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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막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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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피나게 벼슬을 쪼으며 싸움을 합니다. 닭은 서열질서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2년 노르웨이의 셸데루프-에베(T. Schjelderup-Ebbe) 는 닭들 사에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최고의 서열질서를 가지고 있는 닭은 모든 닭을 쪼을 수 있지만 어느 닭도 최고의 서열질서를 가진 닭을 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닭들은 엄격한 서열 사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서열이 낮은 닭은 모든 닭에게 시달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투스 B. 드뢰셔는 그의 책 「휴머니즘의 동물학」에서 야생닭은 서열질서가 강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호랑이, 표범, 붉은 늑대 등 맹수들이 많은 인도의 정글에서 사는 닭을 관찰해본 결과 수탉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닭들을 위해 보초를 서고 먹이와 잠자리를 찾아준다고 합니다. 닭들은 식량을 찾을 때 서로 돕고 알곡을 발견하면 식구들을 부른다고 합니다. 서열질서는 두 마리의 닭이 동시에 한 알의 알곡을 먹으려고 하는 경우에만 강하게 발동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형 닭장에서 사는 닭들은 서열 질서가 강하여 만날 때마다 억압과 굴종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똑 같은 닭이지만 자유롭게 야생하는 닭과 갇혀있는 닭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자기들끼리만 있으면 형제일지라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동생이 낯선 아이들에게 맞으면 누이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달려가 동생을 보호합니다. 집안에 갇혀 있을 때는 서로가 적이 될 수 있지만 밖으로 나오면 많은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서로 동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는 어느 공동체에서나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도 서로 힘을 잡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힘이란 "자신 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엘빈토플러는 힘의 원천은 폭력. 부.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힘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실 당시 사회를 보면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총독을 파송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렸고 보다 효과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헤롯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당시 통치자는 빌라도였습니다. 로마의 4대 총독입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고집불통이고 잔인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대중인 유대인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론을 무시하고 정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날 빌라도는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이사의 화상이 들어 있는 군기를 밤에 몰래 예루살렘에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여론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니까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그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은 유대교였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이었듯이 이 당시는 유대교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여론 주도층이었습니다. 그들의 여론에 따라 정책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힘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 내에 분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분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회원을 구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말하면 국회의원들입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으나 사두개파는 예정을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만 강조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인간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인했습니다(행23:8). 바리새파는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인했습니다(행23:8). 바리새파는 구약과 구전으로 전해오는 미쉬나를 인정하였으나 사두개파는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모든 구전을 부정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두개파는 주로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종파 중에는 에센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세상이 싫어 타락한 세상을 부정하고 쿰란 공동체를 이루며 수도원적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헤롯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헤롯에 아부하며 세속적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혈맹당이 있었는데 이들을 무력으로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나라 친일파와 같은 사람이 헤롯당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는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력들이 서로 힘을 차지하기 위해,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그리고 여론을 업고 예루살렘 공의회 회원이 되기 위해 치열한 정치 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며 수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자 힘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이 예수님께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지지율이 60%-70%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1. 죽이려는 마음과 살리려는 마음

이것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인기를 예수님이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기득권을 침범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을 따먹었습니다. 올무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따졌는데 이 때 예수님은 명쾌한 논리와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안식일의 본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마 그들은 많은 백성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을 떼로 갔다 혹을 붙이고 온 꼴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만 노출한 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에게 몇 차례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두고 보라 언젠가 복수하리라”라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왜곡되고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죽임으로 잃었던 지지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하였습니다. 지난번 안식일을 어긴 것은 예수님 본인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한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단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제거시킬 결정적인 단서가 필요했습니다. 한 번에 넘어뜨릴 단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민감한 것이되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같으면 자식들의 군문제나, 공산주의, 그리고 치명적인 동영상 같은 것이 있으면 단번에 넘어갑니다. 어떤 대통령 후보가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하면 그 사람 찍지 않습니다. 어떤 후보가 교인인데 술먹고 추태를 부리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라오면 교인들이 그를 찍지 않습니다. 지지자를 백성과 불리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당시에는 가장 좋은 것이 안식일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켰고 그것이 곧 적인가 동지인가를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습니다. 자신들이 백성들을 늘 가르치던 회당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고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죽일 생각으로 눈이 어두워지니까 회당도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도구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중심 사고가 참 중요합니다. 마음의 색깔, 마음의 태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같이 예배를 오늘 드리고 있지만 어느 누구에 대하여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배드릴 때도 그것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부동산으로 날마다 뛰어 다니며 아파트를 보러 다니는 집사님이 헌신 예배 사회를 보면서 찬송가 109동 부르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온통 부동산만 생각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109장이 아니라 109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청춘 남녀가 있다면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은 제외하고 빨리 예배 끝나고 데이트 할 것만 생각합니다. 예배는 단지 형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당시 누구보다도 잘 섬긴다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꼴이 된 것입니다.

