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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가족 (막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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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막 3 : 31 -35)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보면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표이며 완성입니다.
한 가정이 만들어 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 : 31)며 기뻐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사랑으로 만나게 하는 것 속에서, 그리고 자녀를 낳고 기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시며, 어떤 인격을 가지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하나님과 성령과 아들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투사입니다. 부부가 서로 보완하며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의 참여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고향을 찾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혈연 공동체의 가족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고향을 찾아 3천만명이 이동하여 부모형제를 찾는 사람들… 죽은 조상의 묘를 찾아 풀을 베며 차례를 지내는 풍속을 통해 사람들의 인지상정의 모습은 훈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혈연으로 묶여진 가정 공동체는 늘 한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미움의 독과 시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툼과 원망이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추석 날 재산다툼으로 누나를 살해한 동생이야기,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불속으로, 자동차바퀴밑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진 두 어머니의 희생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게도하고 경악하게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인간의 진정한 공동체인 가정은 사탄의 유혹으로 파괴되는 고통을 겪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책임 전가, 원망, 가인이 동생 아벨을 향한 분노의 돌을 내리칠 때, 처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가정의 모습은 마침내 깨어져 버렸습니다. 혈연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혈연 공동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혈연을 넘어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앙과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공동체, 바로 이 공동체를 사람들은 기다렸고, 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과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특징 있는 다양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따르던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고 결국에는 죽이려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주위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친척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때, 온 집안이 기독교 신앙인이 아닌 경우, 이 세 부류의 모습은 언제든지 우리들 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를 들러보십시오. 우리들의 주위에도 세 부류의 사람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보고 "미쳤다"라고 하며 그렇게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 종교적으로 정죄 받은 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큰 공헌을 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나옵니다마는 막 3장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은 예수님을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찾아 왔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깥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밖"에 서 있음으로써 예수님의 세계가 아닌 바깥 세계에 머물러 있는 외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가까이 있었고, 모든 것을 지켜보며 살았으나 자기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내 아들인데…, 내 오빠인데…, 내 형인데…"라는 자기의 경험의 범주 안에 갇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만을 고집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나타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고,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아니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예수님을 가장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나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32절)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고, 예수님을 둘러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 "이름도 없는 무리들"은 그 당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천하고 경건하지 못한 죄인들이었고 종교적 대열에서도 제외되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내세울 것도 없고 인정받을 만한 것도 없는 이들은 인생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자기부정과 심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생에 대한 절망과 좌절 속에 아픔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때, 즉각 참가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속에서도 고통과 슬픔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외면을 많이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가난하고 못배우고 병든 자들은 항상 멸시와 무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속에서 예수님은 천대받는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 에수님께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밖에 서있는 것"과 "앉아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닙니다. "밖에 서있는 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외인이며, "안에 둘러앉은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은 밖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전혀 해독이 안되는 귀와 눈이 막히고 가리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리, 죄인의 자리에 서있는 또 다른 그들은 마음을 타고 전율로 흐르는 말씀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에 그들은 자기들의 눈과 귀를 귀울였습니다. 자기들처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신들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이 임하고 위로가 임한다는 말씀이야말로 이들 인생에 대전환이 일어나는 대변동의 사건이었습니다. 인생의 실존적인 모든 문제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못살겠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런 은혜를 기억하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함에 대한 자기 실존의 고발앞에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오는 영혼의 울림이었습니다. 영혼을 울리는 소리에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귀가 터지며 그들의 뱃속에서는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이해해주고 공감하면서 바르게 지원해주는 좋은 대상이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현대정신의학에서는 거의 난치라고 분류하는 정신분열증도 저희 상담심리쪽에서는 "촉촉한 비가 3-4년정도 그 사람에게 내린다"면 완치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대상과의 바른 접촉,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족히 3-4년만 게속된다면, 정신이 파편화되어 자기가 분열된 상태에서 자기의 통합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이 희망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을 환자들과 부모들이 이 세상 어디에는 없겠습니까?

