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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청혼할 때는 언제고 (마 1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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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일입니다. 올해는 십이간지로 따질 때 돼지띠 해입니다. 매스컴에는 600 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해라고 법석입니다. 본래는 오행에서 불을 상징하는 정해년에 돼지해가 겹쳤기 때문에 60 년 만에 찾아 온 붉은돼지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황금을 좋아하니까 복의 상징인 돼지에 황금을 붙인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이는 역술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또 보건복지부에서 애를 많이 낳으라고 퍼뜨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작년은 쌍춘년이라고 해서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올해는 그보다 훨씬 좋은 황금돼지해라니 역시 결혼도 많이 하고 아이도 많이 낳을 것입니다. 황금돼지가 복을 갖다 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십니다. 황금돼지는 이 세상이 만든 우상입니다. 황금돼지 저금통 같은 것 사서 선물하고 복 빌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복 주시려다가 맘 상하셔서 도로 거두실지 모릅니다.

2005 년 통계청 자료를 보니 혼인은 316,375 건이었고, 이혼은 128,365 건이었습니다. 하루에 867 쌍이 결혼했고, 하루에 352 쌍이 이혼한 셈입니다. 2 년 전 통계이니 최신 자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이혼보다 결혼하는 쌍이 많다는데 위로를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혼하는 이유들은 다양합니다. 배우자 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주변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이혼 사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대부분 가정 폭력, 경제 문제, 성 가치관 문제입니다. 그 중에서 간음죄가 이혼율을 높이는 주범입니다. 누구나 이혼의 위기를 겪을 수 있지만 이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습적인 가정 폭력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배우자의 성적 타락도 그렇습니다. 결국 앞날의 행복을 위해서 이혼을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이혼만은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이혼하기 전에 조정 기간을 둡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이혼을 결심했지만 화가 누그러진 후에 다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혼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덕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셨는데 사람이 이를 어기고 갈라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셨다면 완벽한 커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사람들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혼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이혼은 사회의 커다란 이슈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곤란한 문제를 던졌습니다. 전에 예수님은 모세의 이혼에 대한 입장과 다른 입장을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때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이 문제를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했는데 다른 말씀을 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1-32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보다도 더 엄격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혼 절차 없이 함부로 이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의 남자들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쉽게 이혼을 했습니다. 그 전통이 예수님 시대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보면 ‘아내를 버린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7 절을 보면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지적하고 있는 구약의 이 부분은 내어 버리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어 보내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내 보내는 것과 내 버리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내 보낸다고 할 때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버리는 것은 아내를 천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 이혼은 여자를 버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혼을 당한 여자는 생활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의 생존에 관계된 모든 권리를 잃어버리고, 냉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당한 여자는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남자들의 이혼은 그 동안 사랑하며 함께 살았던 한 여인의 남은 삶은 어찌 되든 상관없이 저만 좋자고 벌이는 아주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이런 차별은 오랜 세월동안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이혼이 얼마나 악하고 나쁜 것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0 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혼을 금하는 말씀을 하시자, 이혼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반응을 합니다. 이 대답이 얼마나 한심합니까? 제자들조차도 이혼을 유대 남자의 대단한 권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대답이 쉽게 나온 것은 그 당시 사회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함부로 이혼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명한 구약은 신명기 24:1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으로 오히려 이혼을 쉽게 했습니다.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이혼이 됩니다. 이혼증서란 여자를 법적으로 풀어주어 재혼의 기회를 주기 위한 문서입니다. 또한 유대 남자에게 이혼증서는 새장가를 갈 수 있는 보증서가 되기도 합니다.

