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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이 흐르는 말씀의 강물 (사 48: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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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은 “추석”이었습니다. 추석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명절 몇 개 중에 하나입니다. 추석은 우리식의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 제정되고 행해져 왔지만,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추수하게 하신 모든 아름다운 것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아직도 추석인사가 유효합니다. 즐거운 추석에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저께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위해 집을 나서던 중 어떤 조그만 주유소에 들렀습니다. 사방이 고요하고 깜깜했습니다. 주유소에만 몇 개의 불이 밝혀 있었습니다. 주유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문득 주유소 벽에 붙어있는 말을 읽게 되었습니다. 먼발치에 있어서 글자는 희미했지만, 순간 잔잔한 충격이 다가왔습니다.

      Reward yourself!
      너 자신에게 보상하라!

왜 그 글자가 거기 써 있는지, 그건 무슨 뜻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 말 그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교회까지 오는 30분 동안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옷을 사 입고, 얼굴을 꾸미는 일이 “자기에 대한 보상”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남의 즐거움을 위해 수고하는 것도 귀중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잘 하기 위한 노력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보상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선물은 무엇입니까?

평강입니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평화입니다.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무엇을 입어도, 무엇을 먹어도, 무슨 일을 해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일은 귀한 것을 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억지”가 됩니다. 자기에게 평강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 평강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Reward yourself!
나 자신에게 최고의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평강입니다.
그런데 내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남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아내를 무시하는 사람은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아내에게 옷 사 주고 꽃 사주는 사람은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예쁘면 남편을 칭찬합니다. 아내가 불행하면 남편이 불행해집니다.

그러므로 Reward yourself! 이 말은 “Reward your wife!” 이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독특한 은혜=평강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아니어도 능히 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서면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없어도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일 때문에”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합니까? 과연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라도 대신할 수 있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를 이처럼 “독특하게”(unique하게) 만드셨을까요? 그리고 왜 이처럼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셨을까요?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 놀라운 은혜는 말로 형용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사랑을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평강입니다. 우리 자신이 평강을 누리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강은 소중합니다. 또한 이 평강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누릴 평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말씀의 강물”이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 물은 어디서나 수평을 유지합니다. 물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물,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물은 우리에게 평강을 줍니다. 어디서나 물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균형이 잡힙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고요한 질서가 생겨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겸손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런 가운데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낮춥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3. 물은 맑아야 제 구실을 합니다. 썩은 물은 도리어 해롭습니다. 맑은 물이어야 생명을 “품을 수” 있습니다. 맑다는 것은 능력의 크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투명하고 정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런 물이 흘러가는 것이 강물입니다. 강물은 생명을 줍니다. 강물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성경에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물의 맥”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흐르던 네 줄기의 강물은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수 강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여러 강물의 역사가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겔 40-48) 중에 하나님의 제단에서 흘러내리는 말씀의 강물이 동쪽을 향하여 흘러내려가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죄로 물든 세상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어지럽던 세상에 평화를 주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의 강물이 평강을 줄 수 있습니까?

1. 말씀의 강물은 씻음(cleansing)의 능력이 있습니다.
강물은 씻습니다.
몸을 씻습니다.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옷을 씻습니다. 빨래를 하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에는 겨울대로 옷을 빱니다.
하루 종일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은 농기구를 강물에 씻습니다.

2. 강물은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식물이 자랍니다.
물고기가 삽니다.
새들이 모여들고, 짐승이 삽니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을 묘사할 때 강물이 흐르는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네 개의 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대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묘사할 때도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2, 개역

생명수의 강은 맑습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났습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열 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습니다.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3. 강물은 마시는 물입니다.
물이 맑아야 합니다.
좋은 도시는 맑은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파리      센강
런던      템스강 
뉴욕      허드슨강
서울      한강
새크라멘토      새크라멘토강

샌프란시스코는 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맑은 수원에서 물을 공급받습니다.

이제 강물을 직접 마시는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공해 때문입니다. 그래도 강물이 맑다는 것은 도시의 건강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정은 영적인 강물이 맑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적인 강물이 맑아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쓰레기를 제거하고, 더러운 것을 강물로 흘려보내는 비양심적인 행위를 중지해야 합니다.
거리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워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언어활동, 삶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나 그의 삶을 보면 맑은 강물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강물의 흐름이 이어져야 합니다.
성도는 이런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작년 10월 3일은 샌프란시스코 성시화대회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날 주강사로 초청된 에머슨(Emerson)박사는 시편 46편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맑은 강물이 흘러가는 도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에머슨 박사는 쓰레기가 쌓여있는 타이페이의 강을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강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강물은 얼마나 깨끗합니까?

이제 묻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맑은 강물이 흘러갑니까?
우리의 가정에는 깨끗하고 온전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성경의 강물은 “말씀의 강물”입니다.
말씀의 온전한 강물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의 강물을 “순종”함으로써 누립니다. 순종이 없다면 그냥 강물을 보고 지나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강물로 뛰어들어
1. 몸을 씻는 사람입니다.
2. 강물로 소성케 된 식물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3. 강물을 마셔서 갈증을 푸는 사람입니다.

