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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소서 (신 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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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9장의 내용은 1절의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다시 말해 신명기 29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데스바네아에서 벌을 받을 때에 20세 미만이었던 사람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 즉 신세대들과 모압 땅에서 세우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40년 전에 그들의 부모가 호렙산, 즉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을 모압에서 갱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언약의 6대 구조 가운데 ‘언약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무슨 은혜를 베풀어 주셨길래 언약체결을 요구하시는가’와 같은 역사적 서문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서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 저러한 은혜를 주셨고,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목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기 원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참으로 낙망되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4절) 이것은 언약체결을 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고백하는 개인적인 느낌과 해석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말씀의 내용을 설명하고 적용을 해나가는 과정 중에 가끔 개인이 느끼는 느낌을 섞어서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듣는 분들이 다른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이 부분만큼은 잘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는 점을 은연중에 동의하며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큰 은혜와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와 같은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은 것이로구나”하는 해석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말씀은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며 탄식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30장 11, 13절을 통해서도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역설합니다. 모세는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받으며 살 수 있는 원리는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는 마음이 없고, 보는 눈이 없으며, 듣는 귀가 없다면 쉬운 진리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그 진리를 실천하여 축복받는 삶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1. 동일한 문제의 지속

이와 같은 문제는 모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
또한 동일한 문제가 예수님의 공생애 시대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12).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외인들이 돌이켜 죄사함을 받을까봐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깨달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님과는 조금 다른 분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사도들이 살던 사도행전 시대에도 계속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가르칠 때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를 않자 바울은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28:26-27)고 말합니다. 

사람이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지 않으셔서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과 귀를 닫게 하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고침 받고, 죄사함 받고, 구원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예외 없이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D.L.무디식, 빌리 그레함식의 복음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님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고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는 그 말씀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2. 이 문제의 고통

사람이 깨닫거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있느냐고, 혹은 무슨 고통이 따르겠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 오감을 가지고 외부세계와 접촉합니다. 사람의 오감 가운데 하나라도 장애가 생기면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기 걸려서 코만 막혀도 냄새를 맡기가 힘들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장애인들도 가끔은 장애체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가리거나, 귀를 가리고 한 두 시간만 생활해 보세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해서 살 수가 없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장애체험을 하고 나면 주어진 오감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제 저는 수레바퀴 선교회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저를 소개하니까 대뜸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뭐가 고마우시냐고 물었더니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장애우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줬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장애우들에 대한 약간의 배려에도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선진국이 되려면 장애우에 대한 배려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장애우를 고려하지 못하는 사회는 후진국입니다. 장애우들을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과 물질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쩡한 육체적인 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은 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귀로는 모세의 말씀을 다 들었지만, 영의 귀로는 듣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오감은 멀쩡했지만 영의 오감이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에도 오감이 있듯이 영에도 오감이 있습니다.

영적인 오감에 관해 사람은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영의 감각기관이 완전히 죽어 있는 불신자입니다. 불신자들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고 똑똑할지라도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성경말씀도 우스꽝스럽게 취급합니다. 영이 죽어서 영의 감각기관이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믿고 영이 살아나긴 했지만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영의 눈과 귀가 어두워 잘 보고 듣지 못합니다. 또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영적으로 어린 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영의 눈과 귀가 밝아 깨닫는 마음도 큰 사람들입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밝게 뜨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신의 오감이 멀쩡하다고 해도 영적인 오감이 죽어 있거나 기능이 약하면 영적인 세계를 올바로 감각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올바로 감각하지 못하면 영의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바알과 아세라, 몰록과 같은 우상들을 가짜다. 우상을 따라가면 망한다. 하나님을 따라가라. 위급할 때 마시는 우황청심환처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만 하나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잘 될 때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라.” 그러나 모세가 아무리 외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깐 사이에 우상을 만들고 따라갔습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아주 어둡거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모세는 그들이 마귀의 유혹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반복하여 가르쳤습니다.

