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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대의 열매를 맺자 (롬 4: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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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독일에서 치러진 월드컵은, 온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축구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계시지만, 2002년의 한일 월드컵을 힘입어, 폭발적인 관심과 함께, 온 국민이 하나 되었었습니다.
독일 월드컵 때, 우리국민의 77.9%가, 월드컵으로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대감 때문입니다.
승리의 기대, 나아가 16강, 8강, 4강에 대한 기대,
비록 16강은 오르지 못했지만, 높은 기대감은, 온 국민을 하나 되게 했고,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기대는, 우리의 삶에, 힘과 활력소가 됩니다.
우리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을 땀 흘릴 수 있고, 그 땀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결실의 기대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이 어려움을 이기면, 좋은 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기대가 있는 사람은 일어섭니다.
기대는, 우리의 삶의 활력소요, 힘입니다.

1. ‘기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옛날부터 자신의 앞일을 알고자 애써왔습니다.
그래서 신탁, 주술, 점쟁이들을 통해, 자신의 앞일을 예측해 보고자 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고 있습니다.
점을 보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간조선 4월호에, ‘한국사회의 심층심리’ - 번영하는 점술공화국 편에서 이 부분에 대한 자료와 통계를 조사 보도 한바가 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역술, 무속인이 약 20만 여명으로 추산을 합니다.
시장규모 최소 1조 5천억에서 4조원으로 추정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차이의 간격이 큽니다.
그만큼 알게 모르게 성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예언’이라는 이름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약하고 여기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예언기도니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우리 자신의 미래를 알고 내 앞길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는 이 큰 선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앞날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해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삼상 28장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의 침입으로 두려워 변장을 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혼백을 부르는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여인은 [사무엘]이라고 하는 영을 불러올리고,(정확히 [사무엘]이라고 할 수 없다. 죽은 [사무엘]이, 신접한 여인의 주술로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무엘]을 가장한 악령으로 보아야 한다) [사울]은, 그와 대면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왜 나를 불러내어 귀찮게 하느냐?”
사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무 답답합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나를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셔서 예언자들로도, 꿈으로도 더 이상 내게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당신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기를 “왜 내게 묻느냐? 지금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지 않으셨느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네 나라를 [다윗]에게 주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은 땅바닥에 완전히 엎드러졌고, [사울]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앞날을 알게 될 때 얻는 부작용, 해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오히려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미 내 앞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화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래에 대해서 알려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롭게 판단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성숙할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하면서 성숙하게 됩니다.
타인에게 물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로운 의지와 생각을 통해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지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 인격적인 성숙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래도 자신에게 기대를 허락하기보다 미래를 알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대신 우리에게 ‘기대’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기대’란 약속이요, 그 약속 안에서 가지는 ‘희망’입니다
내일, 영원,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아페크 테코마이(apek dekomai)'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페크 테코마이(apek dekomai)' = ‘발돋움을 하고, 목을 길게 뽑아, 하늘을 쳐다보며 팔을 벌려, 약속하신 것을 받고 싶어 하는 태도’

이 말의 의미는, ‘발돋움을 하고, 목을 길게 뽑아, 하늘을 쳐다보며 팔을 벌려, 약속하신 것을 받고 싶어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이것은, 기다림이요 희망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 ‘기대’는 믿음으로 얻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기대는 막연합니다.
약속이나 확신이 없이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고 생각해서 거는 기대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거나 어떻게 되겠지 라는 마음에서 기대를 걸곤 합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습니다.
‘우리 주인은 굳은 분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시고, 씨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시는 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될거야.’ 라는 것과 같이 아무 노력도 없이 막연히 기대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욕심에 의한 기대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욕심에 의해 기대를 가지기도 합니다.
자기 욕심으로 인해 이런 저런 기대를 가져 봅니다.
사람들은 기대를 희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대는 사람들의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으로 오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말합니다.
“기대는 종종 어긋난다. 그리고 기대를 가장 많이 거는 곳에서 가장 자주 어긋난다.”

