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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어느 때에?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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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여러분은 성숙해지고 있습니까?>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젊은 수녀님 한 분이 교대 근무가 끝났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아뿔싸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있었습니다.
주유소에 갔더니만 기름 넣을 통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차 있는 곳으로 돌아온 수녀님이 트렁크를 뒤져보니
자신이 요양원에서 일할 때 쓰는 환자용 변기가 보였습니다.
수녀님은 주유소로 달려가 그 변기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수녀님이 환자용 변기에 담긴 기름을 기름 탱크에 붓고 있었을 때
길 건너편에서 남자 두 사람이 이 광경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은 알고 있는데,
글쎄, 자동차에 오줌을 넣어 차가 움직인다는 기적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만일 저 수녀님의 차가 움직인다면 내 남은 생애 동안 매주 교회에 나갈 걸세!"
아마 이 말을 했던 남자는 매주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할지라도
내가 변하지 않고서는 그 기적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등, 숱한 기적 행하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기적은 내 마음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해서 날로 날로 진보하고 성숙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진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퇴보하고 있습니까?
성숙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미숙해지고 있습니까?

저도 지난 삶을 돌아보니 부족하기는 하지만 많이 발전해 온 것 같습니다.
고전 13: 11절의 말씀처럼 제가 아직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육체적 나이가 어렸을 때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어렸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더 철이 들고 더 성숙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도 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진보하고 성숙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 4: 16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격이 성숙하고 있다는 표시,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우리의 삶이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표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줄 아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계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쓴 철학 서적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책 하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라는 책입니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당의 폭정으로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유대인 6백만 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을 도맡아 했던
책임자가 독일인 루돌프 아이히만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히만은 목숨을 건져 아르헨티나로
잠입해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몰래 숨어살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비밀 경찰이 아이히만을 체포해서 본국으로 압송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의 한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아렌트가 이 재판을 참관하고 나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지요.

문제는 아렌트가 전 세계 모든 유대인의 공적이요 온갖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한 눈으로 분석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아렌트는 이 재판의 적법성과 공정성 여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재판 과정을 쭉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히만에게서
어떤 범죄자로서의 포악성이나 정신 이상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사실도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유대인으로서 아이히만을 극렬하게 비난해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 발언이 화근이었습니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유대인 사회는 일제히 아렌트를 반역자로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렌트가 1963년에 이 책을 발표한 이후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아렌트의 책을 단 한 권도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출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대인 사회가 아렌트를 얼마나 오해했고 단죄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정말 중요한 논점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독개스실로 보내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사람이라는 아렌트의 분석이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린 괴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리한 관찰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이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
온 세상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깊이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우두머리들이 지시하는
대로 아무 반성 없이 기계적으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재판 중에 아이히만은 만일 상부로부터 유대인 멸절 명령을
받았을 때 만일 자신이 그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기 양심이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피해자인 유대인이면서도 가해자인 아이히만을 비교적
공정한 시각에서 보려고 했던 아렌트의 양심은 참 보배로운 것입니다.
또 하나,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지적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이히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분명히 우리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경우, 혹은 이렇게 행동할 경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까?"
이런 훈련이 아주 부족하고 미흡한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지요.
그리하여 내가 잘 아는 사람의 경우에는 순순히 잘 대해주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까다롭게 구는 경우가 적잖이 많습니다.

어떤 회사의 고위 간부 한 분이 나이 50이 가까워서야 처음으로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책상에 물건 하나만 삐딱하게 놓여도 부하 직원들에게 그렇게 무섭게
대하던 분인데 자기 아들이 책상이니 경대니 할 것 없이 난장판을 만들어도
화를 내기는커녕 마냥 자랑스러워 너털웃음만 짓더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관계된 일에는 아주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나와
관계없는 일은 아무렇게나 대충해도 괜찮다는 인식,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는 정과 특혜를 베풀지만 나와 무관한
사람에게는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된다는 인식, 이것이 문제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자,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인격이 진보하고 성숙한다는
표시 중에 하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처지를 바꾸어서
나의 생각과 나의 행위를 돌아볼 줄 아는 능력에 있다 할 것입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구원받고, 또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이런 맥락에서 본문 말씀을 봅시다.
기독교는 구원받고 못 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실천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쉽게 풀이하면 그 요점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오른쪽으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왼쪽으로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른쪽으로 가서 구원받을 사람들입니까?

