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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맹세한 그 땅을 얻게 하리라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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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한 세대가 가면 한 세대가 오는 것이 역사의 순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한 탁월한 지도자 모세를 뒤로하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맞이합니다. 흔히 탁월한 지도자를 이어 리더십을 계승한 차세대 리더를 향해 ‘잘해 봐야 본전’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어쩌면 여호수아의 마음은 매우 당황스럽고 깊은 고독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성경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였으며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을 뿐만 아니라 속박과 노예의 땅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마치 친구가 서로 교제하듯이 깊은 사귐을 가졌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뒷모습을 모세에게 공개할 정도로 하나님과 모세와의 사이는 허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는 기적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적을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 내었습니다. 40년 가까이  모세를 수종들면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모세를 사랑하며 모세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해 오셨는가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인정할 정도의 모세의 성품, 그리고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대드는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중보 기도하는 그의 깊은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탁월한 지도자 모세를 뒤로 하고 차기 지도자로 선출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절체절명의 사명 앞에 놓여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가나안 정탐 이후 가데스바네아에서 한 보고에 잘 나타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보고를 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모의 리더십과 최고 책임자의 위치는 엄연히 다른 법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목사 시절에는 담임목사님의 고충을 잘 몰랐다. 그런데 담임이 되고 나니까 수십 배의 책임감을 느낀다. 어깨가 무겁다는 말을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이해하게 되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일어나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면을 보아도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했던,  어린이로부터 어른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요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하는 가나안땅 백성은 이미 천연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그야말로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도시 국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 머무르고 있는 광야에서 그냥 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나안 침공은 무리였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전쟁이며 해서는 안 되는 전쟁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전쟁의 주관자는 나다. 전쟁을 시킨 자도 나요,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 자도 나다. 내가 명령한 것이다.” 즉 이 전쟁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치러야 하는 전쟁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놓여 있는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닥쳐오는 수많은 일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지 막막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이 시간을 주었고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전쟁에서 이기게 할 것이다.”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전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싸워 볼 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해봐라. 내가 도와주겠다”라고 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시켰고 내가 동행할 것이며 내가 너로 하여금 얻게 하겠다”고 다짐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자세히 보아야 할 몇 가지 표현들이 나옵니다.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가라.”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모세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서 데리고 가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당시 생존해 있던 백성은 다 광야에서 죽은 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려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신세대입니다. 하나님이 신세대를 좋아해서 그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조치가 내려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는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거민들은 성을 쌓고 집을 짓고 사는데 매우 장대하여 거기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가나안 땅을 모르고 가라고 그랬겠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없어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너희들은 가나안 땅에 절대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모세는 툭 하면 변덕을 부리고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화가 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반석을 향하여 명하지 않고 대신에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씩이나 내리쳤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분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그의 잘못된 태도를 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고 그를 불러 가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었다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임무가 끝난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시지, 약속을 바꾸지는 않으십니다. 모세 아닌 여호수아를 사용해서라도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에 대한 약속도 분명히 지키실 뿐만 아니라 복에 대한 약속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내가 너희에게 줄 땅이다.” 2절을 보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문구를 현재 진행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고 있는 땅”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참 이상합니다. 2절에서는 “줄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3절에서는 “이미 주었다”고 하십니다. 이 두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수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헷갈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얻도록 하십니다. 이 원리를 아십니까? 성경에서는 이 원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고 칭해 주심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날마다 거룩해져 갑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를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주고 계신다.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와 같은 방법을 쓰십니다. 약속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의 완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연단시키시고 그 구원을 자꾸만 체험하면서 이루어 가도록 만드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고 계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계속하여 체험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요소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들은 그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 오늘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인 나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내가 왜 가나안 땅을 공격해야 하고, 저들과 싸워야 하는지 모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진해야 할 이유를 모릅니다. 삶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목표점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박진감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허송세월 하면서 대강대강 살아 갈 뿐입니다. 약속을 굳게 붙드는 사람은 그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데 동참하고 그 이루어 가는 약속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요소는 일어나 건너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만 하면 완성품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약속을 주셨으면 그것의 성취를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고 일어나 건너가서 싸우게 하십니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싸울 때 함께 하시고 승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며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어나 건너가서 싸우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쿰’입니다.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고 하니 오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집으로 가셨습니다.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지나 아이에게로 가신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달리다쿰” 곧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이는 갑자기 일어나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막5:21-43) 하나님께 헌신하며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었을 때에,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간 베드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쿰, 다비다!”이 일어나라는 명령에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행9:36-43)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앞에 일어날 수많은 일들에 위축되어 겁을 먹고 앉아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쿰,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일어나라!” 우리는 급속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태백 사오정도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언제 누가 어떻게 될지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무한 경쟁 시대를 맞아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일어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 바랍니다. 일어나서 요단강을 건너는 역사를 이루기 바랍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서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셨을 때, 요단강은 물이 붇다 못해 범람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건너라”고 하셨을 땐 분명 안전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천연요새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지역인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셨을 때는 그만큼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의 대적을 미리 제거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나가 싸울 때에 가나안 백성이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기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너희들의 손을 들어준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을 믿지만 너무 소극적이고 소심한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환경이 무서워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일어서지도 않으며, 요단강을 건너지도 않고 전쟁도 하지 않으려 하는 그와 같은 소심증과 불안, 염려, 게으름을 성령께서 내쫓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께서“쿰!” “일어나라”라고 명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표현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고 그분이 친히 이 전쟁을 주관하셔도 마귀는 우리 마음에 계속해서 의심과 시험을 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상황을 잘 아심으로 이 짧은 본문에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흔들리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우왕좌왕 하지 않도록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전쟁이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일 테고 우리는 하나님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면 되지, 마음을 강하게 하고 굳세게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왜 수고스럽게 세 번씩이나 말씀하실까? 하나님의 전쟁이라면서, 알아서 해 주실 거면서 무슨 걱정을 그리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주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나가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를 사용하시고 그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유혹과 갈등, 불안과 소심, 염려, 소극적인 자세를 물리치고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은 강퍅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을 딱딱하게 굳어지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이 말씀만큼 쉬운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성경만 보면 어떻게 그리 잠이 오는지 도무지 견딜 수 없고 보기는 봐야겠는데 전혀 진도가 안 나갑니다. 매일 작심하고 보는 것이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은 진도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또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서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말씀에 은혜 받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이해가 되건 안되건 기도하면서 열심히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읽는 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성경은 내 머리 내 지식으로 해석되는 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감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령의 감동이 오면 그때 읽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오늘도 제가 하나님 말씀을 봅니다. 잘 깨닫게 하시고 저에게 감동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흔들리는 내 마음을 강하게 붙들어 줄 뿐만 아니라 어두워졌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인생길의 등이요 내 인생길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붙들고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여호수아는 이 전쟁을 사적인 전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전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국가와 국가가 싸우는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전(聖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셨고 친히 싸우신다고 말씀하셨기에 이 전쟁을 성전으로 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함께 해주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고 풍성히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 순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싸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전쟁인가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믿음의 태도로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성전(聖戰)을 치르는 사람으로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가지고 나가 싸우는 자에게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의 앞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그의 일생동안 전쟁을 치르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가난과 싸웠습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그의 인생은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 어머니가 그에게 주신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 있게 배웠습니다. 훗날 고백하기를 “나는 수많은 책을 보았고 위인들의 글을 읽었지만 성경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참 진리로 인도하는 능력 있는 말씀을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지를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인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지 알게 해 줍니다.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전쟁을 치렀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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