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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던 불행한 선지자의 이야기 (호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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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설교를 하기 전에 편지 두 장을 읽어 드립니다. 한 장은 미국 동부로 간 정진선 집사님이 바로 어제 보낸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서부로 간 김홍영 집사님이 일주일 전에 보낸 편지입니다. 모두 강변교회를 그리워하여 인터넷을 통해서 강변교회의 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편지를 읽는 것도 저들이 보고 들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보고 싶어하고 문안과 인사와 마음과 생각과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먼저 정진선 집사님의 편지를 읽어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고 있는 아름다운 가을 뒤편에 쓸쓸하게 굴러가는 낙엽들을 보며 마음이 갈급하던 차에 강변의 홈페이지에 들렀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의 소식과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보며 따뜻한 고향의 내음을 맡습니다. 목사님, 인터넷을 통하여 목사님의 주옥 같은 설교를 들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멀리서 듣는 목사님의 설교는 때에 따라 영양을 공급받는 영혼의 고 영양식입니다. 오늘도 '욥의 인내와 결말', '하박국의 찌라도' 말씀을 통하여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게 들려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함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새벽 기도를 쉬고 있었는데 가서 졸더라도 참석하여 잠시 드리는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에 새 힘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마음을 정하여 성루에 올라 기도하는 영을 회복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강변교회 바자회이네요. 저희 교회도 이번 주부터 두 주에 걸쳐 바자회를 합니다. 저는 만두도 빚고, 김치 담그기에 참여하였는데 박영희 집사님을 비롯하여 열심히 김치를 담그던 구역 식구들이 생각났습니다. 모두들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의 따뜻하고 정다운 웃음이 떠오릅니다. 목사님, 늘 건강하시고 성령 충만하셔서 양떼를 위하여,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지금처럼 참 목자가 늘 되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롱아일랜드에서 정진선 올림”

  그 다음 김홍영 집사님이 일주일 전에 보낸 편지를 읽어드립니다.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성도님!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드신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시고 감사하며, 안녕하시죠? 강변교회 천장으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따뜻하고, 청순하고, 강렬하고... 목사님! 이 햇살 보다 더 기쁜 것은 얼마 전 새벽 기도에 140 여명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했을 때였지요. 새벽마다 120명,120명 노래를 부르셨잖아요...애가 타도록 기도하셨잖아요. 기도 응답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성가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박치원 장로님으로부터 요령이라도 좀 배웠을 걸...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성도님들 많이 보고 싶습니다. 어제 저녁에 김원중 집사님과 장태자 권사님을 만나 뵙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맛있는 저녁도 사주시고, 이모 저모 소식도 듣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에는 긴 만남이였습니다. 목사님, 박집사가 여기서도 강변 바자회를 생각하며 누가 떡복기 하나, 누가 꽃을 파나... 참 재미있었던 기억을 되새깁니다. 저희는 마음에 안정을 갖고 여기서 전도의 통로를 찿는데 서울과는 사뭇 다름니다. 목사님 기도 많이 해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김홍영 박정희 드림”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한 두 분의 편지를 읽어드렸습니다. 성도들이 문안과 인사와 마음과 생각과 사랑을 주고 받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과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이 그렇게 문안과 인사와 마음과 생각과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설교를 시작합니다. 지난 주일 불행한 한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대로, “요나는 너무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나 긍휼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니느웨를 향한, 그리고 자기를 향한, 불만과 증오와 분노만이 그의 생각과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 섞인 책망의 말씀에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킨 반항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너무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야기 하려고 하는 호세아도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불행은 요나의 불행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불행이었습니다.

