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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버림받아 길을 여시다 (막 15: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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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마 전 지방선거 때 동네 성당에서 투표했습니다. 입구에 성당의 전도지가 있기에 한 장 가져왔습니다. 표지 맨 윗단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 혹시 누가 한 말인지 생각납니까?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작년 4월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남긴 말로 전해집니다. 여유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교황의 모습은 세상에 잔잔한 감동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실망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지도 고상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십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솔직히 슬쩍 숨기고 싶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전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복음의 역설적 진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절규를 음미해보면서 그 깊은 뜻을 새롭게 발견하는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1. 버림받는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33-37)

절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선 예수님이 가장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가장 소중했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지 3시간이 흘러 제 6시 그러니까 정오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인류역사의 어두운 밤을 상징이라도 하듯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또 3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조롱과 멸시를 받는 정신적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시고 묵묵히 잘 참아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었던 아람어입니다.

이는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는 6시간 동안 특히 시편 22편의 말씀을 묵상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시인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신음 중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아무리 기대보려 해도 허공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부르짖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이 절규를 통해 우선적으로 온 몸과 마음으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렘 9:23-24 (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짚어주고 있습니다. 지혜 즉 세상적 지식과 학벌, 힘 즉 권력, 재산 즉 돈입니다. 이런 것들을 지녔다고 해서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이 다 좋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은 주문입니다. 지혜, 힘 그리고 재산은 잘만 사용하면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를 배격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보다 이런 것들을 더 좋아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만일 그 자체가 악마적인 것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격하고 거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의 문제이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보다 이런 것들을 더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차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압박합니다. 세상은 지혜, 힘 그리고 재산의 기준에 따라 사람간에 서열을 확실하게 매깁니다. 얼마 전 한국학원가에서 가장 성공한 학원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동시에 경영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잠시 어떤 교회를 도와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자신은 교회를 거의 안 나오지만 가족은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 교회 성도에게 그의 최근 안부를 물었습니다. 답이 저를 참 슬프게 했습니다. '이제 사람이 영 달라졌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릅니다. 자신은 다른 차원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막강한 재력을 가진 갑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벌주의 문화 때문입니다. 좋은 학력과 실력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학력으로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학벌주의는 문제입니다. 학벌주의 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중·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해보려고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을 내놓아도 얼마 안 가서 무너집니다.

언덕의 성도님들은 이런 세상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의 우선순위를 가슴과 삶에 새길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도 전혀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한센병 환자들입니다. 병세가 심해지면 칼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도 고통을 못 느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저도 신앙이 자라면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못 느끼면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것을 이제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하여 제가 좋아하는 CCM 중에 하나가 '주님은 내 호흡(Breathe)'이란 곡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This is the air I breathe... Your holy presence living in me'. '내가 들여 마시는 산소! 그 산소는 바로 거룩하신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찬송을 진실로 부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절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 버림받아 살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38)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둘째 교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점입니다. 38절에서 그 비밀을 발견합니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성전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을 의미합니다. 일년에 딱 한번 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피를 들고 그 휘장을 열고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수송아지의 피는 자신과 가정의 속죄를 위해 수염소의 피는 백성의 속죄를 위해 각각 속죄소에 뿌렸습니다(레 16장).

죄는 매우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피 흘림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인간이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피를 흘립니다. 여기엔 죄인을 용서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이 졌는데 짐승이 죽어 피를 흘린다는 점에서 아직은 불완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하나의 상징으로 제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짐승과 짐승의 피는 일종의 짝퉁입니다.

드디어 때가 차매 진품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받아야할 심판을 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완벽한 속죄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다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사랑에 기대고 싶어 하셨지만 하나님은 눈을 감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고독을 경험하시며 처절하게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완벽하게 처리되는 순간입니다.

하여 바로 그 때 그 증거로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겨졌습니다. 대제사장이 매년 한번씩 반복해 드리던 피 흘림의 제사가 이제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마음놓고 사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에게 가장 풍성한 생명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짤막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히 10:19-20)'.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잘 말한 것처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아직도 많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24] (22)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24)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사람처럼 표적 즉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의 피 흘림과 죽음은 너무 연약하고 수치스러워 영 비위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니체는 힘을 숭배하며 힘의 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초인(超人)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의 도를 강조하셨고 어린 아이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하여 니체는 힘없는 예수님을 경멸하였습니다. 니체는 솔직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솔직하지 못합니다. 입술로는 십자가를 내세우면서 실은 힘과 권세를 숭상합니다. 세상적 성공과 축복에 신앙을 올인합니다.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셈입니다.

저는 정부와 여당이 추진한 사학법개정안이 완벽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잘못되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반대해온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주장과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형평성의 원칙, 안 믿는 사람의 양심의 자유, 대중문화의 표현의 자유 등에 사법적 압박을 가하면서까지 기독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것은 십자가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말과 행동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핍박받을 자유와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는 바를 사법적인 힘에 기대어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적 힘에 의존하면 겉으론 단기간 내에 왕성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힘의 지배일 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줄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점점 생명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계지도자들은 개신교가 사회복지사업을 물량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하는데 국민들이 안 알아주는 것에 대하여 섭섭하다고 종종 토로하곤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테레사 수녀의 권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일을 하려하지 말고 큰사랑으로 일하려 하십시오'. 사람들이 한국교회로부터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엄청난 재력으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그 과부의 두 렙돈에 담겨 있는 진정한 희생과 헌신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제 힘을 추구하는 태도와 삶을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세상적 힘에 의해 죽는다면 기독교는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이는 낭만적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실현되는 신앙적 현실입니다. 눈을 열어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 사람처럼 여전히 지혜를 찾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통해 발견한 것들을 숭상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우아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1989년에 세상을 떠난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알프레드 아이어 경은 영국의 중앙지 중에 하나인 「가디언」에 기독교를 지독하게 폄하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는 모든 역사적 종교 중 기독교가 가장 형편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로 기독교가 '원죄와 대속적 속죄라는 서로 결합된 교리들, 지적으로 경멸할 만하고 도덕적으로 터무니없는 그 교리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을 바라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 다 기억하시죠. 술 취한 일본사람이 철도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한 한국의 젊은이가 그를 살려내고 자기는 미처 피하지 못해 죽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비도덕적 사건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바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밀쳐내시고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완벽하게 처리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동시에 죄인에 대한 놀라운 사랑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로써 모든 죄인에게 살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을 믿고 걸어가는 사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돌아가시자 주변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3. 다양한 반응들(39-47)

가장 감동적 반응을 보인 사람은 놀랍게도 큰 소리를 지르시며 죽어 가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마주 보고 서있던 로마 백부장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장로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는데 로마 백부장은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둘째, 멀찍이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입니다. 이들 중엔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섬겼던 이들과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였지만 아직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어선 안되겠습니다.

셋째, 용감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받아 장사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그는 명망있는 공회원이었지만 자기 신분을 숨기지 않고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인도받아 정성껏 장사를 지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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