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36~50)

  • 잡초 잡초
  • 258
  • 0

첨부 1


       
미국에 '9.11 사태'가 일어나고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을 때였습니다.
  그 직후에 부시 대통령이 외국 수뇌들과 정상회담들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대상에 따라서 만나는 분위기들은 아주 달랐습니다.
  미국에 비협조적이었던 프랑스의 수상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비쳤습니다.
  반면에 영국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공식적인 면담 외에 부시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를 해서 사적인 시간까지 나누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국의 '대 테러 전쟁'에 영국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협력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정상회담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에는 둘 다 같은 만남이지만, 그 실제 내면을 따져 들어가 보면, 전자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와 형식적인 공동기자회견 따위만으로 끝난 반면에 후자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인간적인 정이 끈끈하게 나누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만나는 모양은 같지만, 거의 겉치레와 형식에 불과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정말 그 어떤 진하고 깊은 내용이 왔다 갔다 하는 만남이 있는 것은, 비단 국가 간의 정상 회담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개인적인 만남들에서도 항상 일어나는 사실입니다.
  별로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그저 안면 때문에 만나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정말 시간 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즐겁고 의미 있는 만남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도 그와 꼭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고 계실 때, 실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직접 대면하여 만났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꼭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두고 간직할 귀한 체험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귀한 기회를 그냥 무심하게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과 만났다고 해서 다 같은 만남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내면의 실상에 있어서는 극히 대조적이었던 두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 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어떤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예의는 갖추고 있지만 사랑은 없이 예수님을 형식적으로만 만나는 '참석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이 시몬은 외견상으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길거리에서 지나가다가 예수님과 만난 경우와는 전혀 다른, 아주 각별해 보이는 만남이었습니다.
  우선 36절에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그 예수님을 청하는 자세가 정말 나무랄 데 없이 보였습니다.
  자기 집으로 정중히 식사초대를 하여 정식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짐작건대 아마도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 보자는 정도의 동기에서 예수님을 초대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대한 언사도 아주 정중했습니다.
  39절과 40절에 보면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디 말해 줄 것이 있다고 하셨을 때, 그는 속으로는 지금 불만스러운 것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예수님을 "선생님" 즉 '랍비'라는 최고의 존대 명칭으로 부르며 경청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유대사회에서 경건한 지식인으로 통하는 바리새인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실로 그는 정말 세련된 사람이요 예의 바른 사람이요 그 매너에 있어서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도를 발휘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는 자세에는 실제로 아주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최고의 감격스러운 체험이 무엇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통하여 그에게 지적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41절부터 43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41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뭐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도 다 그 의미와 대답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하여 시몬은 "제 생각에는"(I suppose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야 뭐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라고, 그 예수님의 질문 속에 담긴 의도를 깨닫고 무언가 언짢은 심기를 느끼면서 마지못해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빚 많이 진 사람이 공짜로 탕감받는 것이 본인에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즉 죄 많은 사람일수록 그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은혜로운지를 실상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이론적으로만 "그야 그렇겠지요."라고 대답하면서도, 그 자신이 체험적으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 용서 받음의 감격을 전혀 모르던 시몬의 마음에 그 대신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남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아까 39절에 보면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잘 알려진 한 여인이 그처럼 예수님 앞에 찾아와 엎드렸을 때, 그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람이 진짜로 선지자라면 최소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여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 정도는 알아채야 할 텐데."라고 속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즉 시몬은 남의 죄가 얼마나 중한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숙달된 조교'와도 같았지만, 그런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완전 무감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사람 죄 판단은 잘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얼마만큼의 죄의 빚을 지고 있는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시몬, 예수님께서는 죄를 세려 오신 분이 아니라 "오십 데나리온"이든지 "오백 데니리온"이든지 무조건 다 탕감하고 용서해주려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시몬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무 진정한 존경과 사랑이 없는, 그저 격식만 약간 갖춘 초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빠뜨린 것들이 많았습니다.