35-36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른쪽으로 가서 창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한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돌봐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주리실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방황했을 때에 영접해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간호해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님께 그리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머리를 긁적거리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했단 말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주님께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40절 말씀을 보세요.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세상에 있을 때 형제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대답이지요.

놀라운 것은 왼쪽으로 가서 사탄과 그 졸개들을 가두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갈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천국 들어간 이들과는 정반대입니다.
42-43절을 보세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과 정반대 경우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었을 때에 영접하지도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찾아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님께 그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제일 먼저 주님을 돌봤을 텐데 한 번도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님께 막 따집니다.
"아니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했단 말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님께 그렇게 한 기억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억울해서 따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5절을 보세요.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도대체 이 말씀이 의미하는 요점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32절에 보면 주님은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구분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믿음이 아닌 윤리적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너무 과격해서
'모든 민족'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로 해석하는 동시에,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선교사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비기독교인들이 비록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때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선교사들에게 자비를 베풀 경우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온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구원받은 이들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 공히 자기들이
먹이고 입히고 돌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선교사가 자기 나라에 와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서 온갖
고생을 할 때 그가 누군지 모른 채 도와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는 선교사와 같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종교를 초월해서 온 인류 누구나 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역시 타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온 민족이 다함께 주님이 제시한
이 같은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한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은 행위 때문에도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한
죄악들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예컨대 거짓말했고, 간음했고, 살인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은 것, 즉 은근슬쩍, 소극적으로
행하지 않고 눈감고 넘어간 것 때문에도 심판을 받습니다.
<Commission도 중요하지만 omission도 중요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세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형제 자매가 굶주렸을 때에, 목말랐을 때에,
나그네로 있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 몰라라 눈을 감고 돕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은 우리가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행한 윤리적 죄악들도 물으시지만, 은근슬쩍
소극적으로 행치 않는 것도 엄중히 문책하십니다.
그러므로 도울 수 있을 때 외면하고 돕지 않는 것도 죄악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형제 자매들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과 연대 의식을 가지신 분입니다.
여러분, 천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 주었고,
나그네로 헤맬 때에 영접해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은 한 번도 예수님께 그렇게 한 기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형제 자매 한 사람에게
그리했을 때 곧 당신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난한 이웃, 불쌍한 이웃,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 하나에게 작은
인정과 자비를 베풀 때 그것이 곧 우리 주님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마다 얼마나 많은 '작은 예수님'을 만나는지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 전차 안에서, 시장에서, 직장에서,
병원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예수들을 만납니다.
여러분들이 그 이웃들에게 작은 사랑 하나를 베풀 때 곧 주님께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마다 예수님을 만날 무수한 기회를 얻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잘 해드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가를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나그네 되어 떠돌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면서 외면하는 것일까요?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가 과거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역지사지가 잘 안 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촌뜨기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심정을 모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보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아픈 형편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 가서 일가친척 하나 없이 참 외롭고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미국인 가정과 자매 결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저희 가족과 인연을 맺게된 호스트 훼밀리는
Betty & Jack Phelps라는 나이가 지긋한 감리교 노인 부부였습니다.
한창 외롭고 힘들었을 때 이 부부가 저희 가정에 베푼 사랑은 참 큰 것이었습니다.
한 10년 이상을 매해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이브만 되면 어김없이
자기 집에 초청해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아직 학업중에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아무도 우리 가정을
돌보지 않았을 때, 저희 가족들에게 이 노부부는 천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참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 받은 사랑이기에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봅시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작은 선행을 베풀어봅시다.
특히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쉽고 상처받기 쉽고
소외당하기 쉬운 이웃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봅시다.
그것이 곧 우리 주님을 잘 모시는 일이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작은 예수들을
많이 만나실 터인데 잘 모시기 바랍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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