만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개하며 그 성전에서 여호와를 통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누림의 축복은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성전을 지어 놓고 이방신을 섬기며 세상 연락에 빠져 버렸습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님들은 이룸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스데반과 빌립만 누림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브로고로와 니가노르, 디몬과 바메나는 임직식 때 이름만 나오고 그 후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니골라는 나중에 초대 교회의 이단인 니골라 당을 만들었습니다. 차라리 직분을 받지 않은 만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권력을 얻고 부를 얻고 명예를 얻고 직분을 얻지만 누림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룸의 축복도 받아야 하지만 누림의 축복도 아울러 받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출세 하였습니다. 총독으로서 월급없이도 살만큼 부도 받았습니다. 명예도, 권력도 이루었습니다. 민족적 신앙의 사명도 이루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재건하였습니다. 이제 그 성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행복한 삶을 누려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림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누림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름대로 지금 이룬 것을 어떻게 누리고 살 수 있을까요?

1. 누림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들로부터 이룬 것을 보존해야 합니다(1-4).
이룬 것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성전이 건축되매 문짝을 다 달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1)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워 각자의 직책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레위인입니다(1)./우선순위.
'문지기'와 '노래하는자' 그리고 '레위 사람'은 모두 레위 지파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만 그 역할의 차이로 인하여 이처럼 셋으로 구분했을 뿐입니다(43절;스 2:40-42). 무엇하는 자들입니까?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먼저 성전 봉사자들을 세운 것입니다. 물론 성벽을 파수하는 책임자로 세웠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알았습니다. 최고 책임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성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한 직분자들부터 세웁니다. 느헤미야는 우선순위가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성벽을 제건할 때도 무엇부터 건축하였습니까? 3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양을 통과시키는 양문부터 건축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을 누릴려면 우선 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먹고 입을 것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것을 누리려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최 우선으로 지켜야 하고 최후까지도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2) 두 명의 지도자를 뽑아 그 성의 일을 맡겼으며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도록 했습니다(2)./자격 있는 지도자
동생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를 세웠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동생 하나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1:2). 민족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영문 관원 하나냐는 충성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리 중에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학벌이나 능력, 외모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 경외, 사람에게는 사랑, 일에는 충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을 때 민족을 지켜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였는데 그 가나안 땅에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왕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신에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종이 되지 못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땅에서 누리지 못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제대로 누림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지도자를 뽑을 때 잘 뽑아 놓아야 이룬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 잘 못 세우면 기업도 이룬 것 다 무너뜨리고 국가도 교회도 이루어 놓은 것 무너뜨려 버립니다.

3)예루살렘 거민으로 반차에 따라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고 문지기들을 통해 빈틈을 주지 않고 철저히 방어하게 합니다.(3)/철저한 관리
경비하는 요령을 하나니와 하나냐에게 가르쳐 줍니다.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라고 합니다. 고대 중근동에서는 해가 뜨는 동시에 성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떠 백성들이 활동하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말라고 합니다. 비상사태라는 것입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적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라는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는 절대로 경비 태세를 늦추지 말고 성문을 열기 전까지의 철저히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스스로가 순번을 정해 놓고 자신의 집 근처는 자신 스스로 며칠에 한 번씩 차례에 따라 경비하라는 것입니다. 많이 이루면 많이 이룰수록 적당히 방어해서는 안됩니다. 큰 둑은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적당히 방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요셉이 적당히 자신을 방어하며 주인 아주머니에게 자신을 허락했다면 그는 누림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였습니다. 요즈음 공직자들 임명하는 것을 보십시오. 청문회 때 다 드러납니다. 철저히 자신의 인생을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이 타락한 문화에서 지켜야 합니다(어느 집사님 이야기).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어느 목사님 이야기). 기업을 지켜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영적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이룬 것을 누리기 위해 이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성벽을 재건하자마자 첫 번째 이일들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가 노력도 해야 하지만 진정 누림의 축복을 누리려면 우리 하나님이 누릴 수 있도록 지켜 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40년간 왕으로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1)”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 때 우리는 안전하고 우리는 이룬 것을 누리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121편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해나 달의 피해에도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5,6). 우리의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7). 지금뿐 아니라 영원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8). 그래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위기 때에 미스바에 나와 죄를 회개하며 통곡하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을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해방 이후 폐허화 된 우리 민족은 이제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이룬 것을 누리려면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사람들의 편들기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이룸 뿐 아니라 이룬 것을 누리는 누림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2.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는 사람으로 참여자가 되어야합니다(4-73).
성벽은 재건하여 이제 그 성에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안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광대한 성에 그 성벽의 혜택을 보며 누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1)누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십시오. 거민이 희소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가옥도 없었습니다.

