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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역자 더디오와 가이오 (롬 1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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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첫머리에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쓰지 않고 대서자가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는 AD 1세기경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주체가 바울이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글씨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문맹률이 상당히 높았고 지금도 히브리어는 자음만으로 되어 있고 모음이 없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이 편지를 쓴 AD 1세기는 우리나라의 신라나 백제시대의 아주 초창기 시대였으므로 그 시대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편지의 발신자인 사도 바울은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은 다른 사람인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글씨를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서자를 세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편지에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큰 글자로 썼다는 것이며 내 손으로라는 것은 다른 것은 다 다른 사람이 썼지만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지막 인사는 내 손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또 큰 글씨로 썼다고 했는데 큰 글씨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서는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앞부분까지는 다른 사람이 쓰고 문안하고 있는 이 부분은 친필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써 이렇게 쓰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만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다른 편지도 다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모든 친필로 쓰는 글씨는 큰 글씨로 썼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눈이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눈이 나쁘게 된 이유를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데 13절에서는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갈라디아서는 조금 섭섭한 마음을 표현한 편지입니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잘 따르다가 나중에는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그 까닭을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원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흔들어 놓으니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바뀌어 사도바울에게 지금까지 속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사도 바울의 인격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는 좀 거세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보통 편지의 앞에서는 인사를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서두에 인사도 없는데 너무 섭섭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분위기는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은데 여기에 대한 섭섭함을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육체의 약함이었을까요? 갈라디아 4장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게 영접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그렇게 잘 영접하다가 이상하게 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라는 말을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복이 있을 때는 주의 종을 하나님의 천사로 받아들일 때이고 돌아서고 나면 그 복은 다 달아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루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처음에는 사도 바울을 대단히 사랑하고 존경했다가 중간에 어떤 사람이 하는 말 몇 마디에 그냥 바뀌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에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서자를 두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눈이 좋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맨 처음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러 다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눈을 뜨지 못하고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8절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사람의 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눈부신 광채를 보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사도 바울이 눈이 좋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밤빌리아를 선교하였는데 그 곳은 북쪽 높은 지대로 눈을 나쁘게 하는 벌레나 병들도 많았는데 거기서 동양의 눈병이 걸렸을 것이라는 유력한 주장이 있습니다. 그 때에 거의 시력을 잃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는데 어쨌든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모든 글에 대서자를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에 서명을 하는데 서명도 보면 아마 글씨를 굉장히 못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더디오라고 대서자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모든 성경에서 유일하게 로마서에만 대서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물론 사도 바울의 허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 많은 대서들 중 왜 로마서만 허락을 했을까 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편지들이 있는데 모두를 다 더디오를 대서자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서자로 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왜 더디오에게만 이런 대서를 허락했을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차별대우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니다. 이유는 우리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사도 바울도 하나의 인생인지라 어쩌면 특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늘 공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인지라 이런 연약함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연약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디오를 아주 좋아해서 그의 이름을 쓰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공평성을 지켜나갈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입니다.

저도 연약한 인생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도 과연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증거하는가 하는 문제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능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정직하게 그 문제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때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저 분이 인간적이구나, 좀 치우쳐 졌구나 라고 받아들이지 말고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로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과 은혜를 덜 받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종이 치우쳐 어떤 사람을 편애하여 문제가 되고 그래서 그것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면 하나님께서 정리하실 것입니다. 너 이제 그만하라고 하든가 어떤 다른 형태로 정리할 것입니다. 입을 막아버리든지 목을 아프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여러분 측면에서는 그 분이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동안에는 늘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었을 당시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마땅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물을 사람을 세워두셨는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기들이 판단했습니다. 겉으로는 사실 그랬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늙었고, 두 아들들은 제사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묻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의 종에게 묻기만 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어렸지만 사무엘에게라도 물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엘리에게도, 엘레의 아들들에게도 사무엘에게도 묻지 아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궤를 들고 가다가 대패하였습니다. 연약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종입니다. 흠이 있어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 대서자 더디오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면 그는 대서노릇뿐만 아니라 비서노릇도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봉사를 많이 했으면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가 나왔을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월급을 주는 고용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대서자 더디오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로 인해서 수천 년 동안 로마서를 통해서 더디오라는 이름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고용인에 대한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고용인, 자기의 비서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생각했습니다. 급여를 주면서도 함께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조금 베풀고 도와주고 월급을 주는 사람을 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사무실의 직원을 마치 자기직원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할 노릇이 아닙니다. 전부 다 내형제요 내 자매요 내 딸이요 내 누이로 생각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노릇입니다.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이렇게 차이 납니다. 내년에 모든 구역들이 힘써서 복음을 전할 것이고,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 목사님들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항상 그들을 우리 교회 목사님들보다 더 귀한 목사님으로 생각하고 평신도 선교사라고 할지라도 똑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해야합니다.