  첫째, 호세아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불행을 받아드린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1:2). 이 명령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 드릴 수도 없는 엄청난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명령은 문자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상징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대로 받아드렸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사람과 결혼해서 한 평생을 사는 것인데, 호세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 추한 여자와 결혼해서 한 평생을 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죽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불행을 느끼면서도 음란한 여자 고멜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고멜을 통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고멜이 낳은 세 자녀들은 모두 저주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스르엘은 벌 받을 자식이란 뜻이었고 로루하마는 긍휼을 받지 못하는 자식이란 뜻이었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닌 자식이란 뜻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음란한 아내 고멜은 자식을 세 명이나 낳고서도 이 남자 저 남자에게로 가서 음행을 계속하다가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또 임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 드릴 수도 없는 엄청난 명령이 또 임했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3:1). 아마 호세아는 죽고 싶은 처절한 불행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번에도 음부가 된 고멜을 돈을 주고 사다가 다시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호3:3). 호세아는 참으로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때로는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고 때로는 윤리와 도덕에 역행합니다.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보고 아들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역행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음부가 된 고멜을 돌로 쳐서 죽이는 대신 그를 다시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사랑하라는 명령도 간음하지 말고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역행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호세아는 음부가 된 고멜을 다시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할 때 우리의 작고 좁은 머리로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합니다. 마치 요나처럼 하나님께서 잘못하신다고 타이르며 대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는 모순되는 명령을 내리셨는지 그 명령 배후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깊은 고통과 슬픔과 비극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비난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멜과 같은 음부를 취하여 아내를 삼으라고 하신 명령은 잘못된 것이라고 항의하면서도, 돈과 쾌락과 건강과 부귀와 안일과 성공을 하나님보다 예배보다 주일 성수보다 기도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영적인 음부가 된 우리들을 아내로 그리고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모순되는 처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항의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뻔뻔하고 무례하고 모순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부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명하시면서, 왜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하나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호1:2을 읽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하나님 떠남과 행음이 그 배경이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음부 고멜과 동등하게 취급하셨습니다. 고멜이 음부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음부였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멜이 창기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창기였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예배를 떠나고 주일 성수를 떠나 돈이나 직업이나 자녀 손들이나 다른 것들에 붙잡혀 사는 우리 자신들이 음부요 창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행음함이니라.” 우리는 이와 같이 진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도 무감각해지고 마비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느끼고 생각하고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깊이 고민하시고 깊이 슬퍼하시고 깊이 고통스러워하시다 할 수 없이 ‘충격 요법’을 사용하신 것이었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만든 율법과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선지자 고멜로 하여금 음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라고 분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제라도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는 음란한 고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음부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는 선지자 호세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슬픔을 표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4). 이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는 2800여 년 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극도로 세속화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쾌락과 자기의 몸과 자기의 자녀 손들과 자기의 직업과 관광과 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하나님 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라고도 생각합니다. 음부 고멜을 아내로 취한 선지자 호세아는 불행한 선지자였고, 음부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으라고 분부하신 하나님은 참으로 불행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둘째, 호세아는 음부가 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불행한 선지자 호세아의 호소는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만들어진 한 편의 유창한 설교나 멋진 강의가 아니었습니다. 처절한 불행 가운데서 만들어진 슬픔의 호소였고 고통의 호소였습니다. 호세아의 호소는 자신의 슬픔과 불행에서 만들어진 개인적인 슬픔의 호소였고 하나님의 슬픔과 불행에서 만들어진 신적인 슬픔의 호소였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3장에서 음부가 된 고멜을 다시 집으로 데려온 불행의 이야기를 기록한 다음, 4장과 5장과 6장에서 이렇게 슬프고 안타깝게 부르짖으며 호소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호4”1,2).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호5: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이와 같은 선지자 호세아의 처절한 호소는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인 14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호14:1-3). 이와 같은 처절한 호소는 선지자 호세아의 호소였지만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호소였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자가 받게 될 은혜와 축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6장의 말씀을 읽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1-3).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병을 치료해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셔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4장의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 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 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14:4-7).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역을 제하시고 진노를 거두시고 이슬과 같은 축복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복을 끼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
  우리가 사는 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위기와 재난이 물러가는 길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범죄한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이 국가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위기와 재난에 처했을 하나님께로 얼굴을 향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온갖 불행에 빠졌을 때 불행의 처지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20). 그래서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신자들이 자기 몸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면서 불행한 길로 달려가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분부했습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이제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31:6).”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패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렘3: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호14:1).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욜2:12,13).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1:23).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3: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 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우리가 사는 길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위기와 재난이 물러가는 길도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도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모두 부흥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는 ‘부흥’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한국 교회는 1907년 이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사경회와 부흥회를 열어 불신자들과 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했고 하나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거듭해서 체험하여야 하고 하나님 만남을 거듭해서 체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부흥’을 거듭해서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분부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1:23).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3:7). 우리는 11월 한 달 동한 한국 교회의 귀한 어른들을 모시고 사경회와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아직 하나님 만남의 체험이 없는 새 신자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를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예배와 기도로부터 멀어진, 은혜가 식어진, 구 신자들이 있다면 이 번 기회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축복의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산이나 들이나 길거리에서 헤매는 길 잃은 양들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돌아오라”는 말씀과 함께 “데려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고 죄인들을 잔치에 초대하시는데, 우리들이 나가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밭을 사거나 소를 사거나 결혼을 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하며 초대를 거절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1,23).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음부와 창기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서도 음부와 창기가 된 우리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그 길만이 우리들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에게 임한 모든 위기와 재난이 물러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은혜와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리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데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갈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데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새로 살아나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위기와 재난이 물러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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