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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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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요한복음 3장 22~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지난해 말 미국 오리건 주 산악 지대에서 조난을 당했던 재미교포 제임스 김씨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참 안타까왔습니다, 조난 당한 뒤 11일 동안 아내와 어린 두 딸과 구조대를 기다리다가 차의 가솔린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만 없어서 제임스김씨는 혼자서 스웨터 하나만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혹한과 폭설을 뚫고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구조를 받았으나, 제임스김씨는 저체온증으로 4일 후 가족들이 있던 곳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니 눈 길이 아닐지라도 등산이 어려운 3,40도의 급 경사길과 바위 덩어리인 험준한 산길과 얼음같이 차가운 강물을 헤엄치며 필사적으로 16㎞ 정도를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서 가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씨는 숨지기 직전 하얀 종이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지난 일요일(25일) 이래 차에 갇혀있으며 구조대를 보내달라." 고 쓴 메모를 남겼습니다. 구조 활동을 지휘해온 브라이언 앤더슨 경찰국장은 김씨 시신 발견한 뒤 기자 회견 도중ꡒ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ꡓ고 말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제임스 김의 아버지 역시 조난당한 아들의 가족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위성회사와 접촉해 인공위성을 조난 지역 상공으로 이동시키기도 했고, 민간 헬리콥터 세 대를 고용해서 인명 구조용 행낭 열여덟 개를 조난 추정 지역에 떨어뜨렸습니다. 결국 그 헬기 중 하나가 며느리와 두 손녀를 찾아낸 것입니다.
  이 보도를 읽으며 저는 영원한 멸망에 처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거듭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낀 사람은 그 전과 똑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영이 살고 인생관도 바뀌고 삶의 목적도 바뀌고 생활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의 성품과 성질까지도 완전히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요 소망의 사람이요 무엇보다 사랑의 사람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때때로 이 놀라운 십자가 아래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거나 서로에 대하여 시기 질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유대인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고 있고, 거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가더이다”(26절)
  이 말 속에는 배경에는 질투심과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세례 요한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고,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심지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던 이스라엘의 군중이 이제 예수에게로 다 몰려갑니다. 그것을 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좋아하고 따라 다녔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허전함,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 예수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조차 예수님께로 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문에, 세례는 세례 요한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이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왜 세례를 베풉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너무한 것 아닙니까?” “사역을 해도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영역 침범입니다. 선생님, 무슨 조치라도 취하시고 항의 방문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세례 요한은, 제자들과 자기에게 왔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섭섭하기는 무엇이 섭섭해. 기쁜 일이지.” 기쁜 일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기쁨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결혼식에서 신랑에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는 하객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수천년 동안 온 인류는 버림받은 신부였습니다. 이제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이 신랑을 맞으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였을 뿐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신랑을 만나고 천국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세례 요한이 기뻤던 것은 성령님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조차 시기 질투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이 전해 준 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아느냐 하는 차이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입니다.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이 잘되면 기쁩니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 같습니까? 요한의 제자들 같습니까? 대답을 하기 위해서 한번 예를 들어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부흥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의 일이 잘된다면 교회가 부흥된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은 당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당회에서는 직분도 드리고 또 직책도 임명을 해드리는 교회를 조직하는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그런데 꼭 이런 당회가 열릴 때만 되면 묘하게 교인들의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미묘한 마음의 흔들림이 있는 것을 봅니다. 소위 시험 드는 이들이 생깁니다.

  어느 교회 장로 임직식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입니다. 세 분이 장로 임직을 받게 되었는데 순서지에 누구 이름을 먼저 쓸 것이냐에 대해 세 분이 세 가지 의견으로 갈라졌답니다, 한 분은 득표수에 따라, 한 분은 연령에 따라, 또 다른 한 분은 가나다 순에 따라 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오냐 때문에 순서지 하나 인쇄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이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그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내 이름 순서 하나 때문에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까닭이 있느냐 말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실제로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게는 오늘 본문에 대하여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안산에서 목회할 때, 교회 땅이 될 뻔 했던 신도시의 3400평 종교 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추첨에 의하여 다른 교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올해 그 땅에 한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그 땅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아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하던 때,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누구 교회인가? 예수님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그 땅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예배하고 복음 전하고 말씀 훈련을 하겠지요. 그러면 기뻐할 일이다! 저는 십자가 앞에서 다른 교회를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교인들에게 고백하겠습니다,”
  그것은 주의 일이 잘 되느냐 안되느냐에 상관없이 그것이 내 교회 땅이냐 아니냐는 지극히 철저히 자아 중심적인 생각과 반응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남이 아니었습니다. 제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본성적으로 자아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주의 일이 잘 되느냐 안되느냐 보다 그것이 나를 중심으로 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존재입니다.
  설교 때 솔직히 성령님께서 깨우쳐주시고 책망하신 내용을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왜? 교인들 중에는 저보다 증세가 더 심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마음 먹은 것 하나님께 다 회개합시다. 정말 거기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차질없이 잘 지어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온 교회 안에 질투의 병을 치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이미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 그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다 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누구든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자녀되고 천국 백성된다. 그래서 자신은 복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실제로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러분, 교회 생활하다가 언제 낙심이 되고, 언제 재미를 잃습니까?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아니었습니까? 복음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고 교만과 열등감, 시기와 질투, 사람에 대한 원망과 낙심에 무너진다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은 성령님으로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는 바로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줄 그리스도라고 예언하셨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기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본인이 분명히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 차이인데, 결과는 이렇게 다르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그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 들은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더 많은 신학을 공부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서야 제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비로서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교리적으로는 제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교리로 알고 있는 복음은 저를 전혀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깨닫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서 십자가 복음의 능력과 감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해결이 됐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신이 정말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도 받았다는 사실을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지적했다고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진짜 여러분이 안다면, 사람들과 비교하고 교만하고 열등감 갖고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교리로만 아는 것이지, 아직도 내게 그 진리가 내 삶의 결론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우리 속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천국이 있다는 것과 저는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들었고 그것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보화를 발견한 농부같이 기쁘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는 소망 없이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천국의 복을 받은 것을 안다면 사람의 평가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결국 우리 주님 앞에 가면 다 드러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것때문에 우리 마음의 속이 뒤집어지고 사람들의 평가에 그렇게 연연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조차 질투를 하지 않았습니까?

