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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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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 창12:1-3

6.25전쟁이 한창일 때 한 종군 취재 기자가 포탄이 나르고 있는 전쟁터의 참호 속에 들어가 있던 한 유엔군 병사에게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주변에 동료가 죽어가고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한 병사의 고백은, 결코 이 사선의 현장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내일이 있습니까? 미래와 소망이 있습니까?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소망도 없고,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도구도 없이 내 삶 속에 닥친 어려운 문제로 인해 지쳐버릴 때로 지쳐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내일이 없는 사람, 오늘은 화려하게 살아도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큼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자기 생명의 문제를 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의사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이 의사로부터 '당신은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떨궈지는 고개와 굳어져 가는 표정을 혹시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소망이 없는 인생은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고통스럽고 힘들다 할지라도 내일의 소망과 미래를 가진 사람의 고통은 그토록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새날을 바라보는 얼굴 속에는 희열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 주에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창세기 1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워 지는 아브라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 말 속에 너무나 많은 부분들을 미화시켜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즘 영웅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영'락 없이 '웅'덩이에 빠진 사람을 영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실패와 좌절을 너무나 쉽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삶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위대하거나 아름답거나 대단하기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볼 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는 실패와 좌절과 낙담 그리고 불순종과 불신의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됩니다. 오늘의 본문 앞장인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객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정착할 땅이 없다는 것은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대해서 한 가지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자녀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곧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일반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 아버지 데라를 객지에서 잃어버리고 자녀도 없고 지금까지 걸어 온 것보다는 걸어갈 길이 더 많이 남아있는 사람, 누가 보아도 보잘 것 없는 한 늙은이에 불과 했던 이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비전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에 정말로 그러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고 남들 보기에 보잘 것 없고 아무런 두각도 나타내지 못하는 연약한 나 또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어 드리는 비전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그 이유는

첫째 그는 비전의 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1절에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떠난다(leave)"는 말과,"가라(go)"는 이 말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이야기는 결국 고대 근동지방에서 죽으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친척을 떠나라고 얘기하는 것은, 내게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모두 끊으라는 얘기와 똑같습니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나의 가치관과 내 삶의 스타일 모두를 포기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곧 아브라함에게는 생존을 포기하라는 명령과 마찬가지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오셔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여 '가라'는 땅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땅에 대하여 들은 것도 없습니다. 그 땅에 대하여 아무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땅은 이곳 하란보다 더 좋다! 이런 확신이 서지 않고 어떻게 가나안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땅에 대하여 아브람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거봐. 가나안 땅이 이렇게 좋잖아? 가나안으로 이사를 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NIV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그 땅은 이제 차차 네게 보여 줄 것이니, 일단 그곳으로 이사를 가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히11:8절에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할 만큼, 그는 어떤 정보도, 어떤 준비도 안된 그에게 주님의 명령은 엄청난 갈등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에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비전을 좇아갔다'는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비전을 찾아가는 여로"의 길을 떠납니다.

여러분,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잠29:18절을 통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묵시'란 말이 비전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고망동을 의미'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말씀을 붙잡고 살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경거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전을 소유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비전을 찾아가는 여로"의 길을 떠난 것처럼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두신 이 한해를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로의 소망을 갖고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여러분,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좋아하시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여러분, 한 송이의 국화꽃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봄에 심기운 씨가 한 여름의 천둥번개와 비바람을 맞고 가을의 찬 서리를 맞은 후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과정과 단계를 거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변화와 성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을 잘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생활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또는 변화의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전의 각'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각(角)이란 말은 앵글이란 말로 초점을 말합니다. 이는 더 이상 내 힘과 내 경험과 내 방식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부르신 그 부름에 합한 삶이 되기 위하여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떠나기까지 걸렸던 시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나이는 육십 세입니다. 그리고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칠십 오세입니다. 그러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중간에 머물렀던 곳인 하란을 떠나기까지 걸렸던 시간은 모두 15년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원했던 그 지시된 땅, 목표로 했던 그 땅을 향해서 가지 못하고 중간에 묶이고 만 것입니다. 그 숱한 세월을 방황한 것입니다. 하란에서 주권에 굴복하지 못한 15년 간은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택한 자녀를 놓치시지도, 무관심하시거나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열심으로 내 인생을 다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방향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머리가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주님을 향해서 가고 싶은 마음도 사실입니다. 안 변한 것이 아닙니다. 변했습니다. 내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세계관이 변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전환에도 불구하고 내 인격의 밑바탕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그 끈끈한 소유욕과 이기심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그 동안의 엄청난 시행착오와 방황의 길을 접고 다시 일어섭니다. 내 주장,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세워갑니다. 비전의 각을 세운 것입니다. 성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관점이 바뀐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다. 여러분! 관점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인생의 성공을 보는 관점도 바뀌고, 인생의 행복을 보는 관점도 바뀝니다. 나의 삶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미래에 대한 생각도 바뀝니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바뀝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안주하는 삶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 단, 하나의 이유는 이제부터는 당신의 관점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믿음의 날개를 폈습니다. (4절)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 나이 75세 였더라" 여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이 말은 아브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하란을 떠날 결단(決斷)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한 그 약속을 붙잡고 나가는 믿음의 날개를 폈던 것입니다. 히11: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합니다.

