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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동을 주는 사랑의 능력 (마 25:40,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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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임신하여 어머니가 되면 어떤 자세를 가집니까?
먼저 그는 마음으로부터 아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그녀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하게 됩니다. 술, 담배는 물론이요, 약도 함부로 먹지 않고 아기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은 멀리 합니다. 험한 말도 하지 않고 다투지도 않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며 아기가 태어날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만약 그녀가 아기를 원하지 않았고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녀는 임신사실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술, 담배를 절제하지 않을 것이고 몸을 마구 사용할 것이고, 오히려 아기 때문에 짜증을 부리고 남편과 다투고 심지어 낙태를 생각할 것입니다. 임신 중에 이런 산모의 심리상태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 건강상태는 고스란히 아기에게 전달되어 아기는 자신도 알지 못 하는 사이에 심한 불안 증세를 갖게 됩니다. 그 결과 아기는 태어나지 못 하거나 태어나더라도 정서장애나 육체적 장애를 갖고 태어납니다.

영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삶의 변화를 보여주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좋은 생각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다가가 그 사랑을 느끼게 하고 감동을 주면 건강한 영적 자녀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감 때문에 몇 사람 이름을 적어놓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은 충분한 사랑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 할 것이고 결국 건강한 주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혹 그들이 교회에 한 번 나온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은 여전히 새로 태어나지 못 한 채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전도 축제를 통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진실한 만남으로 감동을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태신자들에게 작은 감동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감동과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주님의 품안에 거하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빅토르라는 장래가 유망하던 촉망받던 한 젊고 잘 생긴 프랑스인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재로 인해 전신이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오랜 치료 끝에 간신히 생명을 건진 그는 요양을 위해 도시를 떠나 작은 시골 수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수도원의 그늘진 방에서 그는 날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괴물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점점 깊어져서 밥도 입에 넣지 못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밤을 꼬박 샌 후 동이 트긴 전에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그가 복도를 지나는데 어느 방에서 두런두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호기심에 방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그 방에 거처하는 한 수도사가 벽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은 채 뭔가를 중얼거리며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열심히도 기도하는구나.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그 때 그의 이름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빅토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에게 삶의 용기를 주시길 바랍니다..."
깜짝 놀란 그는 돌아서서 다시 방문 틈으로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한 수도사가 기도를 하고 있었고 그 수도사가 바라보고 있는 벽에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빅토르를 비롯한 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새벽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중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빅토르는 방문 앞을 떠나지 못 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삶의 열정이 새로이 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빅토르에게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첫째,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둘째,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그들의 낙망하고 좌절한 인생에 큰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사랑이 되어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거기 감동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걸인이 톨스토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단 한 푼의 동전도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걸인의 손을 꼬옥 쥐며 속삭였습니다.

“형제여, 미안하오. 지금 내가 가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정말 미안하오.”
그때 걸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톨스토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걸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저는 선생님께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것은 돈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사랑은 노여움과 불만을 녹이는 강력한 힘이 그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4:21에서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실한 형제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형제에게 행하는 진실한 사랑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속에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지식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감동을 주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전도를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찾아가서 만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태신자를 정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면 또 기도하고 있다면  구체적인 만남을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그 만남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며 그 만남들을 하나님이 주선해주시는 만남들로 역사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위해서 태신자들을 찾아가서 만나되 진실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면 그 사랑의 능력으로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사랑의 능력으로 찾아가서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지막 때에 분명한 심판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책망을 받을 자는 왼편에 구원과 복을 받을 자는 오른편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마지막에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모두 마지막 때에 양과 같이 오른편에 서서 구원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왼편과 오른편으로 구분되어지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기준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사랑과 관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심판받아야 할 이유이고.
또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구원받고 복을 누리게 될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어떤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어떤 업적을 남기었느냐도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 쉽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행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되는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요?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과 주님 스스로를 동일하게 취급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40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45절)

