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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겉과 속이 다른 신앙(말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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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라기 1장 7절 - 14절
제목  겉과 속이 다른 신앙

남편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대요.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해.  남편 잘 만났다고.  잘 생겼어, 키도 커, 마음도 좋아, 돈 잘 벌어와.  아마 저 같은 사람이었나 봐요.  그래 친구들이 “너 좋겠다.  얼마나 행복하니?” 그런대요.  한번은 동창모임에 갔는데 친구들이 또 그러더래요.  “너 좋겠다. 남편 잘 만나서”  그랬더니 이 여인이 버럭 소리 지르더래요.  “그렇게 부러우면 니가 데리고 살아라”
겉으로 비춰지는 남편의 모습과 함께 사는 남편의 모습이 다른 거예요.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외국에 나가보니까 외국 목사들 가운데 한국 교회 모르는 목사가 없어요.  비약적인 성장에 부러워해요.  소문났어요.  한국 교회 배우겠다고 한국으로 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겉으로 비춰진 우리 모습이 전부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같은가 하는 점입니다.

지난 수해 때 강의 낙동강 변의 뚝방이 무너져 주변 마을이 크게 피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뚝방이 왜 무너졌나 원인을 살펴보니, 뚝방을 만들 때 건축 폐자재로 만들었는데, 원래 건축 폐자재로 만들 때는 잘게 부수어서 잔자갈처럼 만들어 뚝방을 만들어야 하는데, 잘게 부수지 않고 그냥 뚝방처럼 쌓고 그 위를 흑으로 덮었데요.  잘게 부수면 돈이 더 들어가니까 그랬던 것인데, 그래 그 뚝방이 물에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겉으로 볼 때는 그럴듯한 뚝방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물을 막아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속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뚝방이나 우리 주변의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신앙도 겉모습과 속모양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대형 예배당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그런데 우리 신앙의 면면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심각한 부실공사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요.  오직 나만 있을 뿐이지요.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겉모습을 그럴 듯  하지만 속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겉모습은 그럴 듯 하지만 속으로부터 썩어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래요?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예요. 

