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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아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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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를 대할 때 신랑된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성도)와의 비유를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주인공 솔로몬왕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성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가란 말은 노래 중의 노래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 표현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매체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고상한 수사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 표현은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사랑의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 예식을 할 때 신랑은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아름다운 신부를 보고 흥분의 찬사를 보냅니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 접근을 확인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신부는 이러한 황홀한 분위기에 맞추어 신랑에게 자신의 최고의 사랑을 전합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경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있지만 저는 이 성경을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한 사랑의 맹세라고 생각합니다.

Ⅰ. 신부는 신랑에게 종말론적인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본문 4장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날이 기운다』는 말은 석양, 곧 저녁이라는 말입니다. 『그림자가 갈 때』란 역시 해가 지고 그림자를 만들 아무런 빛의 정체가 없는 캄캄한 밤이 임박해 왔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개인적인 종말을 앞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두고 맹세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을 맹세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술람미 여인은 행복합니다.
나의 생명을 내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누리지 못하는 행복입니다.

Ⅱ. 신부는 신랑에게 환란 날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본문 4장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라고 했습니다.
이 시각은 분명히 어두운 밤입니다. 밤은 환란의 상징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0절에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욥기 27장 20절에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사사기 20장 5절에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라고 했습니다.
고리도전서 11장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했습니다.
환란 날에도 신랑을 사랑하겠다는 신부의 맹세입니다. 성도들의 나그네 생애 동안 환란의 밤이 천지를 드리울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 만을 신앙하고 소망하겠다는 맹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두운 밤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환란 날에 성도의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두운 질병을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는 환란 날에도 주를 따르겠다고 담대히 맹세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신부는 신랑에게 장차 교회에서 만날 것을 맹세했습니다.

본문 4장 6절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몰약과 유황』은 아라비아와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향유입니다. 솔로몬은 이런 향나무를 수입하여 왕궁의 정원에 심고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동산에는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이 향기의 동산은 모리아산의 성전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성령으로 깨어 기도하는 자'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향기의 동산은 성소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30장 34-37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항상 향을 피워 향냄새가 가득하게 했습니다.
구약의 금향단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그곳에 서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의 상징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향을 중심하고 교제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만나는 장소는 몰약과 유향이 향기를 발하는 솔로몬의 동산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성전)에서 신랑 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유향의 향기가 그윽한 성전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향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11장 17절에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6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3-4절에 성도들의 기도를 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람미 여인의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는 말은 성도가 주님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기도했던 곳입니다. 땀과 피를 쏟으셨던 곳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향기를 토했던 곳입니다.

Ⅳ. 신부는 신랑에게 갈보리의 순교적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본문 4장 6절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라고 했습니다.
갈보리(카라비온)는 해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곳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3절에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했습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갈보리산 십자가까지 주를 따르겠다는 맹세와 자기 다짐입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옛사람이 못 박혀서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겠다는 고백적 맹세입니다.
지금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신랑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신부의 소망 가득한 궁극적인 고백입니다. 바로 이것이 죽음을 지나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천국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행일치의 신앙 맹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맹세와 다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 앞에 고백적인 맹세를 하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한계가 올 때까지 끝까지 주를 사랑하겠다는 종말론적인 사랑의 맹세와 다짐을 해야 합니다.
향기 토하는 동산에서, 기도의 향기 속에서 주를 사랑하겠다는 겟세마네의 맹세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며 죽는 데까지 주를 사랑하겠다는 갈보리의 맹세를 해야 합니다. 참된 진리 운동(교회운동)은 언제나 외적인 면보다 내적이며 이면에 흐르는 정신사를 고집했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은 모두가 다 장차 도래할 종말 앞에서, 개인의 황혼 앞에서, 모든 시간과 공간의 마지막 앞에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더욱 더 깊어만 갔습니다. 마침내 순교적 삶으로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신부의 자리를 더럽히거나 퇴락시키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은 오늘의 삶 속에서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내다보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는 이른바 연종 주일입니다. 이제 2006년이라는 시간이 기울고 있습니다. 2006년이라는 시간의 그림자가 서서히 우주의 공간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맹세는 교회운동에서 시작되고 교회운동에서 그 맹세의 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조건을 보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습니다(요한1서 4:10).
그 사랑은 중간에 파기되지 아니하는, 끝을 보는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친구와의 사랑, 가족과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은 상대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수없이 깨어지고 배신당하는 것이 친구사이입니다.
세 쌍 중에 한 쌍 이상이 이혼하는 현실이 오늘의 이성간의 사랑입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사에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가사가 생각납니다.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그러나 이런 맹세에도 불구하고 헤어져서 운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최근 신뢰할 만한 조사기관에서 한 통계에 의하면 늙은 부모가 아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이 전체 학대의 56%, 딸에게 학대당하는 것이 7%로 나타났습니다. 주로 부모가 자식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천국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면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믿음과 신앙으로 불이되어 사지백체를 통해 토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3년 전(2004. 1. 1) 갈보리 교회에 Vision을 주셨습니다. 이른바 3ㆍ1ㆍ3ㆍ1 운동이었습니다. 3년 안에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는 운동이 이미 원년에 달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슬림 지역인 파키스탄 킹스웨이 교회 임재성 선교사를 단독 지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난해(2005년도) 그곳에 교회를 건축하고 제가 가서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2층으로 확장하기 위해 건축비 전액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인도에 이남재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외 국내외로 간접선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려신학교 교수 한 명을 지원하고 있는 고려신학교 이사 교회가 되었습니다. 3년 전에 건물 한 동씩을 3년 안에 교회로 매입하는 운동은 우리에게 있어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3ㆍ1ㆍ3ㆍ1 운동 원년에 목사관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온 성도가 목사관에 기물을 헌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정성을 다하여 본당 강단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주차장 용도로 다가구주택 1동을 매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였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자를 이 부족한 목사를 통하여 고쳐주었습니다. 암에 걸린 송집사님 외에 조집사님, 그리고 왕집사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고 김남식 성도가 신앙고백을 하고 소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통하여 신령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000명의 재적 교인을 모으는 일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2006년 11월 통계에 의하면 3년 동안 주일학교 359명, SㆍFㆍC 117명, 대학부 30명, 청장년 145명이 등록하여 651명의 재적을 확보했습니다. 기존 재적 약 600-700명을 감안하면 1,300여명의 재적을 확보하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진하는 나라입니다. 부흥하고 상승하는 나라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나라입니다. 갈수록 더 잘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 10절에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옛날 보다 못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잠언 11장 24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심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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