예수 믿는 성도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헌신 봉사 충성하면, 구원의 은총과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내게 임하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분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형제를 사랑하되 지극히 작은 자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전도대와 봉사대 사역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봉사대와 전도대가 활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그 분들의 노고를 치하드립니다. 참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전도대와 봉사대가 하는 일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제사회는 북핵문제로 시끄럽습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핵무기는 없어야 합니다. 아니 이 세계에 핵무기는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핵문제로 인하여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도적인 지원들이 끊어지고 잇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북한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올 겨울 수많은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핵은 싫습니다. 조금도 원치 않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어떤 명목으로든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더욱 교회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지극히 작은 자는 저 북한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에 채프먼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아들 윌버가 자신에게 용돈을 준 탄넬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많아요. 저는 아저씨가 준 3달러로 어린돼지를 사서 키우려고 합니다. 이 돼지를 팔아 한센병 환자 가족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소년은 열심히 돼지를 키웠습니다. 마을의 꼬마들도 관심을 갖고 함께 돼지를 키웠습니다.
어린돼지 ‘페트’는 살이 포동포동 올랐습니다. 소년은 이듬해 돼지를 팔아 한센병 환자 가족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한 신문에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돼지저금통을 만들어 이웃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돼지저금통입니다. 그때부터 소년들은 군것질할 것을 아껴 저금통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을 한센환자의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한 소년의 작은 사랑이 최초로 사랑의‘돼지저금통’을 만든 것입니다.

저의 집에는 전화기 앞에 작은 저금통이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저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주어다가 수시로 그곳에 넣고 있습니다. 주머니에 남아있는 동전을 그곳에 넣습니다.
무엇을 사고 남는 동전을 그곳에 넣습니다. 생각나면 넣고 있지만 자주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 저금통이 다 차려면 한동안 열심히 넣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저금통을 부스러기 저금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스러기 저금통’ 그것을 모아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부스러기 저금통을 하나씩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서 올 성탄절에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매년 신년 초에 부스러기 저금통을 하나씩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부스러기 동전들을 모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여진 부스러기들을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며 사랑하는 일에 쓸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는 큰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진실한 사랑과 관심에 굶주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감동을 찾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작은 사랑에도 큰 감동을 하게 됩니다.

애인을 감동시키는 방법이 있답니다.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사랑해"라고 적은 쪽지를 아주 많이 준비합니다.
그리고 극장 안에서 팝콘을 한 다발 사서 미리 준비한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서 팝콘 다발
에 집어넣습니다. 여자친구가 팝콘을 먹다가 이상한 쪽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 쪽지를 펴봅니다. 

헤어질 때마다 애인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어줍니다.  아무 말없이 애인은 그저 차비려니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오랫동안 그런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동전을 전해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1000번째 학이야, 네 소원을 기도해. 이루어질꺼야."

애인의 어머니 생신 때는 꼭 꽃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여 꽃을 보냅니다. 자기가 직접가면 안됩니다. "당신의 한부분이 어느 젊은 청년에게는 전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이번 전도 축제를 통해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우리가 정한 태신자들입니다. 그 영혼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합니다.
세상의 큰 일들 만이 좋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화려하고 자랑할 만한 큰 것만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며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 그는 바로 우리가 섬기며 사랑해야 할 오늘의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극히 작은 자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는 꼭 작은 사랑과 배려와 섬김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편지를 보내보면 어떨까요? 어떤 분이 아들에게서 얼마 전 장서의 편지를 받았는데 눈물로 읽으시며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마음과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말씀하는 걸 들었습니다.

우리교회 새 가족이 된 분 가운데 오상완 성도님이 계십니다.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교회 처음 나오게 된 것을 말씀하는 걸 들었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전도하려고 했지만 전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려준 집사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저런 분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다니겠노라고 마음먹고 우리교회를 오신 것입니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진실한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동을 주는 사랑, 지금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입니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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