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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행해야 하는 말씀 (신 3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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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해야 하는 말씀
본문 : 신 30:11-14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출애굽의 전 과정을 요약하면서 세 번 설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세 번째 설교의 끝부분입니다.
모세 오경 전체의  결론 부분,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말씀을 청종하면, 청(聽), 듣고, 종(從),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을 받는지는 본문 바로 앞, 9절과 10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복되게 하시고 자녀들과 생업을 복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둘러서 말하지 않고 직접 읽어 드리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복을 저는 ‘황홀한 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청종해서 이와 같이 황홀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는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11절을 보세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을 보니까 오늘 본문을 독립시켜 “하느님의 계명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으로 읽어 드립니다.
더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11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이 법은 너희로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은 아니다. 12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 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 말라.
13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 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14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 어려운 것 아닙니다.
이 말씀을 어렵다고 하는 분들은 대부분 어떤 분들입니까?
말씀을 읽지 않는 분들입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서 어려운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난해구(難解句)라고 하지요.
며칠 전에 성도 한 분이 성경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이메일로 문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보니까 성경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구절입니다.
그 구절에 대한 해석들을 정리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그 성도가 ‘감사합니다.’ 하고서 ‘역시 어렵네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설명을 들어도 어렵습니다.’라는 뜻이지요.
성경에는 그런 부분들도 있습니다.

또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역사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쉽습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이해하면 신구약성경 전체 66권을 다 이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가 한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 때 한글전용을 강조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보아라. 그렇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으면서 한글로만 되어 있지 않으냐? 그래도 사람들이 다 이해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몇몇 부분을 들어서 ‘성경은 어렵다.’ 하지 마세요.
성경의 잘 이해되는 대부분을 보면서 ‘성경은 쉽다.’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말을 가지고 북한주민들과 의사를 소통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언어가  달라진 것들이 조금 있습니다.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 분은 북한과 언어가 부분적으로 달라진 것을 가지고 ‘아, 북한주민과는 의사소통하기 어렵다.’ 하는 분들입니다.
어렵기는 뭐 어렵습니까?
북한 주민들, 새터민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도 읽으면 이해 안 되는 것 거의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안 읽으면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새터민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데 그 분들, 북한에서 최근에 나온 분들입니다. 저는 새터민들을 상대로 설교할 때 그분들이 친근미를 갖도록, 또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북한에서 쓰는 말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새터민들이 캄보디아를 통해서 많이 들어오는데 캄보디아를 북한에서는 ‘캄보쟈’라고 합니다. 베트남은 ‘웰남’이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제가 이왕 가지고 있는 지식이니까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 같이 북한문제와 관련 있는 사람이나 할 일입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성서신학자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캄보디아, 월남 그래도 잘 알아듣습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제1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제2의 말씀은 설교입니다.
어떤 설교가 명설교입니까?
‘그 목사님은 말씀이 좋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떤 말씀이 좋은 말씀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설교가 명설교이고 모든 말씀이 좋은 말씀이다.’ 입니다.
설교에는 원칙적으로 우열이 없습니다.
모두 나에게 필요해서 하나님이 설교자의 입술에 담아서 오늘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제하고 들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도 또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우열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준 가운데 하나가 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명 설교가라는 소리 듣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저기 명일동에 있는 잘 알려진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데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강의도 그렇습니다. 알아듣기 쉬운 강의가 명 강의입니다.

세상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선 양적으로 어렵습니다. 주일 낮예배 설교원고는 A4 용지로 12매를 써야합니다.
200자 원고지로 80매에서 90매 분량입니다. 적은 분량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에서 논문작성법이라는 과목을 여러 해  강의했는데 이 과목은 시험을 치지 않습니다. 대신 학기말에 형식을 잘 갖춘 100매 분량의 소논문을 작성해서 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우선 100매라는 분량에 놀랍니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 100매를 쓰는 것은 저의 일생일대의 대 사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설교하는 분들은 일생일대의 대 사건을 매주 겪는 셈입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보는 「월간목회」라는 전문지가 있는데 이번 12월 호의 특집이 ‘한국설교의 윤리성을 진단한다’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설교가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설교는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 너무 예화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인기 영합적인 설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기복적 설교인 설교는 안 된다, 현실도피적인 설교는 안 된다, 신비주의적 설교는 안 된다, 윤리적 설교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설교는 안 된다’는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인데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은 그 특집에서 강단에서 욕을 잘하고 천한 말을 많이 쓰던 어느 기도원 원장님의 경우를 들면서 한국교회의 강단을 혼탁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그 기도원은 많은 성도들이 가서 은혜 받았다고 하던 곳입니다. 저도 갔던 곳입니다.

