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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주님의 제자가 되라! (행 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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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지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본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가서 하소연을 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한마디로 책망을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그리고는 귀신들린 아들에게 있는 귀신을 내어쫓으신 후에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잡아 일으키시면 손에 잡힌 사람은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잡아 일으키시면 그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 어떤 병으로 고생하거나 실의 빠져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다 잃어버렸어도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 일으켜 주신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시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손을 의지하십시오.  세상 사람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내 손을 붙잡아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여, 연약한 나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 주님의 전에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영으로 임재하셔서 은혜의 손을 내미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의 손은 은혜의 손입니다.  구원의 손입니다.  능력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는 자, 그는 심령의 깊은 곳에서 구원의 감격이 강물같이 넘쳐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는 자, 그 심령에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는 자, 그는 모든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리석게도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을 뿌리치거나 외면함으로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역사의 주역이 되는 하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진흙이라도 장인의 손에 닿으면 그 진흙이 보물이 됩니다.  아궁이에 던지워질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이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되기도 합니다.  쓰레기통에 던지워질 보잘 것 없는 종이 조각이 값있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 손을 대었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값이 달라집니다.

보십시오.  1불도 안 되는 젓가락이 미국의 대통령이 사용했다고 해서 10,000불에 경매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위대한 시인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시가 떠올랐습니다.  마땅히 적을만한 종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휴지에다 시를 적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 휴지는 6,000불에 경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들이 위대한 사람의 손에 닿음으로써 값있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누구의 손에 잡혔느냐 하는 것이 그 가치를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매 한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배를 채우기에도 부족한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주님의 손이 닿는 순간 5,000명을 먹이고도 남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89편 13절에서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아직도 나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고 발버둥치지 말고 능력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손에 붙잡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운 역사를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때에 주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위대한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어렸을 때 옆집 병아리가 예쁘고 귀여워서 손으로 잡았습니다.  갓 깨어난 병아리는 정말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손 안에 있는 병아리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병아리를 손으로 더 꼭 쥐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귀여워서였고, 좋아서였지만 잘못하여 병아리를 죽였습니다.  그날 저도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손은 병아리를 쥐던 어리석은 손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고 은혜로 지키시는 보호의 손길입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세우시는 능력의 손입니다.  모세를 보호하시면서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언제나 그의 손으로 덮어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손에 잡힌 자는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잡힌 자는 다시 힘을 얻어 위대하고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저앉았던 곳에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새 힘을 얻어 크고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손길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9장 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십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를 미워하지만, 그러나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회개하고 전능하신 손길에 붙잡혀 쓰임 받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철학자 죠지 와싱톤 카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사역에 성공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신앙생활에서 성공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교회 생활에서도 성공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형통한 길을 걸을 때 뿐만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행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높은 자리에서도 행복하고 낮은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져도 행복하고 잃고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행복하고 병들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나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항상 불평하라, 범사에 원망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주님의 진정한 제자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행복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때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평생 복음 전도를 위해 살았던 전도자 사도 바울의 자기 행복 선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울은 참으로 행복했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의 이 행복선언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아주 편안한 상황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넉넉한 환경에서 살면서 행복을 노래하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면서 행복을 노래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상실과 고통 속에서 행복을 노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손목에 쇠고랑을 차고 있으면서 행복에 겨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이 아닌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자기 내적인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재판관은 일개 하급 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기도를 한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해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바울은 포박된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아주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당신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오면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가령 모욕을 당했을 때가 그렇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는 주림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두가 자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아주 당당하게 외칩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당신들도 나처럼 되라"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고 멸시하는 그들을 향해서 바울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은 자임을 시위합니다.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은 행복자가 되시오"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외치는 자기 행복 선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행복하게 했을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구원받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9절에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말은 나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요 천직인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서 죽이려고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의 말 그대로 악랄한 박해자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악랄하게 박해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제 생각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짐작하기로는 바울의 내면에는 깊은 쓴뿌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봅니다.  먼저 그는 육체적으로 질병이 많았던 나약한 쓴뿌리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눈의 안질 때문에 심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질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외모에 있어서도 그는 쓴뿌리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전해오는 바울의 외모는 키가 작고 코는 날카롭고 뾰족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육체적인 쓴뿌리가 성격을 난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후에 예수를 만나서 제자가 되었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이 난폭한 성격, 내지는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가로 인한 바나바와의 다툼입니다.  이러한 쓴뿌리들이 바울로 하여금 더 악랄하게 그리스도인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게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는 일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고난은 그의 행복이었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당당하게 행복을 선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십시오.  총독이여, 당신도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십시오.  그때 당신도 진정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이 외침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외침이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영원한 하늘 백성이 되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시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초대 교회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유교 집안에 어느 동자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시퍼런 칼 한 자루를 아이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놈아!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교회를 나가.  예수를 믿어!  내가 죽어서 우리 조상님들의 얼굴을 어떻게 면목없어 뵐 수 있겠느냐?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예수를 안 믿고 교회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면 너를 우리 집안에 소중한 종손으로 취급하고 내가 인정해 주겠지만, 네가 끝까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면 이 칼로 너를 죽이고 나도 부끄러워서 자결을 할 수밖에 없다.  대답해라."



