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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챤의 국가관 (롬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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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11월, 12월 참으로 중요한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데, 여러분들 올 한해도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선교회장님들의 임기가 2년이기 때문에 11월에 총회가 없고, 그래서 어수선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은, 그래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작과 매듭을 다하고, 새로운 출발을 잘 준비해서 새로운 출발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귀중한 뜻을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2가지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는 성도라고 하는 천국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이고, 또 하나는 우리 같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천국의 시민이라고 하는 영적인 존재에 속해 있는 우리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는 나라에 속해있는 우리의 부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은 긴장관계를 가질 때도 있었고, 민첩한 밀월관계를 가질 때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교회가 연합이 되어지거나 압도되어졌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중세에는 정교일치가 된 시대였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일치라기보다는 교회가 정부를 압도하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우리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빼 놓지 않고 기억하는 한 사건,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입니다.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카노사라고 하는 성을 방문했을 때 추운 겨울 눈 덮인 성 밖에서 무릎을 꿇고 무려 3일동안이나 속죄를 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계속 인정해 주기를 간청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는 교회가 그만큼 세상의 왕을 인정하는, 왕을 좌지우지하는,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권위와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중세시대,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온 세상이 다 복음화가 되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 이론적인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불행하게도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 가장 정직하지 않았던 시대, 가장 타락하고 부패했던 시대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성직을 매매하고, 타락의 길로 달려갔던 시대가 중세였습니다.

중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에도 현재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보면 종교와 그리고 정부가 그리고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국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독일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래서 대부분 교회의 중심을 루터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독일정부는 독일국민이 낸 소득세의 1/10을 정부가 교회를 지원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회의 목회자의 사례비도 정부에서 나오고, 교회 모든 지도자들, 교회 모든 행사들도 다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에 큰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요. 뭐냐하면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저축 해 놓고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이 저에게는 사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건축이야 시공사를 맡기고, 설계를 해서 우리가 다 맡기면 이들이 12개월에서 15개월이면 그들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을 짓는 그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지을 수 있도록 우리가 건축비를 마련하고, 그 일에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고 일치된 우리의 영적인 비전을 이끌어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헌금을 작정해야 하고 그 헌금을 작정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많은 부분에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 그러나 독일 같은 데는 교회가 그런 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개척교회라고 해서 생활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보고만 하면 다 청구한 대로 지출을 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독일교회가 걱정하지 않고, 그런 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돈을 받으면서 복음의 전령을 했다면 지금 독일은 전국민이 복음화가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나라보다도 어림도 없는 그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듣고 하나님의 뜻 대로만 사는 그것만 고민하면 될 것 같으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게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뿐이예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들이 어떤 교회들입니까? 교회가 건축을 하거나 대지를 구입하거나 어떤 중요한 행사를 하거나 왜냐하면 우리가 전교인 운동회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운동회 준비하는 위원들이 밤낮없이 준비하는 일, 그 운동회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후원하고, 거기에 많은 경비를 함께 나누는 일, 함께 그 날 참여해서 귀중한 시간, 모든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런 모든 부분들의 어우러짐이 결국은 훌륭하고 멋진 운동회를 이끌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야기 할 때에 우리가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 성전건축을 위해서 우리 피묻은 돈을 하나님 앞에 봉헌할 때에 우리가 이 제단에서 우리의 기도와 눈물과 땀이 함께 섞여진 제단에서 사역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할 때에 그들의 눈물과 함께 베여진 제단에서 헌신하는 성도들의 자리가 바로 능력의 교회요, 은혜의 자리가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에 외국에서 교회를 지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우리 한국인들은 한 것이 없어요. 모든 물자와 심지어는 사람까지 와서 지어줬어요.

미국공병대가 와서 지어주고, 미군들이 와서 지어줬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교회는 훌륭하게 외모를 갖췄지만 교회는 텅 비어있어요.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한 장 한 장의 벽돌이 쌓여지는 것처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그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어지고, 세워지고, 건강해 질 줄로 믿습니다.