때 마침 한편 손 마른 사람, 오른 손이 불구인 사람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대부분 오른 손으로 일을 하니까 오른 손이 불구라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당했을 것이고 늘 소외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 힘없는 사람, 도와주어야 할 사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죽이는 쪽으로 이미 결정되니 상대의 모든 것을 죽이는 쪽으로 해석을 하고 접근을 합니다. 이런 사고를 정치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판단을 하는 사고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불리하냐 유리하냐로 따지는 것입니다. 절대 상대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해야 다음 선거 때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이 분당되고 잘못되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닭장의 닭들이 닭싸움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것이 바르냐 그것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것이냐는 명목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상대 당이 죽어야 자기 당이 사는 것입니다. 상대 당이 정치 소비자인 백성들에게 잘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등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얻어 여론이 좋아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건수만 걸리면 죽이는 올무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는 이런 바리새인적 기질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일차 대학 합격 시험이 발표되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같이 새벽기도 나오고 신앙 생활하신 집사님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내 아들은 합격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바로 축하가 나옵니까? 아이에게 왜 너는 합격을 못했냐고 역정을 낼 수 있습니다. 기분을 안 좋을 수 있습니다. 같은 업종 사람이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픕니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데 같은데 경쟁자이고 라이벌일 때는 다릅니다. 똑같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딸을 생각하는 것과 며느리를 생각하는 것이 같습니까? 전혀 방향성이 다릅니다. 사위가 설거지를 해 주면 기특하고 아들이 설거지를 하면 못 참습니다. 딸이 딸 낳으면 살림밑천이라고 말하지만 며느리가 딸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 그래도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 거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며느리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죽이는 쪽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이 밉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딸에 대하여 기본적인 생각의 태도를 살리는 쪽으로 생각하면 매사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프로크루스테스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평생을 아테네 근처의 강가에서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며 살아갑니다. 그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침대를 마련해 두고, 키가 큰 나그네는 작은 침대에 묶고, 작은 사람은 큰 침대에 묶은 뒤 침대에 맞도록 키를 잡아늘리거나 발목을 잘라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키가 크든 작든 죽이기로 작정하고 잡아오니 누구 하나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 오경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형식을 강조하다 보니까 내용과 본질보다는 형식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잘못된 의식구조를 가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최고입니다. 종교적 교만이 넘쳐 흘렀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 234개를 만들어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절에 보십시오. 왜 회당에 들어갑니까?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어갑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손마른 사람을 고치니까 이들은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죽이려고 합니다. 이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5절 보십시오. 마음이 완악해 저 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것입니다.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진리의 수용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견고하게 굳어져 버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독단적인 신앙구조를 갖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기본적으로 살리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식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주신 본질을 중시하였습니다. 4절을 읽어보십시오.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처럼 규례를 만들어 놓고 고소하려고 감시하며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로만 하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4차례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하였습니다. 2장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시비하였고 이제 그들은 덫을 쳐 놓고 예수님이 범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마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죽이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식을 살리고 남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구역을 살리고, 주일학교를 살리고, 이 시대의 문화를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리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모는 것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자신이 새벽기도한다고 새벽기도를 못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자신이 헌신하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사랑보다 말씀보다 우선시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회칠한무덤, 독사의 새끼들. 그리고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2. 죽이려는 말과 살리려는 말

