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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 136:1-26, 엡 5: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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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2006년 추수감사절은 우리 서부교회에는 아주 각별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새 성전에 입당하고 첫 번째로 맞는 교회 절기가 감사절인 것이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온 국민들과 함께 봉헌 예배를 드린 후 하나님께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다 태우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솔로몬과 온 백성들은 돌을 깐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온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께 감사의 말씀을 외치기를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지난 첫 주일 입당하면서 같은 감격을 체험했으며 같은 예배와 영광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감사절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새 성전을 허락하시고, 입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섭리와 사랑에 대한 우리 신앙의 진솔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서부교회를 지난 한 해 동안도 풍성한 가운데 인도해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우리는 새 성전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오늘과 같이 넘치게 성취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동안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웠을 때 오히려 더 가까이 계셨고, 더 크신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처럼 내가(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내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임하시고, 내가 약할 때에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나의 약한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더욱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풍성한 감사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우리의 감사는 어떠해야 합니까?

(1)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코리 텐 붐여사는 나치 시절에 유대인들을 도피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처음에 라베스브루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는 그야말로 수 백 명이 함께 갇혀있는 곳이기 때문에 불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땀 냄새 찌든 냄새로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거기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벼룩이 엄청나게 득실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은 함께 수감된 자매 베스티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랬더니 베스티는 “성경에 주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그냥 무조건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코리는 억지로라도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자기들 수중에 성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역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코리와 베스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온 몸에 득실거리는 이 벼룩을 인하여서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티는 “우리 벼룩을 인해서도 감사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코리는 “도대체 벼룩을 인하여 감사할 일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베스티는 “알 수 없어도 무조건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못살게 구는 벼룩을 인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코리와 베스티가 그 감옥 안에서 수감자들에게 전도할 때 아무도 거기 와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 감방에는 워낙 벼룩이 많으니까 간수들이 접근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 그래서 벼룩을 주셨구나!” 그들은 너무도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와 섭리를 깨닫고 정말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감옥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른 어떤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감사를 통해서 굳게굳게 닫혔던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바다 위를 떠밀려 다니면서도 감사했더니 하나님은 그를 로마로 보내셔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에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감사야말로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이 오늘 감사절을 맞이하여 억지로 감사할 조건을 찾을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일마다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그 감사를 통하여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도 역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아침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지난밤에 잠 잘 자게 해주셨으며 새날을 축복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루의 생활을 지켜주셨으며 이 하루도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도 감사해야할 것은 부모님을 위시하여 온통 주변에 자신을 보호해 주는 손길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을 인하여 감사할 것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며 노인이 되어서도 역시 감사할 것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걸음마다 자국마다 주님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지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같이 주일을 주셔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해 주신 것을 인하여서도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좋은 일, 순경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역경에도 역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크로스비 여사는 어릴 때 의사의 오진으로 실명하여 평생을 볼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95세까지 살았는데 그 생애를 통하여 6천 여 수의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노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내 눈을 오진한 그 의사를 만난다면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보지 못하고 살면서 지은 그의 찬송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 세상에 있는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성경에 요셉은 거듭된 실패에도, 나중에는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영국 에딘버러에 와이트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목사님의 별명은 “감사 목사”였습니다. 그만큼 감사가 생활에 베인 목사님이기 때문입니다. 입만 벌리면 감사요 어떤 형편에 처해도 오직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주일날 일기가 지독하게도 불순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드리러 오기조차 어려운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아무리 ‘감사 목사’라고 해도 설마 이처럼 지독하게 불순한 주일날에도 목사님이 감사를 드리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의 감사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매일 매일이 오늘 같지 않은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만하면 정말 못 말리는 감사 목사님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감사 생활입니다.

(3) 어디에서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늘 좋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행복과 안정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부모님을 주셨고, 남편과 아내를 주셨고, 형제를 수셨고,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는 “세상에 내 가정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노래하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 가정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같이 취업이 어려운 세상에서 내가 지금 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물론 직장 상사나, 동료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우가 불만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일터를 주시고 거기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했어도 역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생명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혹 도둑을 당해서 물질에 손해를 입었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신앙만은 도둑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죽음 앞에 직면해서도 정신이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무디가 섬기던 예배당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습니다. 그 엄청난 현실 앞에서도 무디는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배당을 새로 지으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일을 앞당겨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후 온 성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합심협력하여 더 크고 더 좋은 예배당을 지어 큰 사역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들과 비교한다면 오늘 우리야말로 감사가 정말 하늘에 사무쳐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성전 건축하느라고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앞으로도 성전 건축의 뒷마무리를 하려면 상당기간동안 긴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다소 어려움을 겪기는 했으나 그것은 우리 신앙에 말로 할 수 없는 plus요인이 되었습니다. 정말 합력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윗이 그렇게 소원했어도 끝내 하지 못한 이 성전 건축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전 건축하는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감사를 포기한 것이요 축복을 걷어찬 것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에 참여한 여러분에게 반드시 놀라운 복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거듭거듭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어느 동네에 부유한 노인 한 분이 매일 빵을 만들어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빵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큰 것도 있었고 더 작은 것도 있었습니다. 빵을 내어놓으면 아이들은 더 큰 것을 가지려고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 그레첸은 늘 다른 아이들이 다 가지고 간 다음 가장 작은 빵을 집으면서 할아버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는 가져가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아이들이 빵을 다가져가고 나니 그레첸 몫은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거나 말거나 자기 몫을 챙겼다고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본 할아버지가 다른 빵 하나를 그레첸에게 주었습니다. 그 빵을 받아가지고 집에 가서 나누어 먹으려고 쪼겠더니 뜻밖에도 그 빵에서 금화 6개가 나왔습니다. 그레첸은 그것을 돌려드리기 위하여 할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그 빵은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내가 만든 것이니 그 금화도 네 것이란다. 그러니 가져가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서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스펄전의 말처럼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천국의 영광을 주십니다”. 감사생활을 통하여 이런 축복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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