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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침묵 훈련 (시 39:8~11, 눅 2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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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나이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국이 너무 뜨거워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말을 할 수 있다는데 안심하였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왜 이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정상이어서 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라고 했답니다. 어릴 때의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부터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묵한 것은 그 만큼 생각이 깊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않을 말을 하지 않고, 말을 절제할 때에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지 않을 말을 하고, 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무가치한 일입니다.
  말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도구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사람됨의 창조적 힘입니다. 나와 너의 화해하는 접속선입니다. 만남의 매개입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규정지우는 것입니다. 말은 동시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말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수많은 격언과 명언과 속담들이 말을 조심하고 입을 단속하라고 합니다. 말은 인격이며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야고보서 3:2에는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합니다. 말에 실수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을 절제하고, 침묵하는 것이 말에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입니다. 사람이 말을 가려서 할 수 있으면 현명한 사람입니다. 입을 조심하는 것만 가지고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입은 마음의 하수구이고 말은 배설물입니다. 말을 한번 뱉으면 내 모든 것이 탄로 나게 마련입니다.

  혀는 온도계입니다. 혀는 우리의 인격적 온도, 영적 온도를 말해 줍니다. 혀는 또한 온도 조절장치이기도 합니다. 혀는 우리의 인격적, 영적 온도를 조절합니다. 혀는 작은 것이지만 생각을 좌우하고 인격을 대변합니다.
  해서는 안 될 좋은 말이 여럿이 있다고 합니다. 대머리에게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매일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장수하기를 바랍니다”는 말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도둑에게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말에 감동 받았습니다”란 말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본 회퍼는 진정한 고요함 즉 우리의 혀를 멈추는 일은 오직 영적 고요함의 결과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적 고요함을 배워 혀를 멈추고 진정한 고요함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배워야 할 침묵을 생각하며 침묵의 훈련을 잘 받아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의 침묵해야 하는 까닭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39:9에는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구약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침묵을 말씀합니다. 이사야 42:2에는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시편 53:7에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라고 오실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치려고 하는 무리를 만났습니다. 이 무리들은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와서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였습니다. 무리들의 정죄의 대상은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흥분한 군중을 가라앉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합니다. 이 때 쓴 글이 무엇일까라고 하는데 그 글이 무엇인지는 모르기도 하고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침묵으로 군중의 흥분을 상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침묵이 필요합니다.

  불이 타다가도 땔감이 없으면 불은 꺼집니다. 침묵은 갈등을 잠재우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젊은 여성의 발을 밟아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젊은 여성은 아버지 같은 남자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남자는 욕을 하면서 “너 같은 딸이 있다”고 합디다. 아마 발을 밟고 충분한 사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과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항의한 것 같습니다. 왜 딸 같은 여성에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욕을 먹습니까? 왜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듣지 못할 욕을 듣습니까? 한사람이라도 입을 다물면 불은 금방 꺼질 것입니다.

  누가복음 23:9에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헤롯이 값싼 호기심으로 기적을 볼까 하여 물을 때에 아무 대답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매달려 계실 때에 조롱하는 사람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해 보이거나 대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침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의 종으로서 침묵입니다. 중상모략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이었습니다.

  독일 격언에는 “중상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무답이다”라고 합니다. 영국 격언에는 “잠자코 있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다”하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즉 침묵은 가장 좋은 대답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말을 하다가 “할 말은 아니지만”이라고 하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할 말은 아닌데 왜 합니까? 할 말이 아니면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내가 이 말은 안하려고 하다가 하는데”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안 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안해야지 왜 합니까? 이런 경우는 대부분 말하고 나서 후회합니다. 침묵하는 경우보다 좋을 수가 거의 없습니다.

  리처드 포스트는 침묵은 하나님께 삶의 고삐를 맡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입니다. 침묵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가장 귀중한 영적 훈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침묵은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해주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독백은 95%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독백은 가장 유명한 독백입니다. 이 독백도 보면 부정적인 독백입니다. 반면에 침묵은 95%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침묵을 배웁시다. 그리하여 늘 선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하게 합니다.

