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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룸을 통해 회복되어야 할 것 (느 12: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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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 탄생하였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은 192개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한 유엔을 대표하고 전 세계 1만 6000여명의 직원과 9만 2,000여명의 평화유지군 등 유엔 행정을 총괄하는 세계 최고 행정관입니다. 반기문 장관은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외교관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교관이 되어 외교관으로서의 최고봉인 유엔 사무총장에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루고자하는 꿈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그것만큼 좋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것을 이루면 그에 따른 힘이 주어지고 명예가 주어지고 물질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룬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달라지고 역사적 평가가 달라집니다. 이룬 것을 잘 못 사용하면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고 이룬 것을 잘 사용하면 링컨 같은 사람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을 잘 사용하면 베드로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고 이룬 것을 잘 못 사용하면 유다 같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룬 것을 잘 못 사용하면 사울왕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고 이룬 것을 잘 사용하면 다윗왕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부나, 권력, 명예, 지식 등을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이룬 후 그 이룬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도 이룬 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이 되어 남북 문제를 잘 해결하고 대한 민국에 통일을 가져오게 하는데 초석을 마련한다면 그는 노벨 평화상도 타고 세계 역사에 오래 남아 있는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느헤미야도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장관처럼 당시 대단한 출세를 사람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인으로 당시 가장 강대국인 페르시아에서 왕의 신임을 받은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권력과 부, 명예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그 이룸을 통해 고국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서 갖가지 장애물을 극복하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당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라는 민족적 업적을 이루고 봉헌식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것들을 이루며 삽니다.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기도 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과장, 부장, 사장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도 짓고, 회사 사옥도 짓고, 교회도 짓고, 명예도 이루고 권력도 이루고, 부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이룸을 통하여 무엇을 합니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나의 이룸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우리는 이룸을 통해 잃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영광의 회복, 거룩성 회복)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것을 이루면 먼저 무엇을 합니까? 축하 행사를 합니다. 취임식을 하고 낙성식을 하고, 봉헌식을 하고 각종 축하행사를 합니다. 이 축하 행사에는 일가, 친척, 친지들을 방문하고 어떤 업적을 이룬 사람을 축하해 줍니다. 그 행사의 주인공은 그 업적을 이룬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축하 행사는 자신의 업적과 성과를 자랑하는 자리가 됩니다. 이룸만큼 그 사람의 명예가 드높아지고 드러나게 되며 축하를 받습니다.

느헤미야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누구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보편적인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고생했으니 봉헌식을 하면서 축하받고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느헤미야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성벽 재건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있습니다. 일가 친척, 신하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축하잔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을 하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합니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 사람을 뽑아 정착하게 한 후(11장), 먼저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1-26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무엇을 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파악한 후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 왔습니다. 이 이룸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전 봉헌식에 자신의 업적, 이룸을 축해해 주는 일가 친척, 친지가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참여하게 합니다. 왜 그들을 데리고 왔습니까? 성벽 봉헌식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레위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성벽재건과 신앙개혁을 주도했던 느헤미야가 봉헌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봉헌식을 주도하게 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회사 사옥을 짓고 술 파티하며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업적을 이룬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업적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누구에게 감사하고 누구에게 찬양하겠습니까? 느헤미야의 업적을 찬양하고 감사합니까? 이 성벽을 재건하여 마치도록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이룸에 대하여 축하하고 칭송하기 위해서가 압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영광을 받고자 그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이루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룸의 업적을 드러내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즐겁게 봉헌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레위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먼저 무엇을 합니까?