'갈 바를' 이라고 번역된 '푸 에르케타이'란 헬라어는 의문문으로서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좇아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는지 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됨이 없으며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바를 분명히 이루실 분임을 믿고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즉 비록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는 분명히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숨겨졌으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나를 위한 의도가 분명히 있음을 확신했기에 그는 말씀을 좇아 믿음의 날개를 펴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고되어도 절망하지 말아야합니다. 너무 고통하지 마세요.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하늘을 날으라고 달아주었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준 것은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날개를 펴라는 것입니다. 날개를 가지고도 그것을 펴지 않으면 영원히 날 수 없게 됩니다. 날짐승이 날개가 퇴화되면 땅에서만 기는 동물이 되어 버립니다. 타조나 오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믿음이 퇴화되면 땅의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좌절하고 절망하여 술로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위로 향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 중에 제일 잘 나는 새가 독수리와 송골매입니다. 독수리는 멀리서 폭풍이 접근하면 본능적으로 금방 알아챈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폭풍이 몰려오는 방향을 향해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고 기다립니다. 세찬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은 독수리를 떨어뜨리거나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고공으로 치솟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부터 힘들이지 않고 바람의 힘을 역이용하여 도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오른 높은 창공에는 바람이 미치지 못합니다. 아래에는 폭풍우가 마구 스쳐가지만, 그는 유유히 그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여유 있게 하늘의 그 광대함과 찬란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힘있게 나는 날개를 준비한 독수리에게는 폭풍우란 전화위복을 가져오는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강한 날개를 준비하고 있으면 생의 폭풍우라 해도 큰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을 얻는 기회를 안겨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날개가 없는 사람은 폭풍우가 몰려오면, 이리 얻어맞고, 저리 얻어맞고,,, 나중에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립니다. 생의 폭풍우를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으니까 매일 얻어맞다가 맙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즐거움을 잘 모르고 교회를 다니기 쉽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알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맛 볼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은 지경을 넓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2-3절) 여기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자! 생각해 보세요. 지금의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그에게 1)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찌 그 뿐입니까? 여기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도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경'이란 말은 본래 '땅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영토, 지역, 영역, 범위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은 우리 인생의 영토를 확장시켜 달라는 기원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교회가 넓혀야 될 지경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교회 주변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이 변화의 장에 우리가 끌려만 갈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복은 신앙의 복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베풀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덤으로 더 큰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게 하면 화가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도 풍부하여 '축복의 호수'라고 불리고 있는 반면, 사해는 염분이 많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 Dead Sea(사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두 호수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주위의 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다른 강들로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사해는 주위의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뜨거운 중동지방의 태양열로 인해 물은 증발하고 소금만 쌓여 염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물론 아무것도 살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된 것입니다.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일"에 열정을 가지십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저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이 민족과 열방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나 비록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하나님은 나를 통해 역사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해 2007년도 한국교회는 평양 대 부흥운동 100주년과 맞물려 더욱 부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 모두 부흥을 갈망합니까. 황무한 이 땅에 부흥의 단비를 내리게 하고 싶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땅과 우리의 교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부흥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내일부터 "부흥을 목말라 하라"는 주제로 특새를 하게 됩니다. 한해의 시작 앞에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이제 지난 날 나를 붙잡았던 세상적인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새벽 날개를 치며 주 앞으로 목말라 하는 심정을 가지고 나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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