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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저주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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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 중에서 유일한 파괴 기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님의 성품과 조화가 어려워 논란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동은 진리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 한 행동 한 행동이 예언을 성취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거나 하나님에 대해 계시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어떤 진리가 숨겨져 있을까요?

18-1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마침 길 가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을 보시고 그리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셨고, 무화과나무는 곧 말랐습니다. 이 일은 예수께서 입성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주제별로 묶어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어서 성전 소탕 사건을 먼저 기록했습니다만, 마가복음을 보면 무화과나무 저주가 순서상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식적인 왕의 입성입니다. 이전까지는 당신님의 메시아 되심을 애써 감추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입성하면서 부터는 명백히 노출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을 환영하는 백성들의 환호와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막지 않고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메시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었기 때문에 명절에는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처치할 일을 미루었던 종교 지도자들은 일정을 급히 앞당겨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주님을 십자가에 매답니다(마 26:3-5).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말씀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입성 후 가장 먼저 행하신 공적인 ‘왕의 직무’였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꺼지 않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주께서 저주하신 일로 마음을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예언의 정확한 성취였습니다. 마태복음 12:20절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심과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심이 무한정한 것이 아니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곧 기한을 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출처인 이사야 42:3절 말씀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왕의 첫 직무는 백성들의 치우친 메시아관을 성경 예언에 따라 바로잡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택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축복을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메시아가 그들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확고하게 굳어져서 웬만한 충격으로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결코 고난당하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메시아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일말의 두려움을 가집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언제나 마음 좋으신 분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심판에 대한 의식은 더 희미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부족한 자를 일방적인 은혜로 선택하시는 분이시지만, 선택 받은 자에게 그 책임을 엄히 물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지만, 뿌리까지 마르도록 저주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는 즉시 말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때가 유월절이면 본격적으로 무화과가 익는 계절은 아닙니다. 당신께서 배고프다고 무조건 열매를 요구하는 것은 폭군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불합리한 처사가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면서 작은 열매도 함께 맺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열매 자체가 안으로 피는 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잎사귀가 무성하다면 작은 열매라도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부여하신 독특한 특성을 잘 살렸다면, 이 나무는 단 몇 개의 열매라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좀 더 기이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마치 인격체를 대하듯 무화과나무에게 그 책임을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도 우리 주님의 본질을 생각하면 설명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로서 입성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존재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만유의 왕으로서 그 분은 무화과나무에게 마땅히 열매를 요구하실 수 있었고, 그분께서 원하실 때 원하시는 열매를 제시하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책임입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하게 부풀렸다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아도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유의 주께서 나무 잎사귀에 속아 배고픔을 떨칠 수 없었다는 것이 분해서 ‘이런 고약한 놈이 있나, 죽어버려라’하고 저주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 주님의 성품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그 사실로도 찍혀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갑작스런 개인적 분노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상당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을 예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한 모습과 같습니다. 그 성전은 B.C. 20년부터 40년 이상 지어지고 있었던 대단히 장엄한 건물이었습니다. 겉모습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름과 함께 위풍당당함을 갖추었으나, 성전으로서의 특성은 모조리 상실하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패의 일차적 원인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지만, 재리에 밝은 사람들과 편의적인 생각에 물든 백성들도 그러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성전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이 주님께서 입성했을 때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뿌리부터 말라버렸던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A.D. 70년 아브 달 9-10일에 로마 군인들은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성전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성전 지붕의 황금이 불에 녹아 벽돌을 타고 흘러내리자 군인들은 벽돌 사이에 끼인 금을 꺼내기 위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1948년에 다시 그 땅을 되찾기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나라도 없이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성전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겉모양만 웅장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죽었던 것처럼, 철저한 파멸을 겪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공의이신 주님, 은혜와 함께 진리도 충만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놀람은 주님의 명령이 금방 현실로 나타나는 신속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주하시는 메시아’의 인격과 ‘저주하셔야만 하는 그 분의 심정’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분의 능력과 신기한 결과에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20)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의 동문서답 수준의 답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1-22) 이 말씀은 문맥을 전혀 고려하고 않고 해석하면, ‘믿음과 기도의 능력’에 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어찌하면 나도 할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으로 본문에 접근해서, 기적을 응답받기 위해 기도하다가 실패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연관되게, 그리고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게 해석해야만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입성하신 후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루살렘 성의 철저한 파멸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마음에 성전이 심판당하는 모습을 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왜 무화과나무가 말랐는지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왜 무화과가 상징하는 성전이 파괴되어야 하는지를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전의 부패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성전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옛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강도의 굴혈이 되었으므로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그분을 통해 예배하고 기도하며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잘 정비된 제사 제도나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는 한 인격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대로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요청되는 조건이 ‘믿음’입니다. 의심치 말라는 것은 온전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입니다. 번다한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본질에 대한 참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형식만 남은 가운데 얻어진 능력, 재력, 체력, 지력 등은 결국 멸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그 분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것이고, 그 신뢰에서 나온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저주하심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잘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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