강물로 몸을 씻는 것의 의미.
죄를 정결케 하심입니다.
잘못된 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평강은 이런 “돌이킴”에서 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로부터 “단절”됨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로움”을 획득한 것입니다.


본문분석: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 본문을 통해 예언한 때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예루살렘이 불에 탄 후, 대부분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목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중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했더라면 너희 평강이 강물 같았을 것이다!” 하신 말씀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망했고, 그래서 포로가 되어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기억하고 바르게 순종한다면 우리는 강물 같은 평강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이 복음성가는 말씀으로 흐르는 강물의 은혜를 노래한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통만 겪고 평강과 은혜는 전혀 누리지 못하다가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평화를 누린다는 생각은 거부합니다.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 천국소망을 제대로 품을 수 없습니다. “부정적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 그것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끼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흔히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희귀한 일”입니다. 예외라는 말입니다. 훌륭한 가정생활이 바탕이 있어야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갈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런 재목으로 성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용은 개천에서 날 수 없습니다. 개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개천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이었지만 하나님과 역사와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믿음을 지닌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였지만, 우주를 내다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키워갈 수 있는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조그만 시골학교였지만 온 세상을 바라보며 꿈을 가꿀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한 위대한 선생님이 거기 있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였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위대한 종이 거기 있었습니다.

어찌 그런 자리를 “개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거기서 인류에게 소망이 될 비전을 제시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난다는 것은 “불가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진정한 소망은 “유예된 소망”이 아닙니다. 지금은 굶고 나중에 잘 먹자, 그런 말도 아닙니다. 지금부터 먹고, 지금부터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은혜를 받고, 지금부터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그리고 “나부터” 보상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새벽 이른 시간에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시는 일. 거기서 죄책감을 느껴선 안 되겠습니다. 나에게 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를 잘 대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밭에서 참외를 땄습니다. 잘 익은 것은 “팔 것”입니다. 그래서 먹지 못하고 봉투라지 같은 것만 아이들에게 줍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가장 잘 익은 것을 아이들에게 주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에게 주는 방법으로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이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예로 들어 봅시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것, 그것은 곧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꽃 나무 하나라도 좋은 것을 심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교회에서 양육 받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잘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보상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전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목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당했고, 바벨론을 종으로서 섬겨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그냥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졌다가는 힘만 들고, 일은 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주여,
      저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복종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순종하지 않기로 맘먹고 읽는 사람
매사에 의심입니다.
꼬투리를 잡습니다.

2. 순종하기로 맘먹고 읽는 사람
모든 것이 “예”요 “아멘”입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능력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개역

그렇습니다.

이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잘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물에 우리를 이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클라식 연주회”를 엽니다.
클라식 교회음악은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길”의 하나입니다.
성경말씀을 우리의 삶에 해석하는 것입니다.
말씀묵상인 셈입니다.
오는 주일에 여러분을 초청해서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지난 주중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e-mail을 받았습니다. 지난주 설교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하여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1.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어떻게 인간에게 질 수가 있을까?
      2.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씨름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인간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나는 간단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그가 드린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도는 기도 중에 간절함을 드려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드리면서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드린 기도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하)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곧 죽을 준비를 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사 38:3) 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요나도 기도 중에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3:3)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두 간절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평강은 그 간절함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념하고, 그래서 얻어지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거기서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는 거위는 물 아래서 빠른 물갈퀴 운동을 합니다. 그래야 물살과 바람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누리는 ‘평강’의 비결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하는 것,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소나무 뿌리를 몇 개 뽑아내는 그런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강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순종의 길. 그것이 평강의 길입니다.
말씀순종은 그냥 되지를 않습니다. 육신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 개역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2하, 개역

말씀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리고 힘이 생겨납니다. 삶의 의욕이 솟아납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하루 중에 한 시간 이상은 성경 읽는 시간으로 ‘확보’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대하여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삶의 모든 부분이 “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음을 알 것입니다. 손님을 대할 때도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언행 모두가 진실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세가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하는 것.
그것은 성경을 읽을 시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씀을 읽노라면 모든 시름과 걱정 근심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노라면 삶에 ‘질서’가 생기고 ‘규모’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Reward yourself!
그 말을 읽던 지난 금요일은 “추석”(秋夕)이었습니다. 송편 먹던 명절. 한국식 “추수감사절”입니다.
미국 와서 사는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추석이구나! 생각하고 지낸 것이 채 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께는 추석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또 중국어 시간에도 대만 출신 중국어 교수가 자꾸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뉴질랜드로 떠난 금문인 가족들이 “추석인사”를 홈페이지에 올려서 추석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직도 추석 주간입니다. 내일은 게다가 휴일 아닙니까?

하나님 주신 모든 아름다운 것을 즐기십시오.
산도, 들도, 아름다운 열매도 모두 우리에게 “즐거움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참된 평강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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