설교가 이렇게 준비하기는 어렵지만 완성된 설교는 어려워서는 안 됩니다.
쉬워야 합니다.
마치 고급 음식이 만드는 사람 쪽에서는 만들기 어려워도 먹는 사람 쪽에서는 맛이 있어야 하고 먹기 편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유와 꿀을 아주 좋은 음식으로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있고, 먹기 쉽고, 완전히 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들, 속회 인도자들, 전도하는 분들, 설교하는 분들, 가르치고 설교할 때 쉽게 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유 같은 설교, 꿀 같은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하도록 힘쓰겠습니다.

혹시 그동안 ‘말씀은 어렵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성서주일인 오늘을 기해서 인식의 전환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쉽다!’ 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 하실까요?
‘말씀은 쉽다!’

모세는 그 다음, ‘말씀은 먼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12절을 보세요,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말씀은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손오공’이라는 소설을 잘 아시지요?
‘네’라고 대답한 분들은 틀린 분들입니다. 손오공이라는 소설은 없습니다.
「서유기」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이 손오공입니다. 
지금과 같이 한 것은 제가 국어교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끔 쓰던 방법입니다.

당나라 태종 때 현장 삼장(玄奘三藏)이라는 승려가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까지 험한 여행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면서 명나라 때 소설로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이 「서유기」입니다.
그 소설을 보면 삼장법사가 경전을 가져 오기 위해서 저 먼 서방낙토에 갑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세 제자를 데리고 가는데 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수많은 요괴들과 싸우고, 구구팔십일난(九九八十一難), 여든 한 가지 환난을 겪습니다.
삼장법사 일행은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렇게 먼 거리를 가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말씀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성경책이 아주 흔하고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성경, 얼마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성경과 관련해서  멀리 갔던 기록은 ‘이촌동에서 광화문까지’입니다.
‘이촌동에서 광화문까지,’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하시겠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북한에서 탈북한 금융계 중진 한 분을 만났습니다.
부인과 함께 탈북했는데 부인은 북에서 이름난 무용수였습니다.
그 분에게 ‘북에서 성경을 본 일이 있습니까?’ 했더니 ‘아, <비벨>말입니까? 해외출장 나가서 호텔방에 비벨이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이블>을 <비벨>이라고 하는구나! 북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무식하구나!’ 했습니다.
그 때도 오늘 같이 성서주일이 되었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원고에 이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성경이 무엇이 몰라 바이블을 비벨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속히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고 원고에 썼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가만있자, 그 사람이 북한의 국제금융통인데, 그렇게 무식한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의 약력을 보니까 김일성대학 독문학과를 나왔습니다.
‘가만, 독일어로는 성경을 <비벨>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확인해야 하겠는데 집에 독일어 사전이 없었습니다. 설교는 정확하게 해야 하겠고, 그래서 그 때 이촌동에 살 때인데 38번 시내버스 타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독일어 사전을 열어 보니까 독일어로는 성경이 <비벨>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독일어도 배웠었는데 까맣게 잊어 먹었습니다.
더구나 목사가 독일어로는 성경을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식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고 저였습니다.
그 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촌동에서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간 것, 이것이 성경과 관련해서 움직인 최근의 저의 최고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렇게 서점까지 가서 확인하게 만든 것, 저는 그것도 설교를 정확하게 하라고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의 내용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로 여러분 구약의 잠언서를 보세요. 얼마나 쉽습니까?
또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당장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생명의 전화라는 사회봉사 기관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Life Line’ 이라고 부릅니다. 
소정의 훈련을 받은 상담원들이 스물네 시간 전화를 받아 상담을 해 줍니다.
우리 교회가 수지에 들어와서 교육관을 준공했을 때 그런 봉사를 구상해 본 일이 있습니다. 교육관 3층, 지금 도서실로 쓰고 있는, 앞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된 조그만 방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려는 계획도 세워보았었습니다.

생명의 전화에서는 ‘도움은 전화처럼 가까운 곳에’라는 표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잘 만들어진 표어입니다.
휴대폰이 발달한 지금은 ‘도움은 휴대폰처럼 가까운 곳에’ 하면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말씀은 전화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입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장에서 오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여러분, 입과 마음에 말씀을 두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말씀이 있어서 그것이 입으로 나오게 되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까 「서유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유기」는 불교 이야기인데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데 좋은 대조가 되어서 인용했습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유기」에 대한 해설을 보니까 ‘삼장법사는 참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손오공을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전을 가지고 오는 큰일을 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보다도 더 무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손오공처럼 유능한 성도들이 되어 힘을 합해서 말씀을 이 세상에, 우리들의 삶 가운데 가져오는 일을 잘 감당하게 되기 바랍니다.