죽이는 쪽으로 생각을 하면 자연적으로 사람은 죽이는 쪽으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니까 그들은 어떤 말을 합니까? 6절 보십시오. 어떻게 하여 죽일까 헤롯당과 의논합니다. 야합을 합니다. 언제 우리가 원수였냐고 말하며 서로 입을 맞춥니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우리 일제시대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온건한 독립군이고 헤롯당은 친일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습니다.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은밀하게 합니다. 백성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까 밀실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만들어 내는 것이 허위의식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돌고 있는 정치인과 일부 정치 신문들이 만들어낸 “진보=친북” 이라는 것이나 “보수=꼴통” “386=무능” “무슨당=부패” 등과 같은 것은 다 허위의식입니다. 상대의 일부를 들어 마치 그것이 상대의 전체인 것처럼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정치 소비자의 마음을 자신들에게 붙들어 두려는 지어낸 말들입니다. 상대를 죽이려고 하면 늘 상대의 약점을 잡아 드러내고 흉을 봅니다. 일부를 확대 해석합니다. 본의를 왜곡시켜 버립니다. 늘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불구의 몸을 고쳐 주었으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예수님은 저렇게 고통받은 사람을 살려 주시는 분이다. 아픈 사람들은 예수님께 오시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 할 법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라는 형식으로 올무를 씌우는 말을 합니다. 우리 예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리려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손마른 자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합니다. 공개적으로 일어서게 합니다. 수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대를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의 분명한 정신을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진리를 통해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노려 보는 자들 앞에서 살리는 말씀, 치유의 말씀, 사랑과 긍휼의 말씀을 합니다. 그가 내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복되었습니다.

위협이 있는데도 살리는 말을 하는데 인색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혀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줍니다.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사용할 때는 죽이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가 힘이 있습니다. 대부분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 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보다 한 마디 말이 오래 남습니다.

성경 잠언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너무 죽이는 말이 난무합니다. 우리가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만~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관리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하면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관리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오래 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말은 오래 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곧 지루해 하고 힘들어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려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든 논리적 근거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격려의 말, 칭찬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 긍정적인 말, 적극적인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살려주는 말입니다. 말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를 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제단 앞에 오지마!"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습니다.
"응, 네가 앞으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되었답니다. 티토 대통령은 그 말대로 제단 앞에서 물러가 하나님을 비웃는 공산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쉰 소년은 그 말대로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3. 죽이려는 행동과 살리려는 행동

사람이 죽이는 마음을 가지면 죽이는 말이 나오고 죽이는 마음과 말을 하다보면 행동 역시 죽이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어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잘못되니까 말도 죽이는 말을 하고 행동 역시 죽이는 행동을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송사하기 위해 은밀하게 예수님이 하는 행동을 엿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니까 어떤 악행을 저지릅니까?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정적인 헤롯당을 찾아가 죽일 모의를 합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며 안식일을 어긴다고 고소하려는 자들이 안식일에 죽이려는 모의를 합니다. 지극히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고소하여 십자가에 달아 버립니다. 죽이는 행동, 악행을 하는 쪽으로 행동이 발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신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안식일날 손 마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살리는 행동을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이려는 생각, 죽이려는 말, 죽이려는 행동을 한 바리새인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자신들이 목적한 대로 수많은 군중들이 그들을 따랐습니까?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바리세인들 앞에서 살리려는 생각, 살리려는 말, 살리는 행동을 하신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7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가로 갔습니다. 그 때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지지도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8절 보십시오. 전국적인 지지를 얻은 것입니다. 경상도에서만 전라도에서만 지지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허다한 무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병자들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배를 타고 조금 떨어져 말씀을 전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11절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사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리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손마른 사람처럼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라하면 모든 체면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같지만 "네 손을 내밀라"하면 말씀의 능력을 믿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변화와 기적을 체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살리는 길이면 어떤 행동이든지 실행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원합니다. 경제적인 손이 말라있습니까? 정신적인 손이 말라있습니까? 전도의 손이, 봉사의 손이 말라있습니까? 살리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살리시는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며 죽는 생각 죽는 말 죽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죽음을 향해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처지 어떤 환경일지라도 나도 살고 가족도, 교회도, 이 시대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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