  말에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목소리의 톤입니다. 말의 높낮이는 말에 영향을 줍니다. 둘째는 신체 언어입니다. 말을 하면서 제스처를 하는 것은 말을 강조하는 영향을 끼칩니다. 셋째는 스킨십입니다. 말을 하면서 악수를 한다거나 어깨를 감싸는 것은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침묵입니다. 위의 세 가지는 말하는 기술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은 가장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또 한 가지의 훈련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침묵의 훈련입니다. 말하는 훈련보다 더 중요한 훈련이 침묵 훈련입니다. 침묵 훈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비로소 성숙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격언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잘거림은 나면서부터 배우지만 침묵은 좀처럼 배우기 힘든다”. 이 힘든 침묵을 훈련하여 성숙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2:12에는 혼인잔치의 비유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런데 성경에는 그 다음에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에는 ‘유구무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입은 있지만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침묵은 할 말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침묵은 할 말이 없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마음 깊이 담아 두는 것입니다.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꼭 할 말은 하는 것이 침묵의 참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묵비권’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굴복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마음에 날을 세우는 것입니다.

  누가복은 7장에는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옥합을 깨트리고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아름다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죄 많은 여인은 이 대목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무 대사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행동만 있었지 한 마디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은 “감사합니다”란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침묵의 사죄입니다. 무언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사실은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에도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을 통해 남자는 생각을 표현하고 정보를 교환합니다. 여자는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말합니다. 남자들은 회의 때 말을 많이 하고, 여자들은 회의 끝나면 그 때부터 말을 합니다. 남자나 여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침묵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아는 것보다 하지 않을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전통적 학설에 의하면 여자는 하루에 6만 단어를 말하고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말 가운데 얼마나 말을 절제하고 살아갑니까? 얼마나 말하는 것보다 침묵할 줄 압니까?

  로마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는 “침묵할 줄 모르는 자는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격언에는 “싸움을 진압할 때 가장 좋은 약은 침묵이다”고 합니다. 말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한결같이 침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칩니다. 침묵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토크 쇼의 황제 래리 킹은 “당신이 아무리 뛰어나고 말을 잘 한다 해도 침묵을 지키는 게 더 좋은 순간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과묵하고 근엄한 분이었습니다. 자주 침묵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엄격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치과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이빨을 깎아서 치아를 하였다고 합니다. 말 이빨로 하였기 때문에 너무 입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입을 잘 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덕에 근엄하다고 하는 평을 들었습니다. 말 이빨의 덕을 본 것입니다.

  때로는 입은 다물고 있기만 해도 덕을 볼 때가 있습니다. 침묵만으로도 점수를 딸 수가 있습니다. 잠언 17:28에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고 합니다. 지혜의 둘레의 담은 침묵입니다. 혀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지나치게 바쁘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침묵해야 합니다.

  건설적인 침묵이란 첫째는 쓸데없는 잡담을 제거해주는 것입니다. 잡담이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기가 쉽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과 더 잘 조화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아주 빠르게 말을 합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조화롭게 합니다. 셋째는 침묵은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기만 해도 크게 도울 수 있습니다. 스코트랜드 속담에는 “현명함은 열 가지로 만들어진다. 그 중 아홉 가지는 침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침묵은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결론

  동물원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하였습니다. 호랑이들의 우두머리를 정하는 수컷끼리의 싸움입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모든 암컷 호랑이를 거느리며 좋은 먹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마리는 우렁차게 포효하며 덤벼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는 침묵하며 이에 맞섰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렁차게 포효하던 호랑이는 용맹스럽게 싸울 것 같더니 도중에 그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크게 소리 지르는 호랑이일수록 약한 놈이며 싸움에 진다고 합니다. 상대가 무섭기 때문에 괜히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진정 강한 호랑이는 오로지 침묵과 위엄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고 합니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을 보면서 호랑이가 웃을 것입니다. 침묵은 종래 승리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침묵으로 세상을 이기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말의 침묵, 욕망의 침묵, 생각의 침묵입니다. 첫째는 완전합니다. 둘째는 좀더 완전합니다. 셋째는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침묵하여 성숙함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의 훈련은 알맹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건설적인 침묵의 훈련으로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사회가 아름답게 변화하고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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