말씀은 이와 같이 우리 가까이에 있는데 우리는 자주 이 말씀을 멀리하려고 밀쳐내는 일을 합니다.
가까이 있는 말씀을 읽지 않는 것, 말씀을 밀쳐내는 일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것, 말씀을 밀쳐내는 일입니다.
가까이 있는 말씀을 멀리하려고 하지 말고, 반대로 가까이 있는 말씀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동안 ‘말씀은 먼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성도들이 있으면 성서주일인 오늘을 기해서 인식의 전환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 하실까요?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하는 말의 속뜻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14절을 다시 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말에 담긴 모세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행해야 하는 것이니라’입니다.
아까 ‘말씀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씀의 뜻은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는 것으로 말씀드렸는데 그 말씀은 한걸음 더 나가서 ‘말씀은 행하기에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말씀을 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데요!’ 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읽지 않는 분들이 말씀을 어렵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려고 애쓰지 않는 분들이 ‘말씀을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말을 하십니다.
작은 것부터, 쉬운 것부터  행하려고 해보세요.
재미가 나서 그 다음 것을 행하려고 할 것입니다.
일일일선(一日一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에 착한 일을 한 가지씩 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일일일언행(一日一言行) 하시기 바랍니다.

‘일일, 하루에, 일언, 성경 한 말씀을, 행, 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일이언행(一日二言行)이 되고 나가서는 일일다언행(一日多言行), 하루에도 많은 말씀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2절과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선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라고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세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삼단논법으로 정리합니다.

말씀은 어렵지 않다.
말씀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오늘 본문에 자주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면 청종할 때, 복을 받습니다.
어떤 복을 받습니까?

아까는 9절과 10절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16절을 봅니다.
생존하며 번성하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차지하는 땅에서 복을 받습니다.

20절을 봅니다.
생명의 복을 받습니다.
장수의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기에 힘써 이와 같은 복을 풍성하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대가 됩니다. 어떻게 됩니까?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 교회 북한과 해외선교를 담당한 선교2부장 장로님이 지난 가을에는 러시아 로스토프에도 다녀오시고 최근에는 새터민 예배에도 참석하셔서 그들을 격려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장로님, 그들에게 늘 강조하시는 말씀을 옆에서 듣습니다.
‘내가 사업관계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거기에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나라는 잘 살고, 예수 믿지 않는 나라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예수 믿고 복을 받아 잘 사시기 바랍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진리입니다.

말씀이 어느 개인에게 들어가고 그가 그 말씀대로 살기에 힘쓰면 그가 복을 받습니다.
말씀이 그 집에 들어가고 그 집이 말씀대로 살기에 힘쓰면 그 집이 복 받습니다.
말씀이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가 말씀 위에 서면 그 나라가 복 받습니다..

간혹 비기독교국가이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는 18절 뒷부분이 말씀이 답이 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그 번영은 길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 나라는 잘 살고, 예수 믿지 않는 나라는 못산다는 이 진리를 오늘 본문에 적용하면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하기에 힘쓰면 복 받아 잘 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행하기에 힘쓰지 않으면 고통 받는다.’입니다.
여러분,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19절의 끝부분을 보세요.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우리는 말씀을 행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특히 그런 말을 자주하는 편입니다.
이것은 우선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해당되지만 설교를 하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까 「월간목회」의 설교특집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은 행해야 한다는 말을 더 심각하게, 더 구체적으로, 더 실감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내주고 풀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학생의 잘못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잘못입니다.
풀 수 있는 문제를 내주었는데 학생이 안 풀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 학생이 나쁜 것입니다.

어느 주인이 머슴에게 들 수 없는 짐을 들라고 했습니다.
머슴이 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나쁜 사람입니다.
들 수 있는 짐을 내주었는데 머슴이 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머슴이 나쁜 것입니다.

오늘 모세는 ‘이것은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풀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들 수 있는 짐이다. 그러므로 들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힘써 푸시기 바랍니다. 즐겁게 푸시기 바랍니다.

푸시면서 실력이 점점 늘어갈 것입니다.
믿음의 실력이 점점 늘어갈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한 분도 빠짐없이 실력 좋은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교회들이 해마다 12월 둘째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서주일은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기준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영감으로 주신 계시인 성경의 본질을 다시 금 각성하고 이에 대한 성도의 이해와 자세를 새로이 하는 주일입니다.

2006년의 성서주일은 특히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고, 행하기에 어렵지 않다. 말씀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 말씀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행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성서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말씀, 어렵지 않습니다.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고, 행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말씀, 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 행하면 생명과 복을 얻습니다.

말씀을 행하기에 힘써서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이 교회가 되고, 이 나라가 되기를 말씀 그 자체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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