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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찬양 감사와 기도 감사 (단 2:23, 단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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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에 감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약은 그 처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감초가 들어가기 마련인지라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만일 감초가 들어 있지 않는 한약이라면 그 쓰디쓴 약을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초에 해당되는 것을 찾는다면 바로 '감사'일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드려질 수 없을 것이며, 감사가 빠진 헌금이란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을 것이며, 감사가 동반되지 않은 봉사는 자신에게 그저 고역밖에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가 찬송 부를 때나 기도드릴 때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비단 감사절 때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더라도 감사는 성도가 부르는 찬송의 대표적인 제목 중에 하나이며, 또한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림,' '죄의 고백,' '소원의 간구'와 더불어 기도의 4대 요소 중에 하나인 것도 상식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다니엘은 바로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모범을 보여 준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서 전 장을 통하여 '다니엘이 감사했다'는 표현이 꼭 두 번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 구절들입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린 때야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 두 장면만 기록된 것은 이 두 번의 감사들은 결코 범상치 않은, 실로 돋보이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2006년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이 특별한 감사의 날로 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성도의 감사생활이란 것이 감사절을 한번 지키고 한번 특별감사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감사는 모든 신앙생활 요소의 구석구석에서 날마다 배어 나와야 함이 지극히 당연한데, 오늘 주신 말씀에 기록된 다니엘의 감사를 통하여 이 점을 다시 한 번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기쁜 일이 있을 때 찬송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장 19절로 23절에 "19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22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저 유명한 '큰 신상'의 꿈을 꾸었을 때 생긴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깨어난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꾸었던 꿈의 뜻은커녕 그 꿈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되자 완전히 좌불안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벨론 사람들은 자기가 꾼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바벨론 고문서의 한 구절에 '만일 사람이 자기가 본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고 있는 자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망각에 스스로 깊은 불안 증세에 빠진 느부갓네살은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미신을 행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시대에서는 사실 최고의 브레인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갈대아 술사들은 꿈 해몽이나 점성술 따위에 있어서는 당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자기의 꾼 꿈이 무엇이며 그 뜻이 무엇인지를 동시에 말해 달라고 요구하자, 그 박사들은 당연히 난감해졌습니다.
  꿈만 알려 주면 그 뜻이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슨 '꿈 해몽 교범' 따위의 책을 이용해서 당장 해석하겠는데, 왕이 아예 그 꿈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그들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석학들의 그런 무능력에 더욱 화가 치민 느부갓네살은 급기야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듣게 된 다니엘은 곧 왕을 찾아가서 일정한 기한만 허락해주시면 그 꿈과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약속하여 약간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그 겨우 얻게 된 시간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기도하는데 다 썼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어 그 "은밀한 것"을 밤에 이상을 통하여 다니엘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그 해석을 동시에 알게 된 다니엘이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드린 장면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처하고 있던 때는 바로 자기 민족이 이방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 중 살아남은 일부는 포로로 잡혀 와서 그야말로 바벨론 왕의 기침 소리 하나, 손가락 끝 놀림 하나에 좌우되고 있던, 실로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때에 느부갓네살을 통하여 '큰 신상의 꿈'을 꾸게 하신 것은, 느부갓네살에게보다는 먼저 다니엘에게 어떤 역사적 소망을 주게 하시려는 데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기 민족이 처한 시대와 위치는 최악의 형편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아무 두려워할 것 없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바로 그 '신상의 꿈' 즉 세상의 강대국들이 장차 메시아 왕국에 의하여 무너지게 될 꿈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또한 그와 같은 지혜를 '계시를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며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으신" 분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께 구한 바를 알게 하심"을 인하여 찬양했던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 왕은 그와 정반대의 처지에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소위 현자와 지자들을 총동원해도 그가 알고 싶어 안달하는 것을 도무지 알 길이 없자 결국 거의 히스테리 증세까지 보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는 그 은밀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알려졌습니다.
  온 세상이 몰라서 당황하는 일을 혼자서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후련하고 통쾌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니 그처럼 역사의 '깊고 은밀한 일'을 자기에게 알려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하며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은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믿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자기에게도 변함없는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찬송했습니다.
