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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사람에게 맺히는 첫 번째 열매 : 사랑 (요일 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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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랑의 문제

헬렌 켈러는 아주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습니다. 7살 되던해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앤 셜리반 선생을 만났습니다. 「삼일만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만든 아름다운 세상과 셜리반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할만큼 셜리반은 헬렌 켈러에게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헬렌 켈러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를 처음 만나 주시던 날, 선생님은 나를 안고 방에 들어가 예쁜 인형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인형'이라고 글씨를 써 주셨다. 내가 '인형'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몹시 흥분하여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 내가 글씨를 쓸 수 있어요'라고 외쳤다. 며칠 후, 셜리반 선생님은 내 손바닥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물'이라고 써 주셨다. 이렇게 하여 나는 수십 수백개의 단어를 배워나갔다. 그런던 어느날, 선생님은 내 손바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셨다.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사랑이 뭐예요?' "

사랑이 뭐예요? 이 질문은 헬렌 켈러만의 질문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물어왔던 질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역사, 소설과 영화, 음악과 예술, 인간의 아픔과 기쁨의 주제가 되었던 그 사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맛난 식사를 마친 뒤 보석 반지 건네며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속삭였던 그것이 사랑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눈망울을 초롱이며 'I Love Korea -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노래하는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이월희 권사가 머리위에 하트모양을 그리며 "알라뷰"라고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것이 사랑입니까?

제 서재에 30권이 넘는 백과사전으로 편집된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사랑에 대한 정의 항목이 없습니다. 사랑은 물량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몇몇 단어로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재에 앉아서 연구해서 알 수 있는 진리도 아닙니다.

영화나 T.V.를 봐도, 소설을 읽고 연극을 봐도, 음악을 들어도 온 세상에 사랑 얘기가 넘쳐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저마다 사랑의 고갈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래전 홍수로 지붕에 갇혀 본 적이 있습니다. 물바다 한가운데서 제일 귀한 것이 물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밥을 할수도 없었고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이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문제, 온 세계의 문제는 사랑의 홍수 속에 진정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의 문제는 경제문제, 원자핵의 문제, 석유자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고갈된 것 -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문제는 모두 사랑이 메말라 생긴 문제들입니다. 심지어 가정도 교회도 사랑이 메마른 것 -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쓰여지던 사랑이라는 단어들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 따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 기독교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상 문헌에서는 잘 쓰여지지 않던 한 단어를 찾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다섯장 안에서만도 동사형 '사랑한다'(아가파오)와 명사형 '사랑'(아가페)를 합하면 무려 46회나 등장합니다(동사형-28회, 명사형-18회). 그래서 신학적으로 보면 요한일서는 아가페 해설서와도 같습니다.

II. 성령의 열매

오늘은 "성령의 열매" 시리즈 그 세 번째 시간 "사랑의 열매"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그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성령의 사람에게 맺히는 첫 번째 열매 - 사랑」입니다. 오늘이 내 이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틀림없이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할 것입니다. - "용서하고 살 수 있었는데,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는데."

가을은 한편 쓸쓸하고 또 한편 의미있는 계절입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가을 식탁에 오르는 풍성한 열매들을 보면 온 삶이 부요로와 집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나뭇잎을 자랑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고 열매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때 우리 또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때 내가 행복할 수 있고 내가 행복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

내 안에 맺혀지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행복해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엔 외적인 열매가 있고 내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외적인 열매를 성령의 은사라 하고 내적인 열매, 성품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역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성령의 열매는 존재에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보십시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그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계명 중 첫번째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요, 은사 중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의 은사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린도전서 12:31)

여기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 - 사랑 장입니다.

성도님들이 각 양 좋은 은사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랑의 은사를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더욱 많아지길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인체의 뼈수에 맞추어서 248개 조항의 '하라'는 적극적 명령과 일년의 날수를 맞추어서 '하지 말라'는 조항 365개 조항을 만들어 합하여 613개 조항의 계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모은 책이 탈무드입니다. 이렇게 많은 율법 조항이 있으니 이 많은 조항 가운데서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를 골라 낸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성도님들이 주의 계명에 순종하되 특별히 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아가페 사랑

기독교적 사랑, 성경이 말하는 사랑 - 아가페 사랑이 무엇입니까? '흔히들 희생적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희생정신이 들어 있다고 아가페 일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3)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만큼 희생을 한다해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하가 던진 수류탄을 끌어안고 작렬히 산화한다해도 투철한 군인정신이지 아가페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요.