말라기 선지자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부실함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뻔뻔한 신앙입니다. 
잘못해 놓고도 잘못한지 모르고, 잘못해 놓고도 오리발 내미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7절 上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더러운 떡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상하거나 곰팡이가 생긴 떡이거나 아니면 첫 열매가 아닌 오래된 곡식으로 만든 떡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8절에서는 눈 먼 것으로 드렸다고, 다리 절고 병든 것으로 드렸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떡을 드렸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거예요.  하나님은 눈멀고 다리 절고 병든 것을 드렸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거예요.  완전히 오리발 내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뻔뻔해 진 것입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 학교 다닐 때부터 장동건이 유오성 따라다닌 꼬봉이었지요.  나중에 장동건이도 스스로 컸다고 생각되나봐요.  그래 유오성이에게 뭐라 이야기하냐면 “내가 니 시다바리가?” 그러지요.  그래요.  세상 살다보니까 우리들도 살만해요.  나도 많이 컸어요.  그래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거지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시다바리입니까?”  뭐예요.  이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은 형식적으로 대충 때우면 되는 겁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짐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짐으로 여기는 때가 많지요.  그래 이런 사람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남들 눈치 보아가면서 해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남들에게 저 욕먹을까봐 어쩔 수 없이 해요.  그냥 하는 체 하는 것이지요.  왜 그래요?  이제는 부모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거든요.  살다보니까 부모님이 오히려 짐이 되는 것 같거든요.  없어져 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 눈은 있고, 말은 못하고.  그냥 체 하는 것이지요.
우리 신앙이 그래요.  교회 다닌다니까, 뭔가 신앙 생활은 해야 하겠고, 열심히 하기는 싫고, 사실 하나님 없어도 나 혼자 잘 살 수 있는데.  그냥 그냥 적당히 적당히 신앙생활 해요.  그리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그 정도면 저 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떡을 드렸다고 호통을 치는데, 우리는 “하나님 제가 그 정도 해 드리면 잘 했잖아요”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 드려 주었으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그러는 거지요.  직분자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와요.  그러면서 하나님 이정도 하면 됐지요?  그래요. 
뻔뻔한 우리들을 항해서 하나님 뭐라고 하셔요? 
10절 下입니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나는 뻔뻔한 너희들이 싫다는 겁니다.  뻔뻔한 너희들이 드리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②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별게 아닌 것으로 여기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8절 下입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사람에게 주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바칠 때는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칠 때는 병든 것이나 오래된 것,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바쳤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그들을 다스리는 총독에 대한 태도보다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국 총독이 더 실세라고 보았기 때문이예요.  군대에서는 멀리있는 장군보다 가까이 있는 일등병, 짝대기 하나가 더 무섭다고 합니다.  장군은 멀리 있어서 실제적인 나의 생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고참은 늘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나를 괴롭게 하기도, 나를 편하게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사실 그 고참도 장군의 결정적인 한마디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예배를 드리기로 약속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상당히 많은 물량을 사겠다고.  그럼 누구를 만나시겠습니까?  하나님 만나시겠어요?  아니면 물건 사러온 사람 만나겠어요?  당연히 물건 사러 온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왜 그래요?  우리가 실질적으로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분은 하나님보다는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실세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사, 눈에 보이는 높은 사람이 더 실세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지요.
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에 유엔 대사가 왔었어요.  유엔대사하면 외무부장관 다음 서열인데요.  주일날 교인들이 달라요.  전에는 잠바 입고 교회오고, 티셔츠 입고 오고 그랬는데 그날은 다 양복입고 오더라고요.  그리고 저희는 예배 드리기 전 30분전쯤 가서 의자 정리하고 그랬는데, 그 날 따라 일찍와서 의자 정리하고 그러더라고요.  왜 그러나 했는데 유엔대사가 오니까 그랬던 거.  유엔 대사 올 때는 양복입고, 하나님 만날 때는 티셔츠 입고.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지요.  유엔 대사 앞에서는 조신하더니, 하나님 앞에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와 예배 드릴 때, 내가 지금 대통령 앞이라면 어떻게 하고 있을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입은 옷은, 몸 가짐은, 마음 가짐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누구를 실세로 여기며 신앙생활하고 있냐고요. 
저는 예배당의 의자가 갈수록 안락해 지는 것 같아 걱정이예요.  뒤로 척 늘어져서 예배를 드리려고 해요.  왜요?  편하니까.  내가 편하니까.  예배 시간에 보면 다리 꼬고 앉아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편하니까.  저는 묻고 싶어요.  대통령 만나면, 사장 만나면 그렇게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대통령은 어려우니까.  사장님은 어려우니까.  그러나 하나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별로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에게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장군과 같으니까.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실세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우리의 신앙,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③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이예요. 
10절 上입니다.  “내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유다 백성들이 더러운 떡이나 병든 짐승으로 하나님께 바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드리지 않는 것보다 이런 것이라도 드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부모님들 아이들 학교 일찍 가고 늦게 오는 것 좋아하는 부모들이 있어요.  오랫동안 학교에 가 있으면 공부할 것 아니냐.  집에서 노느니 학교에서 노는 것이 그래도 낫지 않겠느냐.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보면 학교에서 노는 것하고 집에서 노는 것은 똑같더라고요.  학교에서 논다고 성적이 더 올라가는 것 아니고, 집에서 논다고 성적이 더 떨어지는 것 아니고.  노는 것은 다 똑같아요.  단지 우리 마음이지요.  학교에서 놀면 그래도 좀 낫지 않겠느냐는.
주일 날 교회에서 놀면 좀 나아요?  유다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 하나님께서는 헛되이 드리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헛된 것이라는 거지요.  드리나 안드리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왜 그래요?  중심이 없기 때문이예요.  형식적인 신앙 생활은 하나 안하나 만찬가지예요.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드리나 안드리나 마찬가지예요.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예요.  형식적으로 드리는 찬양은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예요.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나마 형식적이지만, 내 마음을 담지는 않았지만 드렸으니까.  스스로 자족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병입니다. 
제가 등이 자주 가려워요.  제 손으로 못 긁잖아요.  그래 아이들에게 특히 둘째에게 긁어 달라고 합니다.  좀 세게 긁었으면 좋겠는데. 긁는 건지 간지럼을 태우는 것인지.  가려운데 긁었으면 좋겠는데 다른데만 자꾸 긁어.  그리고 아빠 됐어?  아빠 됐어?  그래요.  저도 싫지요.  재미있는 게임을 하다 말고 아빠가 긁어 달라니 얼른 긁어 주고 게임 계속해야 하는데.  그냥 대충 긁고 아빠 됐어?  물어보는 것이지요.  그럼 저는 “야! 그만둬” 그래요.  내가 긁고 말지. 
하나님께 안할 수는 없으니까,  대충 하고 “하나님 됐죠?  됐죠?” 그래요.  형식적으로 해 놓고 “하나님 됐죠?  하나님 됐죠?”  그래요.

