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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하신 그 이름 예수 (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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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신 그 이름 예수 (마1:21)

(요약) 

왜 예수의 이름이 존귀할까요?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죄인을 구원하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 예수 이름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잘 섬기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 또 예수 이름은 치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이름을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늘 선용해야 할 것이다.



(설교)

이 시간에 “존귀하신 그 이름 예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변화 중에 하나는 자기 이름을 바꾸려는 개명신청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몇 년 전만해도 월 4,000건 됐는데 요즘에는 8,000건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살다보니 이름이 합당치 않아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개명하려고 합니다.

한 남성의 이름은 이름이 치국입니다. 다스릴 치(治)에 나라 국(國),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이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인데 성이 문제였습니다. 성이 김 씨거든요. 이름을 부르다보니 김칫국이 되어 늘 놀림을 받아오다가 개명을 신청을 하게 했답니다. 혹은 여자분 가운데 흔한 이름으로 숙자가 있습니다. 결코 나쁜 이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 역시 성이 문제였습니다. 노씨였는데 그래서 ‘노숙자’입니다. 그래서 노숙자는 되기 싫어 개명을 하게 됐답니다. 그 외에도 참 이상한 이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왜 예수 이름이 가장 존귀한 이름일까요?

1. 예수 이름은 죄인을 구원하신 유일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마1:21절에 천사가 요셉에게 전해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자란 살려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영원히 구원해 주시는 이름입니다. 행4:12에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고,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는데 다 똑 같은 길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질문합니다. 꼭 교회 나와야 하고 꼭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는 안 됩니까? 공자나 맹자는 안 됩니까? 그러나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이시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뚫어보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던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족할 뿐 아니라 죄인으로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된 지금이지만 인간의 수명을 조금 연장시킬 뿐이지 않습니까?

양산 통도사에서 불도를 닦다가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분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의 나마다경 38장 8절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석가모니 가라사대 荷蒔爺蘇來 吾道油無之燈也(하시야소래 오도유무지등야) 풀이해 보면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나의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처도 노년에 인간의 무능을 알았고 오직 예수라는 구원자가 와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은 숨겨 버리고 그가 외친 허무만을 강조하고 허무를 크게 말한 사람은 무슨 큰 득도를 한 것처럼 치켜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불교인들이 진정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노환으로 죽음이 임박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해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떨렸습니다. 내가 천당 못가고 지옥 가면 어떡하나, 목사가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 성도는 구원이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은 3장 16절을 일부러 이렇게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까 말까 얻을까 말까 얻을까 말까 하노라” 그랬더니 이분이 돌아가시려다가 깜짝 놀라서 “아니 목사님, 무슨 성경을 그렇게 읽어요?” 하고 다시 깨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오늘 성도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세요.” 전도했다고 합니다.

2. 예수 이름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 있기 때문입니다.

골2:3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학2:7에 “만국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이러쿵저러쿵 살아갈 궁리하느라 고심들 하는데 예수님이 보배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 이름 잘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래도저래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예수 잘 믿어야만 됩니다. 예수 잘못 믿어도 모든 삶이 형통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예수 이름 안에 온갖 보화가 가득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 영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10:28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 성경은 예수 안에서 평안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성경은 예수 안에 천국이 있다 말씀합니다. 마12:28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 안에 자유가 있어요. 예수 안에 승리가 있어요. 예수 안에 형통이 있어요. 능력이 있어요. 권세가 있어요. 기적이 있어요. 은사가 있어요.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갔던 청년이 외국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한양에서 돌아오던 날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온 부모님들과 식구들이 과거시험은 잘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부모님 세상의 과거시험도 중요하지만 천상과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가 알고 왔습니다.” “천상과거라니 그게 무슨 시험이냐” 얼마 후 그것이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집안은 온통 발칵 뒤집혔습니다. 과거시험을 보라고 한양에 보냈더니 아들이 예수 믿고 돌아왔으니 당시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동네 소문은 흉흉해졌고 청년은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갑자기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안이 또 다시 뒤집혔습니다. 그 때부터 온갖 방법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어 3년 동안 벙어리로 지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아들에게 “네 입만 떼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 주마 입만 열거라” 그 소리에 청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그는 벙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벙어리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반가움과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네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이냐? 어디 네가 믿는 예수 나도 믿어보자” 마침내 온 가족이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웃음전도사로 알려진 황수관 박사의 간증에 나오는 황 교수의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황 교수는 천상 과거시험에 합격한 할아버지 덕에 3대째 집안이 예수 믿고 복을 누리며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대대로 만복의 근원입니다.

3. 예수 이름은 질고와 저주를 물리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에게 구걸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일어나 걸으라.” 말합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서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자 위기를 느낀 이스라엘 공회는 베드로를 심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어떤 임금이 어린 아들을 여행을 보내면서 돈을 두둑이 줘서 보내기는 했지만 행여나 부족하면 쓰라고 옷 속에 비싼 구슬 하나를 살며시 넣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여행하다보니 돈이 다 떨어져서 구걸하다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쫄쫄 굶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 놈아! 여기 옷 속에 비싼 구슬이 있는 것을 몰랐느냐?” “아이쿠 그랬나요?” 하더랍니다. 알지 못해서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다가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이름의 능력을 모르면 불신자처럼 허겁지겁하고 낙심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막16:17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약하여 근심하지 말고 예수 이름으로 악의 세력과 환경을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불안과 불화를 물리치고, 병을 물리치고, 가난을 물리치고, 저주를 물리치세요. 나에게는 왜 이런 일이 계속 되는가? 울지 마시고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 같은 우리의 삶에 평안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에 서서 담대한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에 서서 다짐하세요. 내 생애에 가난하게는 살지 않으리라. 내 생애에 질병 가운데 살지 않으리라. 내 생애에 복만 받고 살고 말리라. 그리고 결코 용납치 마세요. 왜냐하면 예수 이름은 저주를 물리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4. 그 이름은 응답을 받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요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으로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7:7)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오래 전에 뇌의 한쪽이 아파서 날마다 기도했답니다. 양방 한방 민간 여러 처방을 해보았으나 치료 되지 않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에서 난데없이 엄지 손가락만한 벌이 날아오더니 이 분의 아픈 쪽 머리를 쏘고는 달아나버렸습니다. 얼마나 되게 맞았던지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겨우 정신 차려 집으로 내려와 사흘을 고생하다가 더 견딜 수 없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아시요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벌에게 혼나고 부터 신기한 것은 그 고통스런 두통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봉침으로 효과 보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 대장 벌은 울며 부르짖고 기도한 자에게 보낸 봉침으로 봉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천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귀히 여겨야 할 이름은 예수 이름입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도 희망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요 소망이요 보배요 능력입니다. 이 예수님 잘 믿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람과 복 받으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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