독일교회는 이상하게도 세계 신학자의 2/3 이상이 독일에서 나와요. 독일은 신학의 아주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독일은 자유주의신학, 인본주의적신학이 너무 발달했어요. 아주 우습게 말하면 이렇게 예를 들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죽었다. 내가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주제를 가지고, 내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려고 그런다. 그렇게 연구비를 청구하면 연구비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신학을 내가 연구하려고 그러면 그리고 연구비를 청구하면 연구비가 나와요. 독일에서 나오는 신학자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이고, 인본주의 신학이고 그래요. 자유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이 어떤 것인지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5000명을 먹이셨는데,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았잖아요. 여러분 믿습니까?

그런데 이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지요. 다 도시락을 가지고 왔는데, 예수님이 너희 중에 뭐 가진 거 없냐고 그러니까 도시락을 나 먹어야지 누굴 줘요? 다 움켜쥐고 있다가 어떤 어린아이가 철없이 자기가 먹어야 될 걸 가지고 나와서 주님, 제 것이 여기에 있어요. 주님이 아이고, 착하고나. 그리고 축복기도하실 때 나도 드릴걸, 그래도 내가 먹어야지 누굴줘. 그리고 다 끌어앉고 있다가 축사 끝나고 자기 도시락 다 먹고 나서 5000명이 먹고 남았다는 거예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 디베랴바다를 건너신 장면도 그들은 이렇게 해석하지요. 예수님께서 석양의 그 해변가를 거니셨는데, 뒤쪽에서 보니까 예수님이 물위에서 걷는 것처럼 그렇게 비쳐서 예수님이 그렇게 보인 것 뿐이지, 사실은 예수님이 해변을 거니신 것이다.

성경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 모든 기적과 표적을 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성경 66권을 그렇게 뜯어버리니까 결국은 껍데기 밖에 남는게 없는 거예요. 그게 자유주의 신학이고, 인본주의 신학입니다.

언제나 우리 부천지역에서 교회학교 교사 강습회가 있었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신학자, 유명한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고 그래서 강사로 모신 적이 있었어요. 그는 교회에서 제일 신앙적으로 성경을 제일 많이 보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교사들이니까 제일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이고, 신앙적으로 제일 바르신 분들인데 여러분, 출애굽기에 모세가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 모세가 정말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멘 아멘 그러니까, 이것들 보세요. 교사들이 이렇게 무식해 가지고, 교사들을 하냐고, 똑바로들 하세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갈대밭을 지나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홍해를 건너요? 그러면서 호통을 쳐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이상해 버렸어요. 뭐가 옳은 거고, 뭐가 그른건지, 뭐가 야단을 치고, 맞아야 하는 건지 이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요. 그 장면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3일인가를 강의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날 그 강의 하고서 그만 두었어요. 그 강사를 쫓아 보냈어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 따위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인본주의, 자본주의의 신앙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으로 전체 편집을 하고 짜깁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상당부분 독일에서 나와요. 독일교회가 복음화 되거나, 복음주의 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그런 성령의 역사에 붙잡힌 교회이기 보다는 그냥 유지되기 위해 돈 다 대주지, 구원해 주지 않을까? 걱정 근심이었어요. 교회가 그렇게 그러저럭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나 종교는 성경에서 보면 분리되어져 있어요. 정교일치가 아니라 정교분리가 성경적 정신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실 때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기관을 따로 두셨어요. 영적인 부분은 교회가 담당하게 하셨고, 세속적인 부분은 정부가 담당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영역주권설입니다. 영역이 달라요. 그리고 그 영역이 권위를 가지고, 그 영역을 가진 모든 부분은 거기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평안의교회 영적지도자로써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모든 영적인 부분을 리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나서 그냥 오면 ‘손님, 음식값 내셔야지요.’ ‘아니, 내가 평안의교회 담임목사야.’ ‘음식값 내시라니까요.’ ‘내가 담임목사라니까!’ ‘음식값 내시라니까요.’ ‘내가 담임목사라니까!’

무슨 이야기예요? 내가 영적지도자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버스값을 내고, 음식을 먹으면 음식값을 내고, 전화를 걸면 전화비를 내고, 세상에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거지요.