즉 모세의 이혼증서는 결과적으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모세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의 이혼증서는 여성의 권익을 보장해주려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악 이용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순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함부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간음죄는 십계명을 어기는 중한 죄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한 가지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얼핏 들으면 재혼도 금지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 말씀만 딱 떼어내어 문자적으로 읽으면 재혼을 금지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혼을 방지하려는 강력한 말씀으로 하신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재혼 금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혼도 금하고, 재혼도 금하는 종교입니까? 기독교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예외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본문에 있는 대로 음행한 연고입니다. 배우자의 성적 타락 때문에 더 이상 혼인생활을 이어가기가 어려울 때는 이혼도 가합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7 장에 있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배우자가 기독교 신앙을 꺾으려고 할 때는 이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 중요하지만 영혼 구원보다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혹 지금은 믿지 않아 핍박을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이 이를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 7:16>

우리 크리스천은 음행한 연고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면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문제라면 극복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성경이 쓰일 당시보다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한 경우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사연을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황혼 이혼이 많아졌습니다. 자녀들이 출가할 때까지 참다가 늦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평생 일방적으로 비참하고 억울하게 결혼 생활을 참아왔다는 것입니다. 의처증, 구타, 극단의 정신분열증 같은 경우를 참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평생배필이 아니라 ‘평생웬수’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이혼의 동기가 인간의 완악함이 아닌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원리에서 이혼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계십니다. 결혼은 창조의 원리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은 하나님이 중간에 계신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창조된 원리에 따른 사명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가정을 성스럽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에 하나님을 잃으면 가정도 무너집니다.

결혼할 때는 둘이 좋아서 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갈등이 생깁니다. 사랑보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결혼할 때 한 사랑의 약속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결혼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독립을 뜻합니다. 독립은 성인으로 자기가 내린 결정에 책임을 지는 단계입니다. 전에는 부모를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정을 책임져야 합니다. 이혼은 이 책임을 피하는 비겁한 결정입니다.

이혼에 대한 입장을 그렇다고 하고, 재혼은 문제가 됩니다. 어쩌다 이혼한 사람은 재혼이 불가할까요? 기독교는 재혼을 금하지 않습니다. 재혼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혼은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할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먼저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예로 들면서 이혼을 함부로 하는 바리새인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혼을 막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 봐야 합니다. 신명기 24:1-4 말씀을 봅시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신 24:1-4>

이혼한 아내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처음 남편이 마음이 변하여 이전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모세는 이것을 금했습니다. 한번 버린 아내를 다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이혼을 하려면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혼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어적인 조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재혼을 금한 구약의 신명기 말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혼이 간음죄라는 것은 모세가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성경은 재혼 자체를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재결합은 금하고 있을까요? 헤어진 배우자가 다른 곳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재결합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금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헤어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선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득이 이혼을 했다면 다시 재혼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잘못 해보았으니까 다시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재혼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구속받지 않고 교회 봉사하면서 사는 것도 복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참 과부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권사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권사가 되려면 조건이 과부라야 했습니다. 이는 교회 봉사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못하는 고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본문 11 절부터 세 종류의 고자를 소개합니다. 먼저 고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선천적인 성불구자입니다. 다음은 사람이 만든 고자입니다. 궁궐에서 궁녀들을 범하지 못하도록 고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내시입니다. 세 번째는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된 고자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고자로 신체적인 고자가 아닙니다. 주님 일을 하기에 바쁘다보니 결혼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이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고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인 유혹을 충분히 이겨낼 영적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이 영적인 고자는 남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도 교회 봉사에 전념하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여자전도사님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결혼을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그보다 더 큰 상급과 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새해 첫 주일 설교가 이혼에 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강해설교를 2005 년 1 월 첫 주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벌써 꼭 만 2 년이 되었습니다. 올해 안으로는 끝날 것 같습니다. 인터넷 교회 홈페이지에 설교문이 그대로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처음부터 읽으면 마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 설교는 본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제는 본문도 중요하지만 청중들의 삶에 맞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한 단계 발전된 설교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후반부 설교는 더욱 은혜로운 설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결혼생활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쉽게 하는 것은 결혼의 참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결혼했고 위기가 찾아올 때 쉽게 이혼합니다. 상대에게 이익을 취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결혼과 가정을 신앙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일 대는 지체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메마른 사랑을 회복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배우자와 가족을 용서할 마음을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결정은 아주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도 힘들면 목회자에게 상담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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