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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의 의미 (신 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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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일은 우리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 절기는 사람의 생각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라 명하신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연례행사처럼 습관적으로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심어린 감사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한주 앞둔 이 시간“추수감사절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아메리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청교도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중 절반 이상이 죽고 생명을 건진 무리들이 낯선 땅 신대륙, 아무것도 없었던 그 황량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낯선 땅의 환경만 보고 절망에 빠져 불평했다면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찾았다는 기쁨과 감격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이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 메사추세주의 케이프 가드만에 도착했는데 육지에 내리기 전 케이프 가드만 선상에서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서약서 즉 네 가지의 생활헌장을 발표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
둘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by the grace of God).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for the glory of God).
넷째, 하나님의 존전에서(in the presence of God)

이렇게 신대륙에 온 목적과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입니다. 이 서약서는 그들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플리머스의 부리얼 언덕에 세워져 있는 플리머스 회관 현관에는“너희 조상들이 어려움 속에서 성취한 것들을 비겁하게 포기하지 말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의 좌우명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그들의 화폐인 달러마다“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in God we trust)”라는 글귀를 써 넣었습니다.

청교도 103명이 65일간의 고투 끝에 도착한 곳은 거친 광야였고 곧 바로 겨울이 닥쳤습니다. 당시의 고통을,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브래드 포드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12월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한 조각의 빵도 한 알의 옥수수도 없다. 풀과 나무껍질, 해초와 들짐승으로 연명하고 있다. 오늘은 서른아홉 번째의 친구를 하나님께 보냈다. 이런 비참한 현실....오 주여!”

그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44명이 죽었고, 봄에 씨앗을 뿌려 정성껏 농사를 지었지만 가을에 추수한 곡식은 양식으로 하기에도 부족한 적은 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첫 열매에 감사하며 눈물의 추수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소유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오늘 내가 생존해 있음에 대한 감사요 또한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감사를 받으시고 소위“아메리카의 기적”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감사절을 지켰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수확을 한 후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이 절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지켰으며, 그때 절기 명칭은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초막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한해의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들인 후 양식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추수감사절(수장절, 초막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왜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입었으므로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피땀 흘려 농사를 지었지만 모든 소득은 주인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과 이스라엘의 한탄을 보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힘껏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빼앗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애굽의 억압과 같은 이 세상 죄악의 억압이었습니다. 이 죄악의 억압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의 자리에 놓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죄악에서 우리들이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7-18절 말씀에“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하셨습니다. 죄악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해에도 평화를 주셨습니다. 북한 핵문제로 국제 정세가 불안하고,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거리마다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사용하는 그 편리한 가전재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집집마다 설치되어있는 값비싼 컴퓨터며, 사람마다 들고 다니는 핸드폰을 보시기 바랍니다. 불과 20 여 년 전과 비교한다면 꿈과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바꿔 생각해보면 감사한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실패도 아닙니다. 감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함이 없으면 그것은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유를 늘리기보다 욕심을 줄이는 삶입니다. 욕심을 줄일 뿐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할줄 아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군인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부부가 주일을 맞아 아픔을 딛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거액의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헌금봉투에 감사의 내용을 적기를“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글귀였습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여보, 우리도 저분들처럼 감사헌금을 드립시다.”라고 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아니, 우리 애는 아직 살아 있잖아요.”이때 남편이 “바로 그것 때문에 감사하지는 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잊고 있는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감사를 기다리고 있는, 감사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이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죽음이나, 배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고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매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와 불평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하면 할수록 더욱 불어난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만과 불평의 일들이 쌓여 가지만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과 축복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어느 분은 말하기를“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량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감사는 무(無)로부터의 감사, 환난가운데에서의 감사, 범사에 감사함을 가르치고 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유(有)로부터의 감사, 형통가운데에서의 감사, 범사가 아닌 선택적 감사를 생활화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비춰볼 때 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의 신앙입니까? 이제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생존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욕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어디에서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복지까지 가는 동안 메마른 사막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들은 이동식 천막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를 광야 교회 즉 성막교회라고 합니다. 이 성막은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구분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갔던 장소입니다. 절기를 지키되 이 거룩한 곳에서 지키라 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택하신 곳이 곧 중앙 성소인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후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이 그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 후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바로 그 곳입니다. 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절기가 되면 온 힘을 다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모였습니다. 심지어 먼 외국에 거하는 사람들까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성전에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호화로운 건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움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면 그 곳은 성전입니다. 우리교회도 천막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가정으로, 지하상가에서, 다시 4층 상가로 옮기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교회당은 어디에 있던 성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함께 모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효민가족 모두는 이 귀한 감사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이 성전을 찾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Ⅲ. 누가 어떻게 이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를 지키되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본문 14절에“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는“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다 함께 절기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교구장은 교구의 성도들을 권면하고, 구역장은 구역식구들을 권면하여 함께 주 앞에 나아와서 감사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지족은 감사를 표현할 때“내 머리가 흙 속에 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감사에 대한 그들의 풍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를 표현할 때 머리를 거의 땅에 닿기까지 숙이는데 이는 입은 은혜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병아리들이 작은 껍질과 티 같은 부스러기까지도 게걸스럽게 쪼아 먹고는 마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듯이 주둥이를 닦아내는 모양을 본 따서 지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이익만을 찾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우리말 표현에도 고마움을 모르고 시치미를 떼는 것을 빗대어“입 싹 씻는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시치미를 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즉 최선을 다해 예물을 드리며 절기를 지리며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봉사와 헌신을 한다 해도 주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순교자로 내 생명을 드린들 그것이 은혜에 보답이 되겠습니까? 시편 24:1의 말씀에“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하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물을 드렸습니다. 헌물을 드리면서 그는 말하기를“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4,16)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我)라는 존재는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는 다만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스코틀랜드 가정의 표어 가운데“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침 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어떤 이는“인생은 테니스경기와 같다. 서브(섬기)를 잘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브는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테크닉입니다. 서브 하나로 많은 점수를 거둬들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서브를 잘해야 합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얼마나 서브를 잘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명기 10:12~14)라고 하셨습니다.

