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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낙심될 때 (창 3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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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 될 때  창세기 39:19-23
한나 스미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
어느 날 사탄이 자기 부하들을 전부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그날의 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악령이 벌떡 일어나 “저는 그에게 죄를 짓는 즐거움과 기쁨을 알려주고 죄를 지으면 많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또 하나의 악령이 일어나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선행의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말해주고 또한 아무런 소득과 재미도 없음을 잘 설명 해 주겠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악령이 “그의 영혼을 낙심과 절망에 빠뜨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짤막한 응답을 듣고 나 서 사탄은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껏 자랑도 하고 또한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하여도 축복은커녕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에 직면하게 되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낙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낙심이 찾아올 때에 그 낙심을 이기는 힘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특별히 흠을 잡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너무 흠 잡을데가 없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의 눈에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두 어머니의 끝없는 긴장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마찰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큰 아버지와 아버지와의 해결하지 못한 오래된 앙금들로 인하여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를 당하게 되는 아버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그리고 그 길에서 친 여동생이 외국인의 손에 겁탈당하여 그들과 전쟁을 벌이며 생긴 끔찍한 도륙의 현장들, 설상가상으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과 결국에는 형제들의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 등 그의 삶은 참으로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수문장의 집에 집사가되어 이제 숨을 좀 돌릴까 할 때에 욕정에 사로잡힌 수문장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된 모함에 그만 철창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하여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어 자유롭지도 못하고, 목에는 무거운 두른 쇠고랑으로 인하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등줄기에서는 고문으로 인하여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상처의 고통은 거칠고 차가운 돌바닥 때문에 한층 더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모함을 받아서 범죄자로 낙인 찍인 마음의 고통과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버려져 있는 외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낙심은 이루말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왜 이리 삶이 고달프고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는가?
예수 믿어도 하나도 소용이 없고, 기도해도 하나 소용이 없더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는 비록 누명을 쓰고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낙심을 이기는 첫 번째 비결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그분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모욕, 어려움 그리고 아픔을 다 보고 계신다.  그분이 손이 모잘라 나에게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계신 분이 아니실 것이다.  그 분이 계획하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고난도 축복도 협력시켜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는 확신과 신뢰로 가득하였기에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처한 환경을 자신의 꿈을 이루는 시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버나드 뱅글리라는 사람이 쓴 “날마다 예수님 가까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멸망시키겠습니까?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덤비는 성도를 하나님은 결코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급기서에 보면, 애급을 탈출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하여 출발한 사람이 장정만 60만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세대는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모두 광야에서 멸망당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였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함을 통해서, 쓴물을 달게 함을 통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오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난날 종살이 하던 것이 더 좋았노라고, 이러다가 광야에서 죽겠다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힙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이라는 정상에 올라가는데, 정상을 조금 남겨두고는 그곳에 시신이 여러 명 쓰려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이민의 삶속에서 찾아오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낙심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도우시는 손을 펴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뉴톤이 1775년 런던에서 누이의 병으로 고생하며 낙심한 어떤 한 형제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가 있습니다.  그는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이 설교했던 한 경험담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준비하고 강단에 섰는데, 강단에 섰을 때에 도무지 그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 서서 기도하면서,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설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딤후1:12절입니다.  흔히 디모데서는 옥중서신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이 옥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옥중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로써,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바울이 비록 자신은 감옥이라는 영어의 몸으로 고난 받고 있지만, 지금 받고 있는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고 존 뉴톤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의 생애에 가장 은혜스러운 설교를 하였고, 설교를 하다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그 편지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누이의 병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형제를 향하여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늘 주님께 지혜의 눈을 고정시키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더더욱 새롭게 알아 가십시오.  그분은 참된 주님이십니다. 그분께는 능력과 권위가 있으시며 우리를 향한 동정이 가득하십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으며, 우리 속에 선한 기대와 소망들을 일으키시고 또한 그것들은 신실하게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신뢰 하십시요. 항상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서, 안팎에서 말려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들에 대항하십시오.”고 권면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저희교회 어떤 성도님과 체팅을 했습니다.  그 성도에게 몇 주 전에 책망할 일이 있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통해서 책망을 하고는 마음이 편치 않아 이 메일을 하면서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메일을 하고는 그 후에 연락이 뚝 끊겼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 심하게 책망을 해서 그런가하고 그 성도님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마침 컴터를 열고 다른 것을 하고 있는데, 체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 그 성도님이 뜬금없이 “목사님은 저를 미워하시죠?”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자 갑자기 하나님의 생각이 제 마음에 찡하게 다가오면서, 우리가 손을 놓으면 놓지 하나님은 절대로 손을 놓는 법이 없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그 성도를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놓기 전에 절대 먼저 놓는 법이 없듯이 목사도 그래!”