  과거 "열조의 하나님"께서 이제 오늘날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현재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물론 열조, 즉 자기의 선조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 맺으신 언약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행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열조의 신앙 행적을 통해 배웠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다니엘 자신에게도 직접 역사해주심을 통하여, 다니엘은 그 하나님이 비단 열조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 되심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짜릿한 체험을 하게 된 다니엘이었으니 그의 입에서는 절로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니엘의 심령에 넘쳐흘렀던 그런 기쁨이 오늘 우리에게도 꼭 같은 감사 찬양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세상 불신자들은 자기네들의 모르는 일들 때문에 얼마나 그 마음이 고민하며 답답해하고 있습니까?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의 머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느부갓네살과 같은 조바심과 신경질을 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박사 학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이 무지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소멸되는 소위 '열적 종말'을 예언한 과학자는 스스로 비관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주나 인류의 장래는 고사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일 일을 몰라 발버둥 치면서 어제 밤에 꾼 개꿈까지도 무슨 큰 뜻이 있는 것인 양 해몽해보려 하는 유치함을 매일 같이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더 이상 그와 같은 무지의 번민과 고뇌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만물과 인류 역사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통치되며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현실 가운데서 쫓기며 궁핍하며 어려운 중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전 생명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인도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저명한 학자들을 몽땅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도무지 알 길 없었던 실로 깊고도 은밀한 지혜와 지식을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통하여 완전히 통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되심을 순간순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깨닫게 되는 때마다 성도에게는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찬송이 그칠 새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좀 좋은 일 생기면 그저 얼싸 좋다 하고 자화자찬이나 하겠지만, 성도는 이처럼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기쁜 생명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해주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이 큰 기쁨을 인하여 항상 찬송하며 감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기도로써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6장 5절부터 10절에 "5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6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7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바사 제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다니엘은 유능한 중신으로 다리오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돋보이는 업무 수행 능력으로 인하여 다니엘의 직위는 서열 제1위의 총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니엘의 출세를 시기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은 그를 모함하여 끌어내릴 궁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적어도 공인으로서의 다니엘로부터는 "아무 틈, 아무 허물" 한 가지도 고소할 거리를 찾지 못한 그들은, 결국 다니엘이 하나님 섬기는 신자라는 사실, 여기에서 무언가 트집거리를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계책은 실로 완전무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할 것을 다리오에게 건의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다리오 자신을 신의 위치로 승격시켜 주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므로, 다리오는 그런 제의의 이면에 자기의 총애하는 신하 다니엘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 법령을 승인해버렸습니다.

  일단 그 조서에 정식으로 어인이 찍히면 그야말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가 되며 왕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는 고치지 못하게" 되는, 실로 개정 불가의 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 사람들의 법 권위에 대한 의식이 어느 정도였는고 하면, 당시 다리우스 3세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직후에 그 사람의 무죄가 밝혀지고 왕 자신도 스스로의 언도에 대해 후회하며 자기 잘못을 인정했지만 결국 사형 그 자체는 집행되고 말았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사 왕의 권위로 한번 언도된 것은 다시는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니엘의 대적들이 보기에는 그의 운명은 바사 왕이라 할지라도 구해줄 길이 없는, 실로 독 안에 든 쥐의 꼴처럼 보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다니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행동을 태연하게 반복했습니다.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십사"고 간구했던 바를 따라 행하던 기도의 관습이었습니다. 비록 다니엘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기는 했지만 그 무너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쪽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하더라도 창문을 닫아 놓고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니엘은 대적들이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보란 듯이 창을 열어젖혀 놓고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는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삼 세끼의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예 빼놓을 수 없는 습관으로 배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위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다 하더라도 기도만큼은 그저 자동적으로 정한 시간에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마치 생리작용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그런 와중에 '감사'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의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아까 2장의 경우에서야 감사드려 마땅할 이유들이 충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특별계시를 내려 주셔서 그 은밀한 것을 깨닫게 하셨고, 자기와 자기 친구들의 목숨도 구하게 되었으니 누가 보아도 감사드림이 마땅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정반대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피할 길 없는 치밀한, 완전무결한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기도드렸다는 죄목 하나로 억울하게 죽게 될 것이 뻔한 시점이었습니다.