소와 양의 생리는 털을 내거나, 젖을 내거나,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는 노동을 내고, 어떤 소는 우유를 냅니다. 어떤 양은 털을 내고 어떤 양은 양유를 냅니다. 우유의 경우는 날마다 짜야 하는 것으로 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짜내면 다시 새것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제때에 젖을 짜지 않으면 그 젖은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소나 양이 모두 같습니다. 봉사하는 것도 기회가 주어질 때 해야지 나중에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곧 감사하지 아니하면 매일 젖을 짜지 않다가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할 내용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고 묵혀두면  마귀가 와서 그 감사의 내용을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십일조도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고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십일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어느 기업인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 밖의 돈 3천만 원이 생겼습니다. 큰 돈이 갑자기 들어오니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봉투에 감사헌금 3백만 원을 넣었습니다. 차를 타고 교회까지 가는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내가 장로도 아닌 집사인데 3백만 원은 너무 많지 않느냐?’그러면서 백만 원을 헌금봉투에서 뺐습니다. 그밖에 이런 저런 이유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때마다 봉투에서 돈을 뺐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3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그 헌금을 하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부서진 자동차를 고치는 견적이 정확하게 2백70만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경험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나 봉사함에 있어서 처음 떠오르는 마음과 생각을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다음의 생각과 핑계는 성령의 감동을 방해하는 어두운 세력의 미혹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타산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타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를 부르실 때 타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값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타산하지 않으신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6-8)하셨습니다.

WBC 국제선교회 창설자 찰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는 말하기를“주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고 또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분명하다면 주님을 위한 어떤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감사는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의 경우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제일 좋은 것(the best)입니다.
둘째, 제일 먼저, 처음의 것(the first)입니다.
셋째, 가장 소중히 아끼는 것(the dearest)입니다.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결과적인 감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승리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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