반대로 세상정부,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누리지만 하나님의 영적인 영역,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장관도 대통령도 회장도 아닌 한 성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 회중석에 앉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육군중앙교회에 갔더니 거기에 한 부분에 강단 옆에 카펫을 깔고 좌석을 쫙 만들어 놨는데, 이상하다 이 교회에 저런 좌석이 필요가 없을텐데, 예배가 시작되고 보니까 별을 단 장군들이 거기에 다 앉아있어요. 일명 장군석이예요.

그래서 제가 예배를 마치고 그 목사님에게 ‘아니, 교회에 장군석이 다 뭡니까?’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는 집례자의 자리와 그리고 성도의 자리만 있으면 되는 건데, 장군석이 다 뭡니까? 여기가 군대라, 군대가 되어서 특수한 상황이라 저 별을 단 장군들을 사병들과 같이 앉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장군석을 만들었다고 그럽니다. 이건 아닙니다.

별이 아니라 별 열개를 달아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성도로써 오는 거예요. 영적인 세계와 이 세계의 정부의 영역이 다르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예요.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정한 의무와 모든 법도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목사도 군대를 다녀왔고, 목사의 아들도 군대를 다녀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정해진 방법과 원칙에 따라서 노동을 하고, 세금을 내고, 군에 가고, 국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늘에 속한 시민인데, 그리고 여러분들이 세상의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반면에 세상의 정부는 하나님의 교회, 영적인 세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존중하고,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소사구 연합집회가 동광교회에서 열렸는데, 우리 부천시장님이 참석하셨는데, 회중석 중간에 앉았어요. 광고 중간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격려를 하는데 그 회중석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맞으니까 보기가 좋아요. 그게 정상입니다. 시장이라고 여기 앞에 나와서 앉아있는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와도 대통령이 오셨으니까 여기에 자리를 맞다는 것은 정신 나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이예요.

하나님의 교회의 영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모든 성도들은 다 동일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정부를 각각 두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인데, 하나님께서 바로 정부와 교회, 교회와 정부를 두셨는데,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분명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1절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던지,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던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되어질 때 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권세의 위임을 받은 세상의 정부를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야 하는 거예요.

교회와 정부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주 기묘한 신앙고백 하에 우리가 그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두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절부터 쭈욱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세자들을 너희가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국가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첫째 국가관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에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부가 정하기를 정부, 작게는 지방정부, 세금도 국세, 지방세, 이런 모든 정부의 조직에 대해서 우리가 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데, 대통령이 예수를 안 믿을 수 있고, 장관이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부의 권세를 위임하셨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개념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장군들이 노무현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저 양반 찍지도 않았는데, 인기가 10% 밖에 안 되고, 영 대통령도 아닌데, 그렇게 맘에 안 든다고 해서 대통령이 왔는데 인사도 안 하고 뒷짐 지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사람을 존경하지 않거나 그 사람을 싫어하더라도, 그가 지닌 대통령이라는 그 지위는 존중해서 경례를 붙이고, 보고를 하고, 예의를 갖추어야지요. 그것이 정상적인 자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믿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질서를 따라서 따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7절을 보면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마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개념이 있지만 결국 요약을 하면 두 번째 크리스찬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정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지요.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정직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연히 크리스찬이라고 하면 정직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연히 정직해야 할 크리스챤이 정직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우스운 말도 나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지만 정직해.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다 정직하지 않다는 100%가 정직할 수 없다는 그런 전제를 가진 듣기 거북한 이야기 아니예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볼 것도 없어. 그 사람은 평안의교회 집사래. 아휴, 그러면 이야기 할 것도 없고만. 이런 정도의 신뢰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아휴, 요즘 집사님 중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이야기가 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들도 스스로 가슴에 대고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정말 정직한 삶을 살았나? 물질적으로도 정직한 삶을 살고 있나? 인격적으로도 정직한 삶을 살고 있나? 여러분 공무원들이 무서워 하는 사람이 뭔 줄 아세요? 정직한 사람을 제일 무서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무원을 세우신 제일 기뻐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다른 차가 주차를 하려고 그 차는 주차에 있던 차는 나오려고 하는 찬데, 나오다가 옆에 있는 차를 쾅 박았어요. 살짝 댄 것이 아니라 조금 강하게 받았어요.