34절에서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보라"! 여기 이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혈연인 어머니와 형제들·자매들을 놔두고 예수님을 둘러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비천한 무리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족에 대한 이보다 더 철저하고 혁명적인 선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혈연 가족을 뛰어넘은 신앙가족의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5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누구든지는" 인종과 성별과 사회적인 지위는 더 이상 예수님 가족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아닌가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기준이며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예화】황선미씨의 장편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책이 있습니다. 내용은 닭장 철망속에서 알을 낳기 위해 기르는 잎사귀란 이름을 가진 암탉이야기입니다. 암탉 잎사귀의 소망은 양계장 철망속에서 갇혀 돌아다닐 수도 없고 날개를 푸덕거릴 수 없고 알을 품어 본적이 없었기에, 마당으로 나가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까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계장의 철망을 벗어나 안전하게 여겼던 마당으로 나갔다가, 늙은 개와 토종닭인 암탉과 수탉과 집 오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들판으로 나가게 됩니다. 양계장의 알을 낳은 암탉과는 다른 길을 가기위해 잎사귀란 암탉은 들판에서 굶주려야 했고,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의 따돌림속에서도 굳굳하게 외로움을 견뎌야 했고, 족제비의 위협앞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자기 알이 아닌 부모잃은 청둥오리알을 품어 아기오리로 키웠내지만, 아기오리는 자라서 동료인 야생 청둥오리떼에 섞여 어미닭 잎사귀를 떠나버립니다. 늘고 비쩍 말라 털은 다 빠져 볼품없어진 암탉 잎사귀는 결국 오랫동안 자기를 노려왔던 족제비에게 아카시아꽃처럼 눈이 폴폴 내리는 날, 잡아 먹힙니다. 그리고 족제비에게 잡아먹히면서 자신의 마지막 소망이 하늘을 자유롭게 한번 날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와 같은 동족이 아닐지라도 끝가지 부모잃은 오리알을 품어주고, 그 오리새끼가 자라서 자기무리를 찾아 가도록 헌신하다가, 결국은 휑한 눈을 가진 굶주린 족제비의 어린 새끼들을 떠올리며 "자! 나를 잡아 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의 배를 채워라"며 죽어가던 암탉 잎사귀를 떠올리며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 마당을 나온 암탉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없이 마음속에 따뜻하면서도 슬픈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혈연을 뛰어 넘는 불쌍히 여김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야말로 오늘 이 각박한 이기적인 현실속에서도 예수님의 한 가족됨의 초대자리에 가장 합당한 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자리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문제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밝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주기도문(마 6 : 10, 눅 11 : 2)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라고 간구하십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마 26 : 42, 눅 22 : 42)의 기도에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막 2장에서는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므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 : 17)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서도 안식일의 주인은 (막 2 : 28) 예수님임을 천명하심으로써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십니다.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을 통하여, 세리와 죄인을 부리심을 통하여, 금식논쟁을 통하여, 안식일 논쟁과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야 말로 병자의 영혼을 고치고, 병자의 육체를 치료해 주며, 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가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기쁘고 설레이는 추석 명절은 혈연 중심의 문화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문화보다 혈연 공동체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자리,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자리는 무엇이겠습까? 바로 주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뜻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의 한가족됨을 "주일"이란 기독교인의 예배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형제이며 자매인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임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지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느니라"(마 3 : 9)고 하신 경고의 말씀은 예수님앞에 나왔으나 예수밖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어도 생각과 판단의 중심이 예수님에게 있지않고 나 자신에게 있으면 그것 역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신앙이란 예수님을 나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가족의 자리인 주일 신앙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들로써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루어야 할 공동체성입니다.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나 빈부의 귀천이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세계복음화도 이 주일신앙공동체의 회복속에서 우리시대의 교회의 사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가정의 의미가 주 예수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진정한 주일 신앙공동체가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즐겁고 기쁜 추석명절을 보내면서 인간의 만들어낸 혈연공동체의 한계성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오직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한 형제 자매 됨의 신앙공동체로 태어나 하나님 나라를 확대시켜 나가길 원합니다. 주일예배가 예수님의 가족됨의 자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축도:
지금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님의 가족됨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함에 있음을 마음에 깊이 각인하며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새문안의 모든 성도들 위에, 나라와 민족위에 영원히 함께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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