2)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주 대책을 마련합니다.
자신의 지략이나 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인구 조사를 할 필요성을 절감케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주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독단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대회를 소집했습니다.
'귀인' 과 '민장' 그리고 '백성'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던 세 계층입니다(4:14). 느헤미야가 대회를 소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객관적 자료를 가지고 합니다. 최초로 귀한한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리고 1차 포로 귀환 때의 명부를 확보하였습니다. 이미 100여년 전에 귀환을 하였는데 성벽재건이 완성되지 않으니까 자기 편한대로 원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곳에 살지 않고 다른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마땅히 예루살렘에 살아야 될 백성들 중 상당수가 대적들의 노략질 및 앞으로의 그럴 가능성(1:3) 때문에 성벽이 없었던 예루살렘을 떠나서 보다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가서 거주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이주 시켜야 하는데 객관적 자료가 바로 여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였습니다. 일반 회중의 명부(8-38),
제사장 및 레위인들의 명부(39-45), 수종자들의 명부(46-60), 불확실한 계보의 명단(61-65)을 확보하였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명부에 있는 사람은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5)이들을 다 불러 들여 예루살렘 성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73절을 보십시오.
이미 누릴 수 있도록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성벽을 이룬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0:1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다 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신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1)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2)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3)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우리 주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4) 사죄의 확신의 확신을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5) 인도의 확신을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바울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8)”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외자로 살지 말고 참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며 비판하는 미갈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방관자와 참여자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무엇을 하든지 방관자, 구경꾼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도 구경꾼으로 산다면 참여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 구경하면 예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면 회복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를 구경하고 기도 구경하고, 봉사 구경하고, 전도구경하면 구경꾼 신자로 전락될 뿐입니다. 운동경기나 영화는 구경꾼이 필요하지만 교회는 구경꾼이 필요한 곳이 아닙니다. 교인은 모두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참여자, 봉사의 참여자, 전도의 참여자, 섬김의 참여자, 교육의 참여자, 축복의 참여자, 은혜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주인입니다. 예배 구경자가 아닙니다. 내가 예배 드리는 자입니다. 봉사 구경자가 아닙니다. 내가 봉사자입니다. 그 일에 참여하여 누리는 놀라운 은혜의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안을 이미 주었습니다. 기쁨을 이미 주었습니다. 누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요단강이 막혀 있습니다. 갈 수 없습니다. 법궤가 앞에 갑니다. 그곳에 백성들이 참여합니다. 요단강이 갈라지는 현장에 서게 됩니다. 참여의 복을 누립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의 법궤가 앞에 갑니다. 그 뒤를 백성들이 따라갑니다.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됩니다. 참여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여하기는 참여하되 능동적으로 즐겁게 참여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데 즐거움으로 참여합니다. 이 때 이미 이룬 것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여자가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참여자에게 어떤 일이든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가대를 봉사할 때도 억지로 하면 안됩니다. 즐겁게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비평자 방관자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군함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 역할을 가지고, 참여해야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제 이룸의 축복에서 멈추지 말고 누림의 축복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림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들로부터 이룬 것을 보존해야 합니다(1-4).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는 사람으로 참여자가 되어야합니다(4-73).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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