  일대일 양육을 마친 이들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받으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구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주 한주 양육 과정이 거듭될수록 제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확인되어졌습니다. 정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주간의 양육을 받는 동안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복음이신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제 안에 계시며, 그 분이 저의 주인이 되셔서 제 삶을 이끄시는 분이 되셨음을 고백합니다.”

  제자 훈련을 마친 이들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제가 훈련을 통해 정말 예수님의 보혈로 제가 죄사함을 완전히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을 시작하면서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은 저의 내면을 강타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제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살아왔는 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이신 삶으로 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자아는 죽고 예수님이 중심인 삶으로 저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복음이 이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복음으로 예수님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이웃 교회나 성도로 인하여 싸우고 경쟁하고 갈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의 편협한 자아 중심, 자존심과 이기심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에 대해서 싸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와서 청탁을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때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내 아들을 앉혀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화를 내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앉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결국은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의 말대로 주님이 들어주셔서 그랬는지, 그 장본인이었던 야고보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 자리는 누가 먼저 죽느냐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제자들이 싸웠을까요? 싸우기는 커녕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에 앉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끌어안고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는 순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질투하고 시기할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정말 알고 직분도 받고 또 축하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당회 때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누가 먼저 죽을지 순서를 정하는 것입니다.

  해외 선교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강원도나 제주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교회, 속회, 선교회, 성가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는 너희 교회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강남, 강동, 성남, 분당에 있는 교회들이 부흥되기 위해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았지 않느냐?’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정말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라면 우리 이웃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위해서 같이 기도해야 맞습니다. 주의 일이 흥왕히 일어나는 것이 진짜 기쁨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F.B마이어 목사님이 영국 런던에서 목회하실 때, 런던에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몰간 목사님이 함께 목회하셨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 가서 사역을 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몰간 목사님과 친구 사이였던 마이어 목사님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몰간 목사님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ꡒ몰간 목사님이 미국이 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좋았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군요.ꡓ마이어 목사님의 마음에 다른 목사님에 대한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ꡐ나는 스펄전 목사님 처럼 설교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님처럼 권위 있는 목회를 하지도 못하는구나.ꡑ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ꡒ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시옵소서.ꡓ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시기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이 기도하는 마이어 목사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라.ꡓ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마이어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바꾸었습니다.ꡒ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그 교회에 큰 복을 주옵소서. 캠벨몰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큰 복을 주옵소서.ꡓ라고 기도하고 부터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가득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에서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ꡒ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에 큰 복을 주셔서 사람들이 가득 메워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남거든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시옵소서.ꡓ그 후부터 이 세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세 교회 모두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1장 12~18절까지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교인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경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며 바울을 시기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는 바울 대신에 내가 나서야 될 때구나. 그래서 바울이 누리던 명성을 내가 누리고 바울이 받던 존경을 내가 받아야지. 나도 바울만큼 유명해져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18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이 더욱 증거되었다면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로 인해서 증거되고 전파됐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냐. 나는 감옥에 들어와서 전도하고, 그들은 밖에서 시기심 때문에 전도를 하게 됐다면 이것은 다 잘된 일이 아니냐.’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자아 중심의 사람인지 예수님 중심의 사람인지에 따라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는 담대하기로 소문난 선교사였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그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신학생들은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선교사요, 설교자로 알려진 그 분이 우왕좌왕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선교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오자 여지 저기에서 비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선교사님의 모습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강단에서 설교 한편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분이란 말인가?" 그 때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셔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께서 예배 시작 전에 선교지로부터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그 전화는 아프리카에 남겨 두고 왔던 사모님과 어린 두 아들이 원주민의 피습을 받아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교사님께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선교사님은 여러분에게 약속한 시간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을 전해주신 선교사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사회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강당에 일제히 침묵이 흘렀습니다, 강단 뒤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교사님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비판의 눈이 깊은 존경의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눈이 뜨이는 것 하나로 모든 것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과 그 비밀과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일을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는 눈이 진정 열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한“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일이 흥하여야 되는 것에는 우리는 이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에는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 돼나? 예수님도 흥하고 나도 흥하면 다 좋지 않은가?’ ‘꼭 내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이런 문제 때문에 마음에 걸리시는 분이 있습니까? 정말 세례 요한처럼 성령님의 역사로 십자가 복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구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해답이 안 옵니다. 나 자신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음을 분명히 영안이 열려 보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 중심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의 일을 가로 막습니까?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일을 못하게 만듭니까?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나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심을 내가 알게 되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흥하고 쇠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성도에게는 감격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나의 주님이시고 구주이심을 알게 되면 “주여, 나는 오직 주님의 기쁨 되기만을 원합니다. 내가 쇠하여 주님이 흥하실 수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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