전 어려서 잔소리를 싫어했는데 부모가 되니까 어느새 잔소리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밥 먹을 때는 똑바로 앉아라. 운동 열심히 해라. 교회에 가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정성껏 드려라.” 자녀들은 듣기 싫을지 몰라도 부모들이 잔소리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녀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의 길로 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신명기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잔소리를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

거듭되는 모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의 눈과 귀가 닫히고 깨닫는 마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체험치 못한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며 40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을 체험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이 행했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갈라진 홍해를 건너갔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죽는 것을 목격했고,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40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비록 빵은 먹지 못했지만 반석에서 솟아나오는 생수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아마 세상 모든 백성들 가운데 이처럼 밝은 빛을 받은 백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적 감각기관이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에 모세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체 옆에 환한 빛을 비추거나 라디오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고 해도 시체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서 빛과 소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빛을 주셨지만 시체처럼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감겼기 때문에 그 빛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영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인간의 전적타락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사업을 잘 이끌어나가며 정치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영적인 세계를 감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빛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둠을 택했다면 수긍이 가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큰 빛을 받고도 어둠을 택한 경우에는 그들의 영안이 멀고, 영적으로 죽게 되었다는 말 외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부흥회에 참석할 때, “하나님, 제게 은혜를 주시려면 주시고 말려면 마세요”라는 자세로 나오면 절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영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할 때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라도 교만하면 망합니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교회가 컸다고 거들먹거리고 어디 가서 어른인체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목사는 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 연구도 하지 않는 목사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교만하여 기도 하지 않고, 성경 읽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고꾸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 제가 영적으로 무능합니다. 저의 영안이 닫혔습니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6절),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9절)고 선포하였습니다. 모세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신인체하는 존재들, 잡신, 우상, 악신, 귀신들도 많지만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한 분이신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만이 오직 참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행복하고 형통하며 축복받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너희가 죄인이니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고 내가 너희에게 준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라.” 그게 십계명입니다. 부모를 학대하거나 살인하는 사람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사람들의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이 잘 되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고 쉬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입 안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약하거나 죽어버리면 아무리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설교도 많이 듣고 말씀도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기관은 늘 소생되어야 합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어두우면 어두움에 방황하다가 결국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악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 파멸과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감각기관이 죽어 있다 보니 가나안 땅에 살아도 전쟁과 기근이 그치지 않고 결국 포로가 되어 열방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4. 영적 감각기관의 소생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의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소경이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씻자 갑자기 육신의 눈이 떠지고 빛이 감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깜짝 놀라며 예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로 예수님께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소경 되었던 사람이 깨달은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의 고백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소경된 자가 자신들을 가르치려 한다며 도리어 눈뜬 이를 꾸짖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눈을 떠서 구원 받고 축복 받을 수 있다는 태도로 예수님께 맞서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눈이 감긴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영의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 않습니
다. 오히려 자신의 영의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자백하는 사람,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가르쳐 달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아무리 은혜가 임한다고 해도 눈과 귀가 닫힌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술주정뱅이에게 술 취했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취하지 않았다고 발뺌합니다. 도둑질 한 사람에게 물어봐도 자기는 도둑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재판 현장에 가보면 판사가 죄가 있느냐고 물어볼 때에 죄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고백하면 판사가 정상을 참작하여 형량을 줄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못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제자훈련을 많이 합니다. 목사들이 선생이 되어서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훈련을 한다고 해도 지성에만 호소하면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우리의 영성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적인 은혜를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는 영적인 깨달음이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영적 감각기관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택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예수님은 염소들을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못 보면서도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영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엘리사가 수종드는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주었듯이 오늘 영안이 열리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 집사가 성령의 소리를 듣고 영의 귀를 열었듯이 영의 귀가 열리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울이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쳤듯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도 깨닫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귀가 열렸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분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엎드려서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 영안을 열어주십시오. 영적인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번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기를 결단하십시오. 무엇보다 영적 감각기관을 회복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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