술판을 벌이며 사장님을 위하여 합니까? 부장님을 위하여, 과장님을 위하여 합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춥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룸으로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룸으로 인생이 망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룸으로 가정이 망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룸으로 인간성이 파괴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룸으로 잃었던 찬양을 회복하고 잃었던 감사를 회복하고 잃었던 거룩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도 이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룸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룸 때문에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가 교만한 인생이 되어 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조금 이루었다고 하나님도 몰라보고 교만해지면 안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가문과 지위가 교만(마13:55)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물이 (눅9:58), 존경이(요1:46), 풍체가(사53:2), 아름다움이, 신앙 경륜이, 평판이(눅7:34), 학식이(요7:15), 성공이(사53:3), 능력이(요5:30), 지식이(요8:28) 영적 능력이 교만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이룸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도구가 되고 나를 더욱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네로는 17살에 황제가 되어 5년 동안은 겸손했지만 결국 그 권력으로 교만해져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스승까지 죽였습니다. 그는 결국 31살에 그 교만한 몸뚱이를 땅에 묻었습니다. 겸손했던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도 조금 지식이 많아지고 명성이 높아지자 하나님도 돌아가셨다고 하다가 45살에 미쳐 누이와 근친 상간의 죄를 짖다가 죽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겸손한 분이었지만 소아시아, 페르시아를 다 점령하고 당시 세계를 다 통일하자 자신이 술의 신이 되어 33살의 젊은 나이로 술 먹으며 죽어갔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벌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고, 지식을 취득하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자랑하며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얻음으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우리는 이룸을 통해 예배를 더욱 잘 드려야 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자신과의 관계 회복(예배 회복, 기쁨 회복)
30절까지는 봉헌식 준비 단계입니다. 31절부터 실제 봉헌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봉헌식이 어떻게 시작되어 진행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참여자의 반반씩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한 떼는 에스라가 인도하였습니다(36). 한 떼는 느헤미야가 인도하였습니다(38). 한 떼는 에스라의 인도에 따라 남쪽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행진하였고 한 떼는 느헤미야의 인도를 따라 북쪽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행진하였습니다. 이들은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일제히 찬송과 감사의 소리를 외치게 하고 제금을 치며 나팔을 불며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게 한 것처럼(대하5:12,13) 느헤미야도 백성들이 성벽을 걸으면서 그렇게 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목소리와 악기를 총동원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떼가 수문과(37)과 망대(39) 사이에서 만나 성전 구역 내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찬양하며 성벽 위를 걷게하는 독특한 봉헌식을 거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벽이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공되었다는 사실(6:16)을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며 결국 유대 백성의 안전이 성벽의 튼튼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에 서서 봉헌식을 본격적으로 거행하는데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43절을 보십시오. 크게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다윗과(삼하6:17), 아라우나와(삼하24:25), 솔로몬과(왕상8:5), 스룹바벨(스6:17)이 드렸던 성대한 제사가 회복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 후 오랫동안 이렇게 성대한 제사를 드려보지 못했는데 성벽 봉헌식을 통해 성대한 제사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회복되었습니까?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심히 즐거워하였습니다. 부녀와 어린이이도 즐거워하였습니다. 온 가족의 즐거움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날 만큼은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슬픔과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였습니다. 누가 즐거워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함으로 즐거움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룸은 결국 하나님의 이루심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축하 행사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대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사옥을 짓고, 집을 완공하고, 법조인이되고, 정치인이 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을 이루어 성공한 때입니다. 그런데 회사 잔치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 잔치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렬은 성전을 향해 가고 성전에 가서 크게 제사를 드리며 그 제사 드림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룸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가야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이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룸의 축복을 받으면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배를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예배를 사모하고 잘 드리던 사람들이 이제 조금 무엇인가을 이루면 예배를 소홀히 하고 이룬 것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왕이 되어 일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자가 성전을 다 지어 놓고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께 나가 예배드리기 보다는 쾌락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다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인가 이루면 예배를 점점 더 등한시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은 잃어버리고 늘 염려와 마음의 부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큰 이룸을 할수록 더욱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을 온 식구가 누려야 합니다. 어떤 이룸일지라도 그 이룸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하여 이룸이 슬픔의 도구가 되고 이룸이 걱정거리가 되고 이룸이 분쟁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찾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인생이 회복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인생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면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요14:27 롬15:3). 무엇을 이룬 후에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쓸데 없는 곳을 찾아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루면 그것으로 기쁨을 누리기 위한 타락된 영역을 확대하지 마시고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더욱 가까이 하시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영국 'The Times'에 의하면 최소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흑인들은 14년이나 더 장수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웬만하면은 표를 얻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야 하겠지만 아니요.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에 나가서 23년 동안을 개근하여 아이들을 가르쳐 왔는데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 때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만은 다음 주일부터 다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했답니다.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그 이룸이 예배를 등한히 하게 하고 기쁨을 빼앗아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룬 권력, 명예, 지식, 물질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 것입니다.

3. 우리는 이룸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회복(나눔 회복, 직분 회복)
예루살렘 성벽의 봉헌식을 통해 큰 기쁨을 누리게 된 유대인들은 이제 무엇을 합니까?
봉헌식 예배를 성대하게 드리고 기쁨을 회복한 그 날에 그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44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곳간에 무엇을 채웠습니까?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 십일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전 제사 제도의 확립 없이는 여호와 신앙을 중심으로 한 언약 공동체가 유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전 제사 제도는 백성들의 온전한 십일조가 없이는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이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할 것을 다짐하고 시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유다 사람들이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벽 봉헌식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하여 기쁨이 회복되었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맡은 사역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47절을 보십시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었습니다. 구별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회복된 것입니까? 백성들은 십일조를 회복하였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직분을 온전히 회복하였습니다. 나눔과 직분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룬 것을 통하여 나누어야 합니다. 나 홀로 잘 먹고 잘 살자고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15: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고 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룸을 통해 더욱 직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해서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3)" 베드로 전서 5:1-4에서 그러므로 직분자는 부득이 함으로 하지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사역의 자세, ).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사역의 동기).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사역의 태도) 이렇게 직분을 수행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금 면류관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그 이룸을 통해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룸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회복해야 합니다. 이룸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고 더욱 타락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룸을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룸을 통해 일의 노예가 되어 예배로부터 멀어질 것이 아니라 예배를 더욱 사모하고 잘 드리는 자가 되고 이룸을 통해 더욱 근심과 걱정에 고통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룸을 통해 더욱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룬 것을 통해 나만 누리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이룸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룸을 통해 나에게 맡겨준 직분을 더 등한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룸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직분에 더욱 충성하는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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