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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의 차이 이야기 (욘 1:1-2, 욘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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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의 차이 이야기”  욘1:1-2, 4:9-11 

  저는 요사이 새벽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나에게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느낌과 주님의 눈물을 내 몸과 마음에 지니게 하시옵소서!”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과는 정 반대인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더듬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위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욘1:2). 3장 2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3:2). 요나서 4 장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하나님께서는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성읍을 향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을 품고 계셨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대국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힌 가장 악독한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그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니느웨 성벽에 진열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가장 악독하고 무자비한 나라였습니다. 니느웨 성읍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상달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1:2). 요사이 말로 하면 앗수르는 가장 악독한 ‘악의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악독한 ‘악의 축’이었던 앗수르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저주와 심판 이전에 불쌍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3:2).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선고하시기 전에 특사와 천사와 선교사를 한 사람이라도 보내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생각과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오늘날 북한이나 이라크나 아프가니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도 꼭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선고하시기 전에 특사와 천사와 선교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보내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선지자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도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요나는 자격이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무자격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을 자기의 특사와 선교사로 선택하시고 그를 니느웨로 보내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무자격을 모르셔서 실수로 그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아무데도 쓸데 없는 못된 인간이었습니다. 꼭 저와 같은 못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저를 하나님의 특사와 선교사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날 알 수 없도다.”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2-15).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면서 자격이 없는 요나를 자기의 특사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그대로 내 버려두시지도 않고 그를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으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고,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끄집어 내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으며, 그를 억지로라도 니느웨로 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에게 화를 내면서 대드는 요나에게 호소의 말씀을 하신 것은 너무나도 황송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다시스로 태우고 가던 이교도 뱃사람들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바다에 폭풍이 일어났을 때 뱃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사공이 두려워 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욘1:5).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부르는 이교도들을 괘씸하게 여기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바다 물에 몰살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바다의 폭풍으로부터 보호하여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했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킨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4-16).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도, 불순종한 요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교도 뱃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품으신 생각과 마음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둘째,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요나는 먼저 하나님과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임했을 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요나서 4장에 보면 요나의 생각과 마음에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한 처사에 대해서 항의를 하면서 죽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1-3). 사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니느웨 성읍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했어야 하는데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니느웨 성읍에 대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생각과 마음이었습니다. 요나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도 긍휼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요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와 긍휼도 품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도 지니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완벽하고 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자기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은 귀한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두 소경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그런 마음도 없었습니다. 요나는 너무 도도하고 너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을 타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욘4:2). 요나는 너무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나 긍휼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니느웨를 향한, 그리고 자기를 향한, 불만과 증오와 분노만이 그의 생각과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에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킨 반항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는 하나님의 호소 섞인 질문에 그래도 항복하면서 무어라고 한 마디 죄송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그저 침묵만 지켰습니다. '침묵이 금'이란 말도 있지만 이와 같은 경우의 침묵은 오만 불손한 반항의 침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침묵의 죄"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오만 불손하게 침묵하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요나는 너무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셋째,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이 어떠한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나서가 주는 가장 큰 교훈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들은 다 요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니아 이방인이나 우리는 모두 요나와 같습니다. 서양 사람은 물론 우리 한국 사람도 모두 요나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불순종하는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무정하고 냉정한데 있어서 요나와 같고, 그리고 증오하고 분노하는데 있어서 요나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도 긍휼도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일부 백인 기독교인들이 미신을 믿던 인디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미신을 믿던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지금은 모슬렘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무참하게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과 종교와 문화와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그 누군가에 대한 무정함과 증오와 분노를 품고 그 누군가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퍼 붓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그 누구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가르침과 행위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와 반항의 마음을 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옛날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생각과 마음에도 자비와 긍휼보다는 불만과 증오와 분노가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과 종교와 문화와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그 누군가에 대해서 무정함과 증오와 분노를 품고 그들에 대해서 저주와 심판을 퍼 붓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요나서 강해를 저술한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요나의 불순종과 반항을 다음과 같이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20여 년 전인 1988년 2월에 저의 초청으로 한국 내장산에 와서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과 함께 케직 사경회 강사로 말씀을 전한 일도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2차 대전 때에 독일의 베르린에 사는 나치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뉴욕에 사는 한 유대인에게 임했다고 상상해 본다면 요나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샌프랜시스코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비웃기 전에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요나의 후손들이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일은 없으므로 다시스로 도망가야 할 일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챤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요나가 받은 것 이상으로 요긴한 것이다. 때로 우리가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가 요나가 도망치려 했던 것 못지 않게 의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저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대에 평양에 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상도에 사는 어느 한 보수주의 목사에게 임했다고 상상해 본다면 요나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비웃기 전에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요나의 후손들이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일은 없으므로 다시스로 도망가야 할 일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챤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요나가 받은 것 이상으로 요긴한 것이다. 때로 우리가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가 요나가 도망치려 했던 것 못지 않게 의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시면서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을 하신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주님의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에 침묵만 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라면 박 넝쿨 하나도 아끼며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와 색깔이 다른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느낌도 동정도 사랑도 품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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