우리 하나님 뭐라 말씀하시냐면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요.  성전 문을 닫았으면 닫았지 형식적인 신앙은 싫으시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신앙 말고, 내가 원하는 예배 말고, 내가 원하는 기도 말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찬양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④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계산적인 신앙이예요. 
그래서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요.  이익이 되면 열심히 하다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인색해요. 
14절 상입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처음에는 흠이 없는 수컷으로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수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무리가 있는데, 아무런 흠도 없는 수컷을 드리기에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래 흠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더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요.  하나님 뭐 하겠습니다.  해 놓고 나중에 막상 약속한대로 하려고 보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  괜히 약속했어.  약속 안지킬 수도 없고.  지키기는 지켜야 하겠는데.  그래 명목상 약속은 지키고, 나에게는 별로 손해 안되는 방향으로 신앙 생활을 해요.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하나님께 드릴 것 같다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철저하게 인색해 지는 것이 우리 신앙이라는 말씀이예요. 
신앙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해서 하는 것이 아니예요.  내 이익을 계산하면 신앙생활 할 수 없어요.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잘 듣는 말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말은 잘한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요.  한국 교인들 정말 말은 잘해요.  말은 잘한다는 말은 말은 잘하는데 행동은 하는 말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말과 행동이 따로예요.  신앙과 삶이 따로예요.  또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계산 속이 빠르다는 말을 들어요.  계산을 잘한다는 말,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예요.  계산해서 행동한다.  이익이 되면 몸을 움직인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계산적인 신앙,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시냐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이예요?  이익이 되는 것 같아서 행동했지만 결국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예요. 
2년 전 겨울에 친척 집에 갔어요.  쌀이 있는데 가져 갈 것이냐고 물어 보시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1년이 넘게 지난 쌀인데, 쌀은 많이 남았는데 벌레가 너무 많아서 먹을 수가 없어.  그래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래 달라고 했지요.  그것 받아서 잘 썼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주변에서 난리예요.  어차피 벌레 먹을 것 주려면 일찍 주기나 하지.  먹다가 못 먹으니까 준다고.  제 친척 가운데 쌀 주신 분 잘했다고 하는 분 없더라고요. 

수컷 드리는 것이 손해인 것 같아서 흠이 있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어.  어차피 병든 것은 팔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할 것이니까.  어차피 처분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키고 손해도 안보고 그래.  그래서 흠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주받는 데요.  오히려 손해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뭐예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것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씀이예요. 

2000년 7월,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대생이 음주 운전자에 의해 일어난 6중 추돌 사고로 55%의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사건입니다. 불이 붙어서 타고 있는 동생을 꺼낸 오빠는 엠블란스 안에서 동생을 괜히 살렸다고 한 때 후회했데요.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더래요.  상태가 너무 심해서.  이 때 오빠는 동생을 잃는구나 생각했데요.  나중에 성형수술까지 마쳤는데 땀을 흘리는 부분이 목 부분밖에 없다고 해요.  예쁘고 꿈도 많았던 여대생은 5분도 채 안되던 순간의 사건으로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이름은 이지선.  불에 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하나님 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 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더 좋아요.

내 부족한 외모가 아닌 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참 좋아요.

이지선 자매는 자신은 믿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요.  지금도 믿음 때문에 산다고 이야기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만 그럴싸한 믿음 말고, 겉 멋만 잔뜩 든 그런 믿음 말고, 중심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그런 믿음을 소유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잘못해놓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믿음 말고, 잘못해 놓고는 무엇을 잘못했냐고 오리발 내미는 그런 믿음 말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겨 드리는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소유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해서 이익이 되면 열심이다가 이익이 안되면 접어버리는 그런 계산 적인 신앙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신앙,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라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선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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