더디오 당사자에 대해서도 하나 더 생각해봅니다. 그 자신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월급 받는다고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켰다고 생각해야합니다. 피차간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유급이든 무급이든 간에 다 하나님께서 맡기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큰일을 주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들 눈에 좀 작은 일을 주시기도 하는데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눈에 큰 일 작은 일이 정말 있을까요?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보조자가 아니라 똑같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울이나 더디오나 피차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나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피차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교회에서는 인간적인 눈으로 큰일을 하거나, 작은 일을 하거나 간에 다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지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서는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나뉘어 지는데 그것을 쓴 사람을 대선지자, 소선지자로 나눕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대선지사, 어떤 사람을 소선지자라고 말합니까? 큰일을 했다 작은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편지를 길게 쓴 사람을 대선지자, 짧게 쓴 사람을 소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소위 더 큰일, 작은 일이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만 그러할 뿐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큰일 하는 사람이든지, 소위 작은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그 일을 하나님께서 시켰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큰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큰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쩌다가 나에게 이렇게 귀한 일을 맡기셨을까를 생각하고 감사해야하고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생각해야합니다.

하나 더 볼 것은 안질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안질로 인해서 글을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일종의 장애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장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안질 등의 장애 때문에 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온전하고 돈이 많은 것보다는 차라리 경제적인 장애 때문에 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인 능력, 건강상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능치 못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바울은 안질 때문에 더디오라는 사역자 한 사람을 더 세웠습니다. 일을 나누어서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역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핑계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든지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 23절에는 나와 온교회를 돌봐주는 가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돌봐주는 것은 집주인이라는 이야기이므로 이 사람은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했다는 것은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온교회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온’이라는 말은 모든 교우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를 찾아오는 손님들, 여행객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가이오는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우들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과 잘 곳을 제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이오 집이 조금 여유가 있었겠지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이오는 크든 작든 간에 자기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곳으로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집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집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비싼 집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큰집도 있고 작은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서 그 집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 집에 우리가 몇 년 살 수 있을까요? 툴툴 털고 다 버리고 갑니다. 잠시 살다 갈 것인데 그 집이 정말로 어떻게 썼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됩니다. 작은 집이라도 찬송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제가 우리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부목사로 있으면서 여러분과 함께 교회를 분당에 개척한 적이 있습니다. 1995년인가 1996년쯤에 여전도회에서 연말이 되어 돈이 남았는데 어디에 쓸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쓸 곳이 없으니 다른 곳에 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떤 분이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하여 부랴부랴 그 여전도회 권사님들에게 그 돈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이미 썼다고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권사님들이 의논하여 1000만원을 주시면서 개척하는데 쓰라고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한 권사님은 1000만원으로 개척이 안 되는 줄 알고 자기 집을 팔고 십일조를 가불하여 개척하는데 도와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개척하겠다는 목사님과 저와 권사님 내외분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십일조를 가불하여 드렸습니다. 여러분, 집이 비싸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집이 아마 지금쯤 30억 정도 되는데 당시는 1/3도 제대로 되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혹 지금 가슴아파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집에 살 수도 있고, 작은 집에 살 수 있습니다. 전세 살 수 있고 월세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부디 집뿐만 아니라 건강, 직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가치있고 의미있고 참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3절에서 나와 온교회를 돌보아주는 가이오라고 말씀하셨는데 2천년 동안 이 이름이 노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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