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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이삭의 믿음의 간증 (히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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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을 영어로는 January라고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1월을 ‘야누아리우스’(januarius)라고 했는데, “야누스 신의 달”이란 뜻이다. January는 야누스라는, 고대 로마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야누스는 문을 지키는 신인데,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 얼굴을 입구를, 한 얼굴은 출구를 동시에 바라보았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1월을 하나의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여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지중해성 기후의 로마에서 1월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시기로, 겨울의 한파를 뒤로하고, 봄의 신선하고 따뜻한 희망을 느끼는 시기였다.

  로마인들은 야누스에게 바치는 축제를 준비하면서, 이미 과거가 된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라는 미래에 대해 기대를 나누었다. 1월은 로마인들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비전의 축제이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3가지를 점검한다.

(1) 뒤를 돌아본다.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는지, 돌아보고 반성한다.
(2) 위를 올려다본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는다.
(3) 앞을 내다본다. 미래를 바라보며 행동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우리도 과거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자. 히11장은 믿음의 선배들의 생애에 있어서, 어떻게 믿음의 행진을 하고, 간증을 남겼는지 보여준다.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점은, 모두 과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본문에 나타난 이삭도 마찬가지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에 비하면, 그다지 굴복이 없는 매우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우물을 판 일은 빼놓고는, 별로 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그의 미래 지향적인 믿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삭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에, 믿음을 따라 삶을 아름답게 마감해야 한다. 이삭의 이름이 본문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13절 말씀처럼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았을 뿐이다. 그러면 이삭이 경건하여 아무 실수와 허물이 없었기 때문인가? No, 그도 허물이 많았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그랄 땅으로 피난을 갔을 때,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내 리브가를 그 땅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속였다. 비겁한 자였다.

  에서가 만들어주는 별미에 혹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야곱이 아니라 에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렇게 이삭의 실수와 허물에도, 그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으로 이삭은…”

  그는 믿음에 따라 살다가, 믿음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이처럼 귀한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삭의 믿음의 간증은 무엇인가?

1.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20上).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라고 하였다. 여기서 장차 올 일은, 무엇을 뜻하나요? (창26:2) 이하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이는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약속이다.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땅에 대한 약속이다(창26:2-3) :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리라고 약속을 하셨다.

(2) 자손에 대한 약속이다(26:4上) :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3) 복에 대한 약속이다(26:4下) : 자손들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애 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그의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었다. 이삭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 그의 생애 동안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다. 이삭도 역시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큰 민족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 인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이삭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이삭은 자기 아들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나? “얘들아, 하나님의 약속은 또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붙들고 있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렇게 말했나요? 그렇지 않다.

  이미 13절에서 살펴본 바대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환영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나는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됨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놓치지 마라. 너희가 믿음 안에서 품은 꿈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삭은 자기의 두 아들에게, 장차 오게 될 일들에 대해, 마음껏 축복했다. 하나님의 약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바로 이삭의 믿음이다.

  우리도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자. 믿음 안에서 우리가 품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 미국에 월트 디즈니라는 젊은 만화가가 있었다. 그는 본시 매우 가난했다. 그의 작업실은 허름한 건물 지하실이었다.

  그 건물에는 쥐가 많았다. 밤이 되면 쥐들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도 귀찮은 쥐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꿈에서 쥐들의 친구가 되어서, 함께 재미있게 노는 꿈을 꾸었다. 그때부터 그는 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쥐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쥐의 이름이 미키 마우스였다. 미키 마우스를 소재로 한 그의 만화는, 전 세계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환상적인 놀이 동산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즈니랜드다.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다. 그는 목회에 실패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그는 LA로 이주를 했다. 그의 수중에 단돈 500불만 남아 있었다. 그는 LA에서 우연히 디즈니랜드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꿈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도 맨손으로 다시 한번 시작해 보리라. 나도 이곳에 하나의 환상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보리라.”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뿐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결국은 꿈이 이루어져, 환상적인 교회를 세웠다. 그가 수정 교회를 세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교회를 열심히 짓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엄청난 그 교회의 규모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목사님의 꿈이, 목사님의 생전에 다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짓고 있는 교회가, 너무도 엄청난 규모였기에, 그러한 말을 했다.