  기도를 그저 한 달만 거르든지 아니면 최소한 창문만이라도 닫고 하면 피할 수 있는 환난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꼭 같이 기도드리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하나님 앞에서 보통 기특한 일이 아닌데, 다니엘은 거기에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다니엘은 무슨 제목으로, 어떤 이유로 감사를 드렸던 것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같으면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만한 어떤 이유가 생각나겠습니까?
  성경은 다니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감사했는지는 말씀해주지 않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니엘의 그 감사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를 억지로 짐작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감사드릴만한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있었고 그 어떤 구체적인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우리교회가 여의도에 있을 때 다른 교회의 어느 장로님께서 무슨 간증집회의 강사로 오셨을 때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공장을 하나 운영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그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장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불은 공장 전체에 다 붙어서 소방대도 속수무책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세워놓았고 자신의 전 인생이 다 걸려 있던 기업이 지금 자기 눈앞에서 문자 그대로 한 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그 장로님의 입에서 그 순간에 무슨 소리가 터져 나왔는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였습니다.
  자기 전 재산이 불타 없어지는 광경 앞에서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그 입에서는 본인조차도 왠지 모르게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외마디 외침이, 그것도 세 번 연이어서 나왔습니다.
  불신자가 볼 때에는 완전히 미치고 실성한 사람의 소리로만 들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니 사실 신자가 곁에서 들어도 도대체 왜 감사한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물론 장로님 본인 역시 그 이유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신자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터지든지 간에 일단 감사는 드려야 할 것 같다는 영적 본능이 그 옛날 다니엘과 꼭 같이 이 장로님의 심령 속에서도 작동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장로님께서 그 화재의 손실을 딛고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 큰 기업의 축복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간증까지 하시게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기쁜 일만 우리의 감사 제목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슬픈 일, 괴로운 일, 피할 길 없어 보이는 완전한 절망이 앞에 닥쳐도 그것을 통하여서조차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발휘하는 신기한 성품인 것입니다.
  죽게 된 것이 뻔한 형편에서 도대체 어떻게, 무슨 제목으로 감사드릴 수 있느냐고 제게 묻고 싶으십니까?
  저는 그 답은 일단 미루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찾으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항상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며 '늘 행하던 대로'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제목이 끊어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 감사드릴 구체적인 이유가 정 생각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냥 감사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에 생각은 안 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을 테니까 일단 '무조건 감사합니다.'하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감사기도를 들으시고 그냥 가만히 계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도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기도드릴 때마다 감사를 빼먹지 않는 것 또한 습관이 되게 함으로써, 비록 그 기도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드려지게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부터 먼저 드리던 순서를 결코 바꾸거나 빼먹지 아니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찬송하는 성도와 기도하는 성도는 이처럼 감사가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가 없고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쁜 일 생기면 찬송이 나오고 슬픈 일 있으면 기도하게 되는 것이 성도에게는 마치 조건반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처럼 찬송하고 기도하면 자연히 감사생활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되어 있는 것도 성도에게는 마치 자동적인 인과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문둥병자'들처럼 기쁠 때조차 감사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일수록 조금만 잘못되어도 원망은 아주 잘하기 마련입니다.
  잘 되면 제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하는 버릇을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행하는, 아주 못된 교인들입니다.
  그처럼 좋은 일 있을 때조차 감사찬송할 줄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또한 궂은 일 있을 때라 해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더욱 고민과 근심에 빠질 일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조차도 성도의 기도에는 제일 먼저 감사부터 나와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범사'란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 역시 포함되는 것이니, 어렵고 괴로울 때의 기도에도 역시 감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그야말로 '신앙생활의 감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성도에게는 기쁜 감사 찬송을 불러야 할 이유가 끊어질 수가 없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성도를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오늘 이 하루뿐 아니라 일년 365일을 날마다 감사드리며 그 감사제물의 응답으로 내려주시는 힘과 은혜를 통하여 매사에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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