  44절로부터 46절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시몬은 예수님을 청해놓고도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이것은 웬만한 손님에게는 기본적인 대우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시몬은 이것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을 맞추고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 것' 역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평상적인 예우였지만,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고 있었던 시몬은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특별히 초청까지 했지만, 실은 무슨 특별대접은커녕 손님 대접의 가장 기본적인 예우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바리새인 시몬의 자세를 가리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정확하게 진단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같지만 바로 시몬처럼 만나고 있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교인으로서의 모든 예의를 다 갖추고 교회를 출입합니다.
  말과 행동거지에 품위와 교양이 넘쳐흐르고 매사에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신사요 숙녀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마주 앉아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해도, 그 심령에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교인이야말로 이 바리새인 시몬과 꼭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뜨거운 눈물' 대신 겉으로 '싹싹한 매너'만 남아 있고, '감격스러운 기쁨'은 전혀 없고 오직 '세련된 예절'만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형식적인 만남이요 더 솔직히 말해서 외식적인 만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만남은 일견 제법 잘 갖춘 것 같아도 실은 그 예수님을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정성조차도 다 빠뜨리게 됩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생활 같은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그저 손님 발 씻을 물 내어 주는 정도의 기본자세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조차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인들일수록 교회생활, 예배생활, 신앙생활을 통하여 날마다 예수님 더 사랑하는 마음은 자라나지 못하고 그 대신 남의 잘못을 더 잘 판단하고 남의 죄 비판만 더 잘하는, '바리새인 시몬'의 전공과목에만 익숙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 오늘도 그저 겉사람만 약간 차려입고 당신을 만나겠다고 교회에 오는 '참석자'들을 향하여 이처럼 깨우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에 형식 대신에 감격을, 예의보다는 진실을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 용서함 받는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구원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한 여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37절로 38절에 기록하기를 "37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각각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동일한 사건으로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자기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함으로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누가복음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선 이 본문의 여인은 그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수식어는 그저 "죄인"이라는 단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참 어떤 사람이 남에게 불리는 방법치고는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자기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하고 그저 "죄인인 한 여자"로 알려지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가 창녀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아예 공인되어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날마다 남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바리새인 시몬과 마찬가지로, 이 여인을 부를 때 아무개 하고 이름을 들먹일 것 없이 그저 '그 창녀,' 혹은 '그 죄 많은 여자'라고 하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과 함께 식사하고 계시는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어느 집에서 잔치를 하면 지나가는 사람도 아무나 들어가서 얻어먹고 갈 수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쩌면 이 시몬 집의 그날 저녁 만찬도 그런 분위기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시몬으로서는 결코 반길 리 없었고 다른 손님들 역시 마찬가지의 기분이었을 것을 모를 리 없는 이 여인이 그 잔치 자리에 들어온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든지 아니면 먼발치에서나마 예수님을 보면서 그 말씀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설교 말씀에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교제해 주신다는 소문도 미리 듣고 있었을 가망성도 높습니다.