  그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천만예요, 저는 제가 죽을 때까지, 제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저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꿈을 꾸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환상적인 교회를 짓겠다는 꿈은 이루어졌지만, 그의 말대로 더 큰 꿈, 새로운 꿈을 계속 꾸면서 살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약속의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신약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들이 가득 차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자. 아브라함과 이삭의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의 꿈도 믿음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2.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믿음(20中).

“야곱과 에서에게” 이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였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이었다. 육신적으로 본다면, 에서가 야곱보다 앞에 나와야 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야곱이 먼저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야곱은 하나님의 택하신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그들의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이미 말씀하셨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도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다. 에서가 만들어주는 별미 때문이었다. 이삭이 나이 들어 임종할 때가 되었다. 이삭은 에서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서 죽기 전에, 너를 마음껏 축복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을 그대로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에서가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에, 야곱이 변장을 하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져갔다. 그리고서 야곱이 에서 대신에,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잠시 뒤에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그 사실을 알게된 이삭은 크게 놀랐다. (창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취소를 외칠 수 있었지만, 그대로 받아들였다. 유명한 성경학자 아더 핑크(Arthur Pink)는 “이때가 이삭의 육신적 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충격적인 각성의 순간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래 맞다. 내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뻔했구나.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물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에, 제가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에서에게 야곱이 정녕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이삭은 야곱에게, 다시 한번 축복했다(창28:1-4).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담 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그때는 이삭이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복을 야곱에게 했다. 이삭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의 육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종을 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채, 인간의 육신적인 뜻이 이루어지면 잘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무모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선하시고 축복된 역사는,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살아가시기 바란다. 그 안에 우리 기쁨이, 평안이,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경험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자신의 뜻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선택하는 모험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간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런 선택의 가장 숭고한 모범을 보여주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처럼, 우리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더 나아가 민족적으로, 우리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3. 언약의 백성이 번성하리라는 믿음(20下).

“…축복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창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에게 축복하셨다.

  이삭은 이적으로 태어났지만,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되고, 그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천하만민에게 축복이 된다는 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이삭은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축복했다. 자기 두 아들에게, 믿음으로 축복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이삭은 자신이 두 아들에 축복하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서, 자기 두 아들을 축복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빛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사명감에 투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큰일을 할 수 있다.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다. “모세야, 내가 너를 들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그때 모세가 무엇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나? (출3:11) “내가 누구관대.”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는 자신을 기껏해야, 양치는 목자로만 생각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때의 모세는, 자기 손에 들려져 있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존재였다. 80세나 된 노인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붙들려 있을 때는, 사정이 다름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비로소,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에, 엄청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사명에 충성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 원하신다. 우리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모두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녀를 축복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나요? No.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축복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마음껏 축복하며 살자. 우리가 선포하는 축복 속에, 하나님의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다. 우리가 선포하는 축복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20세기의 최고의 천재는, 아인슈타인 박사이지만, 학창시절에는 낙제생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담임선생님께서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공부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의 천재성을 깨닫지 못했기에, 그렇게 혹평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늘 이렇게 축복했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네가 다른 아이들과 같다면, 너는 천재가 될 수 없어. 하나님이 너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만드신 이유는, 너를 특별하게 사용하시기 위해서야. 너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의 재능을 잘 개발하였다. 그 결과 그는 어머니가 축복한 대로, 20세기의 최고의 천재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마음껏 우리의 입을 열어서,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 가족들, 이웃들에게 축복하며 살자. 우리가 선포하는 축복 속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난다. 우리가 축복한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이런

축복의 역사가 우리에게 넘쳐나기 바란다.

  결론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을 갖자.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믿음을 갖자. 언약의 백성이 번성한다는 믿음으로 축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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