저는 그 글을 치면서 마음속에 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그 말을 했는데, 그 성도님도 그랬는지, “목사님 눈물이 나려고 해요”라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놓기 전에 절대로 손을 놓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끝부분에, “옥에 갇혔으나, 21절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23절에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의 범사가 형통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어떻게 옥에 갇혔는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꿈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그 어릴 적 아직 부모가 지어준 채색 옷으로 자랑을 할 시기에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그에게 약속하셨는데, 밭에 곡식을 묶는데, 자신으로 보이는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모두 자신의 단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또한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꿈으로 인하여 요셉을 미워하였지만, 그 아비인 야곱은 그 꿈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가장 낮은 곳, 가장 천한 곳에서, 가장 볼품없는 존재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았기에 그는 낙심하지 않고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경의 66권은 모두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 즉 오래된 약속 혹은 성취된 약속 그리고 신약 새로운 약속 혹은 성취된 약속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리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리라.”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게 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현실화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후1: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
그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멘"일 때 이는 그 약속들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는 우리의 의사표시가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앤드류 머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그것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호텔에 가면, 마스터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열쇠는 어느 문이나 열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든 열수 있는 약속이라는 열쇠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고난을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열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약속이라는 열쇠를 받았으니 그 열쇠로 낙심을 이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더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믿음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참으로 그가 행한 일에 비하면 말도 되지 않은 결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0절에 보니까 요셉이 갇힌 옥은 바로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왕의 죄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이라는 시위대장의 죄수이지 왕의 죄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의 죄수가 들어가는 옥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총리대신이 되는 첫걸음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는 그곳에서 왕의 가장 지근거리인 지금으로 말하면 부속실에서 왕의 먹걸이를 감당하는 술을 맡은 자와 떡을 굽는 자를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하므로 관계를 맺게 되고, 후에는 그 유명하다는 애급의 어떤 술사도 해석하지 못한 왕의 뒤숭숭한 꿈을 해몽하여 미래에 닥칠 애굽의 운명을 미리 감지하고 왕에게 알려주므로 국가적인 위기를 막은 공을 인정받아 총리대신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 또한 그랬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의 참으로 눈물 가득한 기도, 그것은 이탈리아로 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어거스틴은 모니카의 만류에도 결국 이탈리아로 갑니다.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큰 낙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하나님은 이탈리아에서 어거스틴을 회심시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머니 중에 한 사람으로 모니카를 뽑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따님 때문에 오셔서 잠깐 저희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시던 어떤 권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을 처음 뵙고 대화를 나눌 때에 참 음악을 했으면 좋았을 목소리를 가졌는데 왜 목사님이 되셨는가 했는데, 설교를 듣고 보니 역시 목사님이 되신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은 음악가가 아니고, 또 제 목소리가 사실 노래 소리보다, 대화의 소리가 더 좋다는 소리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러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붙은 사람은 전부다 음악선생들을 대동해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저의 좌절감과 낙심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목회자의 길,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를 맛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어김없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큰 눈으로, 그리고 주위를 살피면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에 있는가를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열매를 거두리라(갈6:9)”고 하였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 언젠가 때가 이를 것이고 그러면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옛날에 한 작가가 말하기를 “모든 절망은 악마로부터 온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교훈 삼아 깊이 마음에 새겨두고 죄에서 멀리 떠나야 하는 것처럼 낙심에서도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낙심이요.
낙심을 이기십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약속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리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낙심을 이기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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