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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직분자임명]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 (딤후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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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합당한 자격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을 일컬어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 7절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한 것은, 교회의 존귀함을 말해 줍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다니,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대체로 집은 건물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지은 건물도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믿음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집 주인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집의 일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기만성(大器晩成) 이라는 말을 씁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그릇에 견주어 ‘그릇이 크다’, ‘그릇이 작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똑같은 식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

모든 인간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비해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니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신자들을 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나옵니다. 신자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그 중에는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골고루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금 그릇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을 말합니다. 은그릇은 전자보다는 덜 충성스런 신자들을 말합니다.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은그릇만 못한 신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사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핍박자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시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둘 점은, 누구나 날 때부터 어떤 종류의 그릇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금 그릇인 사람은 없습니다. 날 때부터 질그릇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은 질그릇인 사람도 금 그릇이 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죄 사함을 받아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 받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실제로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씻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담대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는데,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은 사람이라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 사함은 곧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면, 깨어진 놋그릇을 녹여서 새 그릇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그릇은 이전의 놋그릇이 아니라, 새 그릇입니다. 이전에는 오물을 담는데 쓰던 놋요강이었더라도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밥상에 올리는 새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믿기 이전에 우리는 깨어지고 더러워진 놋요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완전히 녹여서 새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죄 사함 받은 성도라야 하고, 또한 매일같이 회개생활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성도라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게 감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도 한 때는 믿는 무리 가운데 속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해 낼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아시므로 때가 되면 그런 자들을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2장 18-19절에는 “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19)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갖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단에 속한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 때 기성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단들은 지금도 교패가 붙은 집만 찾아다닙니다.

이단은 병균과 같습니다. 그것도 감기를 옮기는 바이러스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을 전염시키는 병균입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단에게 넘어갑니다. 또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이단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살펴야 합니다.

이단은 비유하자면, 기독교의 짝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을 살 형편이 되지 않은 경우에 값싼 짝퉁을 사서 기분을 냅니다. 단 돈 몇 만원에 수백만 원 하는 명품과 똑같이 만든 짝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짝퉁을 가졌다고 해서 건강을 해친다거나 명예가 실추된다거나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짝퉁은 사정이 다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짝퉁을 일컬어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선지자의 짝퉁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고, 사도의 짝퉁을 거짓 사도라고 합니다. 한 교회에 속해 있으나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짝퉁 신자를 거짓 형제라고 부릅니다.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있기 마련이고,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는 현실을 보고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4:11).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 물들지 않은 성도라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도덕적인 오염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알게 모르게 도덕적인 오염에 물들기 쉽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노아가 살던 때보다 더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지켜 세상 풍속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직분자의 도덕적인 자격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12)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13)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육신의 정욕, 재물에 대한 탐욕, 높임 받으려는 권력욕, 칭찬받으려는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높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나태 곧 게으름입니다. 다른 일은 부지런히 하면서 신앙생활은 한없이 나태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잠언 6장에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하신 대로, 신자가 게으르면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빈궁하고 곤핍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으므로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서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보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로 나가서 부지런히 장사하여 갑절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는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와서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와서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특히 직분자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23절에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집사님들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구역장님들은 구역식구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보살펴야 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맡은 학생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치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대접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직분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이 다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섬김을 받는 사람일까요? 어린 신자들, 연약한 신자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피차 섬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이르기를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 섬기기에 힘씀으로 사랑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꾼들이 이 섬기는 일에 솔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한 분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집에 쓰임 받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히 쓰이든 천히 쓰이든,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쓰임을 받으려면 금 그릇처럼 귀히 쓰여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격은 우리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죄와 이단과 세속과 나태함과 같은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재물과 건강 등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을 비롯해서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이 깨끗한 그릇이 되셔서 하나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임 받는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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