입술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조용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예수 안 믿고는 못살아요.  할아버지도 예수 믿으셔야 되요.  할아버지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요.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으셔야 되요.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가요."

할아버지 얼굴이 상기되더니 아이의 멱살을 움켜쥐면서 할아버지가 묻습니다.
"이 못돼 먹은 자식.  다시 한번 묻는다.  이 할아버지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단 말이냐?"
"네. 할아버지.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요."
손자의 이 말에 사정없이 뺨을 내리치더니 "나쁜 놈의 자식.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냐?  얘들아! 우리 다같이 이번 주일날 교회 간다.  예수 믿는다."  그래서 초대교회 훌륭한 신앙인 집안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뺨을 맞아도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쳐야 될 말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가요.  예수 믿어야 살아요."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모두 다 우리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이 세상을 송두리째 다 잃어도 예수를 만나고 구원을 얻었으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이라는 말은 힘의 근원을 알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돈이 힘이라고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도 합니다.  또 권력이 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과 그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선 사도 바울,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통념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왕을 침묵하게 했던 이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그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댔습니다.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냄새를 묻히듯이 사도 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핍박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품어냈습니다.

왕관이 없으면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았던 아그립바 왕 앞에서 왕관 없이도 천지에 군림하는 바울의 그 위대한 힘이 무엇일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서도 비단옷에 온갖 보석을 걸친 사람들을 부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감화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면서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다"

저들은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페스트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케하는 염병처럼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렇듯 바울이라는 존재는 멸망 자들에게는 염병같이 무서운 것이었고, 구원 얻은 자녀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힘은 곧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의 권세는 곧 하늘의 권세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그의 권능은 곧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말합니다.
"왕이여, 썩을 땅의 권세가 아닌 다른 권세가 있는 것을 아십시오.  멸망할 세상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힘을 알기를 원하오"

진정한 힘, 진정한 권세, 진정한 부를 알고 가졌기에 우리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패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힘, 영원히 승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죽을 만큼 행복했던 사람, 미칠 만큼 행복했던 사람. 행복한 전도자! 그가 행복한 주님의 제자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하여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구원받은 간증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의 중생 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저들로서는 미쳤다는 이야기를 할만 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같은 이야기가 세속적인 인간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 외에 영혼이 있습니다.  고기나 밥 외에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을 거두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주의 사랑에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성령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사명과 말씀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20대는 사랑에 미치고, 30대는 야망에 미친다고 합니다.  40대는 일에 미치고, 50대는 소유에 미친다고 합니다.  60대는 명예와 고독에 미치고, 70대는 은퇴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 사랑, 자신의 사명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가 진정 행복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보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언양 영신 성도들아, 너희들이 미쳤구나."
이 땅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쏟아져 나올 때에 시대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님이,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구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죤 낙스가 이 교회에서 되살아나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외쳐댔던 에스더의 혼이 오늘 이 민족 가운데 살아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에 미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비전에 미쳐야 행복합니다.  예수 믿고 미쳤다는 이야기를 한번은 들어야 제대로 믿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교회를 섬기며 행복해하는 성도님들을 보면 저도 행복해집니다.  전도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저도 덩달아 행복해 집니다.  헌신하고 수고하고,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 봉사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행복! 그것은 참으로 근사한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생 행복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노예처럼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마십시오.  그까짓 세상살이, 고난과 시험에 행복을 강탈당하고 살지 마십시오.  거기서도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선언을 하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저들에게 믿음의 시위를 하십시오.

"나는 진정 행복한 주님의 제자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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