  하여튼 이 여인은 자기 동네의 이웃 사람들이나 시몬 같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만은 죄인인 자기도 따뜻이 맞아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찾아왔을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막상 그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갖 설움과 회한이 교차되면서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처음부터 준비해서 가져왔던 향유를 그 발에 부어 드리는, 그야말로 그녀의 최고의 정성과 순수한 겸손과 뜨거운 사랑이 다 어우러진 마음과 자세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시몬을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거나 괘씸한 행동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44절부터 50절에 기록하기를 "44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돌아보시면서 시몬에게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시몬은 그 여인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그녀를 보면서 오직 죄로 가득 찬 그녀의 잘못과 더러운 것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도무지 자기 집안에나 특히 예수님과 식사를 나누는 이런 점잖은 자리에는 결코 끼어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밖에는 아무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달리 그 여인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불능의 최악의 죄인으로만 보였지만, 우리 예수님의 눈에는 그런 까닭에 더 큰 용서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빚이 더 많은 죄인'인 까닭에 '주님을 더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므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선포하시면서 또한 그 여인에게도 친히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죄용서와 구원을 선언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의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녀는 지금까지는 '시몬' 같은 사람들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다 그녀를 죄인이라고 멸시하며 창녀라고 욕만 해대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최악의 인간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만 매일같이 대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의 죄를 전혀 따지지 않는, 실로 이상한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오백 데나리온' 정도가 아니라 자기 평생을 다 바쳐도 못다 갚을 그 많고 많은 죄를, 단 한 조목도 정죄하기는커녕 언급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순식간에 몽땅 다 탕감해 주시고 완전사죄의 선언을 해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그렇게 만나게 됨으로써 그 여인이 체험하게 된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적어도 그 시몬의 잔치 자리에서는 그녀 한 사람 외에 다른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를 날마다 남들로부터 비교당하고 지적당하고 때로는 멸시까지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부모로부터는 왜 이리 불효한 자식이냐고 야단맞습니다.
  자식으로부터는 엄하기만 한 아버지, 이해심 없는 어머니라고 불평을 듣습니다.
  왜 이다지도 지지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냐고, 왜 이리 답답하고 짜증나는 아내냐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배우자라는 비난을 매일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몬'들도 우리를 가리켜 당신 같은 사람이 어찌 예수 믿는 신자냐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 모양으로 살면서 어찌 집사니 장로니 할 수 있느냐고, 그런 꼴로 어찌 목사가 되었느냐고 코웃음 치는 소리를 날마다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들로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사실 대꾸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 비난과 조소의 말들이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내가 정말 약하고 못난 '죄인인 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싸기는 하지만, 날마다 그런 말만 듣고 사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 이름 석 자로 그냥 불러 주는 대신, 내가 얼마나 잘못된 인간인지를 날마다 꼬집어내어 주는 사람들 틈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욕을 먹기에 싼 일들을 저지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죄인'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나아와도,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마치 죄인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취급해주시는 유일무이한 분이신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남들로부터 듣는 비판, 멸시, 정죄의 소리를 당연히 우리에게 해주셔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주님은 단 한 마디도 따지시거나 꾸중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는 사죄의 선언만 해주시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재판장이시며 고맙기 짝이 없는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어찌 감사가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감격의 눈물이, 기쁨의 찬송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주님 더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처럼 놀라운 사죄의 기쁨을 만끽하고 그 구원의 은총에 감사함으로써 그 주님과 뜨겁고도 진한 인격적인 만남을 늘 체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런 감동스러운 만남이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하는 의문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라는 복음을 들으면서도, '글쎄, 예수님이 죄 용서해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속으로 멀뚱한 생각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와 꼭 같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교회생활을 그저 격식과 예의만 가지고, 혹은 거기에 가식까지 곁들여서 하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감격이 뜨겁게 타오르면서 절로 기쁨과 감사가 철철 넘치는 가운데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일 낮예배에 그저 의식으로만 참석하고 돌아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예배의 순서 순서를 통하여 회개의 눈물을 바치고 감사의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돌아가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꼭 같은 잔치자리에 들어온 사람 같지만, 그저 겉으로만 점잖고 격식을 차릴 뿐 실제로는 주님과 눈도 제대로 한번 마주치지 않고 돌아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 '죄인인 한 여자'처럼 정말 주님과 일대일의 영적인 접촉(touch)을 하게 되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예배시간에까지 나아와서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헛수고일 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남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었더니 더 건강하게 되어서, 더 돈 많이 벌게 되어서, 자식 잘 되어서, 그 때문에 더 주님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만이 더욱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예의와 격식만으로 신앙생활하면서 남의 죄나 판단하는 '바리새인 시몬'이 아니라, 오직 '나의 많은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된 이 은혜 때문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