저는 주차를 하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앞 라인에 있는 차가 주차장에서 나오다가 받았는데, 너무 세게 받아서 푹 들어갔어요. 그런 상황에서 놀랬어요.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이 여성운전자였어요. 어쩔 줄 몰라서 더하면 차가 망가지니까 가만히 세우시라고 하고, 기어를 2단으로 하시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풀어서 그대로 앞으로 살짝 나가십시오. 핸들을 더 풀어서 충격을 주지 않고 잘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뒤로 나오시고, 두세번 해서 이렇게 해서 나왔어요.

그래서 차가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나왔어요. 차를 보니까 이 차는 푹 들어갔어요. 그렇게 두 세 번 해서 차가 이렇게 빠져 나온 다음에 뒤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차가 윙 하고 달아나 버렸어요.

아마 그 분은 너무 당황해 가지고, 빨리 이 자리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제가 볼 때에 씁쓸하더라구요. 제 차는 아니지만, 아마 그 차 주인이 나왔으면 얼마나 속상할까? 그렇다고 차 번호를 적어가지고 뺑소니라고 고발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은, 오래전에 목동에 성도님 심방을 갔었는데, 그 때도 제가 차를 주차 하려고 들어가다가 제 차가 새 차였는데, 옆에 있는 차도 보니까 좋은 차였어요. 들어가다 보니까 슬쩍 건드려 가지고, 살짝 상처가 나 있어요. 아이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다가 명함을 꺼내서 제가 부주의로 상처를 냈는데, 연락 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하고 명함을 끼워 놓았어요.

그랬는데, 그것을 우리 성도님이 보셨어요. 제가 하는 일련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셨어요. 그리고 성도님이 그 장면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야, 우리 목사님 너무 멋있다. 그렇게 크게 상처를 낸 것도 아니고, 살짝 상처를 낸 거니까 얼버무리고 지나가도 될 일인데 명함을 꺼내서 부주의로 상처를 냈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갚겠습니다. 윈도우 브러쉬에 딱 끼워서 놓았더니 그 장면을 보고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그리고 이제 일주일쯤 있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오나 하고 염려를 하는데 일주일쯤 있다가 연락이 왔어요. 그 분 차 주인이 전화가 와서 너무 죄송하다고 조치를 취해 드리겠다고 하는데 그 분이 그럴 필요 없다고, 요즘 차를 망가뜨려 놓고도 그냥 달아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살짝 닿았는데도 명함을 꽂아 놓으시고, 연락을 주셔서 감사해서 연락을 했었대요. 그래서 다시 조치할 필요가 없다고, 제가 그 전화를 받으니까 일주일동안 염려하고 걱정했었는데 체증이 싹 가라앉는 것 같더라구요. 얼마나 감사한지. 정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직이 때때로 우리의 손해가 눈 앞에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떳떳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물질적인 부분, 사람들의 관계 부분, 어떤 부분에서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정직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많은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저는 이 두 가지만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나님의 영적인 부분은 교회를 통해서 세속적인 부분은 정부를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 각각은 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또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면서도 땅의 속해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이왕 세상에서 살아가면 순종하면서 정직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기를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크리스챤으로서의 살아가야할 여러 가지 모습들이 여러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설문조사를 해보면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성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그 부분들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살고, 세상에서 우리의 다른 의무와 성실함을 감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점수가 낮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점수를 회복하는 결단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 조사를 하던지 역시 이 세상에, 역시 우리나라는 크리스챤이 있어서 좋구나. 역시 우리는 그들을 믿을만하고, 역시 그들은 대한민국의 기둥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분명한 삶의 자세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새로운 숙제가 되고, 새로운 삶의 도전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넉넉히 살아가는 평안의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교회와 정부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 연약하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많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하시고, 하나님 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로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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