혹은 가족간의 사랑,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모델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1:5-7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 형제우애 - 필라델피아 위에 아가페의 사랑을 더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1.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본문 7절에서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즉 사랑의 본질이 하나님이요 사랑의 소속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만이 아가페란 뜻입니다.

2. 본문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의 뿌리가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 하나님일 때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본문 7절에서 아가페 사랑의 성격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가페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자동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자동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온 몸에 화상을 입고 30번 이상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엉덩이 살, 허벅지 살을 30번이나 짤라가며 남편의 성형수술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자신을 위해 30번씩이나 넓쩍다리 살을 짤라주던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고 그는 울부짖습니다. "여보,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건만 당신의 사랑은 피보다 더 진했소."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입니까?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는 아가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가페 일 수도 있구요. 이 사랑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이 사랑의 출발과 목표가 하나님일 때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모델이 9절과 10절에 나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것 - 이것이 아가페 사랑의 모델입니다.

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여기 친구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요 그것이 가장 큰 사랑 아가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순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의 극치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적 사랑에서 구원론적 사랑을 빼고 다른 사랑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 구원론적 사랑입니다.

·구제가 귀하지만 구제로 아가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행이 귀하지만 선행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수련이 귀하지만 수련으로 기독교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구원론적 사랑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바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남편,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아껴도 가족구원에 무관심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건 세상적 사랑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아가페는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이 아닐 때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거기엔 인간의 이기심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랑이 도사려 있을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중심적 사랑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무관심한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 영혼을 구원하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IV.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정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기 이전에 하나님 그분 자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요 사랑의 덩어리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힘과 근거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기 싫어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덩어리 그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사랑이 싫어 집나간 자식 탕자를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재산 다 탕진하고 돌아오는 그 자식이 귀해 잔치 베풀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아가페는 무조건 용서하시는 사랑, 용서해 놓고 눈물로 기다리시는 사랑이십니다.

일찍이 그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 전하다 죽은 종이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랑이야기를 요한복음에 기록했고 요한서신에 기록했고 요한계시록에 기록해 놓앗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항상 중얼거리며 다녔습니다. 설교시간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그 간단한 설교를 듣고 울었고 감동했습니다. 성도들은 사도요한을 붙들고 하나님 사랑이야기 또 들려 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요한은 예수님이 남편 여럿을 두었던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사랑을 베푸신 모습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기를 못박는 원수들까지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고 주님의 사랑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또한 배반자 베드로를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사랑을 볼 줄 알고 사랑을 느낄 줄 알고 사랑을 평생토록 기억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을 줄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자기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느끼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주 어린애기처럼 예수님의 품에 안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묘사할 때 마다 사용하는 수식어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바로 제자!" -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 자랑스런 말, 복된 말입니까?

아마 이와 같은 요한의 언행에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요19:26). "막달라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요20:2).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요21:7).

그렇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사랑에 전염되어 하나님 사랑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하나님 사랑 전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녔습니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어느 사람보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고 마지막까지 십자가 밑에 서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요한만큼 이웃 사랑을 강조한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은 입을 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중얼거리면서 다녔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심으로 삶을 나누며 사랑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혀진 사람은 과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의 목사, 사랑의 집사, 사랑의 권사 - 이 이름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V. 맺으며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열매에 관한 절정의 이야기가 구약성경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사랑을 전하게 하신 선지자 호세아의 글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이 여인은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음탕한 아내 고멜을 사랑했습니다. 고멜이 딸을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고백입니다. 얼마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번에는 "로암미"라 불렀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아내가 낳은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아내의 생활이 방종했고 얼마나 타락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사랑합니다. 호세아는 그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멜이란 여자는 남편의 그 따뜻함을 배신하고는 다시 집을 뛰쳐나가 다른 남자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인을 어찌 아내라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호세아는 더욱 그의 아내를 아껴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아내의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세상에 시런 사랑 이야기가 어디 있으며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는 음탕한 자기 아내를 이렇게까지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아내를 사랑하는 호세아의 사랑보다 크다는 말입니다. 이 불가능한 사랑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아가페 - 사랑의 열매입니다.

호세아서 3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고멜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요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멜처럼 사랑받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우리도 고멜을 사랑하는 호세아처럼 불가능한 사랑이 가능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여, 충만히 임하셔서 우리의 일그러진 성품을 바꾸어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하소서! "사랑의 성도"라는 이름을 얻게 하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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