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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의 공동체 (마 26: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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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한국교회들에서 오늘은 성찬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성찬식은 일년에 몇 번 특별한 절기에 갖는 성례식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우는 그들의 모임의 이유 그 자체가 성찬식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의 하나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다”는 것은 곧 “성찬을 위해 모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들 가운데 교회를 출석한 세월이 어느 정도  경과한 성도들이라면, 성찬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떡을 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의 피흘리심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장면에서 복음서의 기자는 네 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가지사 2)축복하시고 3)떼어 4)주셨다는 아주 의미심장한 동사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영성작가 헨리 나우엔은 이 네 개의 동사를 근거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1)선택받은 자 2)축복받은 자 3)상처받은 자 4)나누어주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찬식은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자리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성찬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찬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우리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1.우리는 선택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성찬용으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류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으로 창세 전부터 선택되셨습니다.
그런데 엡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며 전적인 그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사단이 하는 가장 파괴적인 일은 우리의 자아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아무도 우리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는 자는 없다”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단의 음성을 진리로 믿은 사람들의 현저한 특성 중의 하나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조시 맥도웰(Josh Mcdowell)목사가 비행기를 탔는데, 여승무원이 장미를 들고 웃고 있어서 “축하합니다. 애인에게 받으셨나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녀는 “아니에요. 제가 저 자신을 위하여 샀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여승무원이 측은해 보여서 “혹시 오늘이 생일이십니까?”라고 다시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닙니다. 제가 살아있고, 여기에 존재하고, 오늘도 이 비행기내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을 만나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선택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여 나 자신을 축하하고 싶었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선택받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한송이 장미를 사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받아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2.우리는 축복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가지신 후 바로 그 다음에 하신 일은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창1: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축복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따라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아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먼저 축복합니다.
아이의 생일행사의 최고 절정은 축복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성인식의 절정도 랍비와 부모, 이웃들이 함께 모여 어른이 되는 아이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 할 때도 축복하고, 여행을 떠날 때에도 축복하고, 전쟁터에 나갈 때에도 축복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신의 인생이 다했다고 느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불러 유언과 같은 마지막 축복을 남깁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는 축복 속에 태어났으며, 축복을 누리고 살다가 축복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인생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에게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간 나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요10:10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훔치고 우리를 멸망시키는 도적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단 마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저주하고 싶을 때, 인생이 저주라고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 안에서 저주의 영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악한 영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축복하고, 여러분의 배우자를 축복하고, 자녀들을 축복하고, 이웃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결코 여러분은 이웃을 파괴하고 저주하는 사단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축복의 도구가 되십시오.
예수의 영은 축복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말로 축복하십시오. 기도로 축복하십시오. 미소로 축복하십시오.
우리 기독교 문화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당신은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 받은 자요, 축복을 받아야 할 인생인 것입니다.

3.우리는 깨어져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은 선택되어졌고, 축복 받은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축복하신 떡을 취하신 예수는 이제 그 떡을 깨트리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떡을 떼며”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예수께서 떡을 깨트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깨트림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마지막 단계인 “나누는 자”가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트려지지 않으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사사시대 기드온의 항아리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미디안의 적들과 싸울 때, 그는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항아리 안에 횃불들을 숨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간에 항아리를 깨트리고 횃불들을 들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항아리가 깨어짐으로 횃불이 드러나 빛을 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리아의 옥합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리자 순전한 나드 향이 흘러나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온 집안을 그 향기로 가득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항아리가 깨어져야만 했었던 것이고, 마리아의 옥합이 깨트려 져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깨트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헨리 나우엔은 이 단계의 우리를 가르쳐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깨트리실 때, 우리에게는 상처가 생기지만 그 상처는 반드시 필요한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깨트림의 경험을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깨트림은 아픔이요, 고난이요,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깨트림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트려져야 빛이 흘러나오고 향기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의 상처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이웃의 상처를 만져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상처는 십자가였습니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가시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로 오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깨어지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십자가도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고, 피를 흘려야 하고, 찢어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4.우리는 나누어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성찬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신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누어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떡과 잔을 나누어주실 때,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의 몸, 곧 그의 생명을 먹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요6:53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이 이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이야말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누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는 사단이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만이 아니라 미소로, 관심으로, 격려로, 부담이 없는 선물을 나누는 우리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인기 절정의 여배우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월드 비전의 홍보대사로 지난 10년 이상 소말리아, 인도, 르완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촌을 누비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 김혜자 권사님은 그녀의 자서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이며, 이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그 어떤 전쟁과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책의 첫 장은 오드리 헵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열려집니다.
“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라/ 균형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걸으라/ 나이를 먹어가며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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