우리가 지난 월드컵에서 건 기대가 얼마나 어긋나고 말았습니까?
‘어게인 2002’, ‘4강 신화재연’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건 기대는 사실은 막연한 기대였습니다.
어떠한 약속을 받아놓고 갖는 기대가 아니라 막연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기대입니다.
세상의 기대는 이러합니다.
가장 많이 기대하는 곳에서 가장 자주 우리에게 실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믿음 안에서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서의 [아브라함]은 이러한 기대로 산 사람입니다.
그는 잘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에서 사라와 함께 떠나오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에 대한 기대로만 왔었습니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이것은 막연한 것, 요행이나 행운의 기대, 욕심에 의헌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의한 것이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하고 있습니다.(롬 4:18)

신앙인의 기대는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약속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는 것에 대한 기대, 그 안에서 가지는 크고 작은 기대들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되어졌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크고 작은 모든 기대를 가지며 믿음의 걸음을 걸어 나갔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기대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1. 믿음의 기대는 의롭다함을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15:6절에서 말씀합니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그분 그 자체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의 기대의 행동은 ‘의’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4:20-22)
그러면서 이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믿음 안에서 또 한 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말씀, 그분의 행적, 곧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으로 인해 얻게 될 구원과 영생의 삶을 믿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약속과 기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나의 갈대아 우리를 떠나 약속의 나라를 향하여 믿음의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그 걸음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의 소망이 분명하며, 그 삶을 이룰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2. 믿음의 기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고,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 모든 곳에서, 믿음과 함께 기대하며 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기대하며 기도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기대하는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이적과 기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없었습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배척했고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무시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곳에서는 어떠한 역사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리고의 무너짐은 묵묵히 말씀에 순종하며 기대하며 나아갔던 저들의 발걸음이 완성되었을 때 무너졌습니다.
하루 한바퀴,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침묵으로 돌고 마지막에 나팔을 불며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믿으며 돌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3. 기대가 잊혀지지 않도록, 내일을 바라보고 인내로 가십시다.

우리는 공간, 시간, 지식, 능력에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 인격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기대의 시간이 더디거나 오래 됨으로 인해 때로는 잊거나 약해지고 희미해집니다.
마치 방금 색칠한 것은 밝고 선명하지만 오래 햇빛을 발하면 바라고 희미해지듯이 우리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었습니다.
75세에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나타나지 않자 자기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85세가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사라]의 제안으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이 기대의 상실로 인해 우리 임의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깔뱅(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약속에 이르도록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임의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99세 때 그 약속을 확인시켜주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우리 마음속에서 기대가 소멸되어 갈 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열정, 확신, 자신감, 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대로 하고 싶고, 인간적으로 하고 싶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대는 날마다 우리의 삶의 힘이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 이 믿음이 살아나고 그렇게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놓치게 되면, 함께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매일 경건의 생활을 통해서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담긴 말씀을 늘 접하면서 기대와 소망을 날마다 점검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2). 내 안에 기대를 이루는 성숙함이 있어야합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집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약속을 받을 만큼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받을 그릇이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이룬 것은, 약속 받은 후 25년이 지나서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를 성숙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십니다.
이 성숙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이제는 그 귀한 아들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의심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대 속에 두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 믿음의 기대 속에, 우리는 자라갑니다.
그 자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준비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도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약속하고 태신자를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열린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을 초청하려고도 했고 구역초청잔치를 통해서 힘써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특별히 내 집의 가족을 전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기대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깊이 간직하고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 안에서 갖는 기대는, 결코 헛될 수 없습니다.

***** 독일에 [말틴 미네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히틀러 치하에서 [본 회퍼]라는 분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혹독한 고문 끝에 [본 회퍼]는 죽고 [미네르] 목사님은 생존해서 출옥을 했습니다.
출옥을 한 [미네르] 목사님은,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열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너는 네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을 변명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도 거기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자기에게 그 말을 하지 않으셨고, 자기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물음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만 있었지, 나에게 예수를 전해 주는 사람은 없어서, 믿지 않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 주간 동안을 계속해서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미네르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인이 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목사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정치인이 되려던 계획을 버리고,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신자를 마음속에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했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기대했던 그 태신자를 내가 포기하면 그 태신자는 결국 지옥으로 가고 말 것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든지, 내 아내든, 내 형제든, 친구든지, 내가 지금 포기하면 그 분들은 결국 지옥으로 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우리 속에 태신자를 간직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기대, 곧 내가 받은 그 기대를 우리는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해도 좋다.’ ‘그렇게 해라’....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증거를 통해, 우리는 더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게 됩니다.
성도의 기대는, 보장되지 않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약속이 있고 보장되어 있는 믿음의 기대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기대하며 나아가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복의 근원자가 된 [아브라함]처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는,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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