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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최고수 (마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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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무엇을 갖추면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인생의 최고수가 되려면 우선 돈이 많아야 합니다. 그 다음 권력과 명예가 필요합니다. 외모도 출중하게 잘생기면 더욱 좋습니다. 거기다 머리까지 좋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돈이 있다면 풍수가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여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신체 건강하면 각종 스포츠와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종교생활까지 착실하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음 수양을 하면서 적당한 때 남에게 덕을 베풀 줄도 안다면 완벽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공부는 신분 상승을 보장해줍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필요한 자격을 얻어 취직을 잘하면 상류 사회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남보다 빨리 성공하면 좋습니다. 또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을 가리고 운동을 합니다.

잘 갖춰진 환경에서 풍요롭게 산다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만약 이런 풍요를 누리고 산다면 그 다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상태를 유지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늙습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했습니다. 그는 삼천 동자를 풀어서 늙지 않는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50 세를 넘기지 못하고 수은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중동지역과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대왕도 30 대 초반에 죽었습니다. 로마제국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던 네로황제도 32세에 죽었습니다. 온갖 진기한 음식과 수많은 미인을 품었던 조선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3.5세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과 부귀를 누렸지만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와 권력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영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는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청년을 관원이라고 소개합니다. 관원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이거나 산헤드린 회원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이 부러워할 세 가지를 가졌습니다. 젊음과 재물과 권력입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은 아직 재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젊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이 청년은 놀랍게도 젊었지만 부자입니다. 그것은 그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거기다 권력까지 얻었습니다. 사회에서 이정도 되면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간은 부도덕하다는 것입니다. 실력보다는 돈으로 권력을 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청년은 예외입니다. 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교육을 받고 컸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짓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올 때 무릎을 꿇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이 사람은 예수님이 길에 나타나자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대부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을 존경과 경외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달려 나온 것은 그만한 열정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은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자존심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질문도 자기 명예나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첫 질문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입니다. 그는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은 신앙의 핵심을 다룬 것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 영생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영생에 대한 보장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하고 반문한 말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는 건강, 젊음, 돈, 명예, 신앙적 겸손, 도덕을 두루 갖췄습니다. 세상에서 이만하면 정말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 땅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 이후에 영생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 확실하게 보장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청년의 영적 갈급함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오히려 교만하게 보셨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에는 처음부터 반감이 실렸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예수님은 그가 의도한 대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은 기대하던 답이 나오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계명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하는 계명은 모두 613 가지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전해준 계명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이 613 가지 계명을 외워야 합니다. 계명을 알아야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계명을 다 안다고 해도 다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계명을 지키는데 도전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613 가지 외에 더 세부적인 계명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보다 더 철저히 법을 지키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완벽주의자입니다.

이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는 바리새인만큼이나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한 계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어느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하는지 되물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613 가지를 댈 것도 없이 십계명 가운데 몇 가지를 드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여섯째 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일곱째 계명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여덟 번째 계명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아홉째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다섯째 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정신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가운데 앞부분은 빼고, 사람에게 대하는 계명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계명 대신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계명 순서가 약간 뒤바뀌긴 했지만 부자 청년이 듣기에 반가운 답이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있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고 반문합니다. 이제 청년은 예수님에게 마지막 답을 기대합니다. 자기를 들어 크게 칭찬하면서 영생 구원 받을 모범적인 사람으로 소개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계명에 자신만만한 청년은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이 청년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이웃 사랑은 계명이 아닙니다. 계명의 정신입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켰습니다. 그 계명을 만든 본래의 정신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계명의 본래 뜻을 놓치고 계명을 지키면 그 법에 매이게 됩니다. 법은 질서와 자유를 위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본래 정신을 잃어버리면 법은 오히려 감옥이 됩니다. 법을 이용하지 못하고 법에 묶이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살인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도적질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간음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짓 증거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부모에게 불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을 치우고 계명만 받으면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법이 사람을 묶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할 형벌 때문에 억지로 법을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찌릅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지키는 것 같은데 이웃을 사랑하는가 묻고 계십니다. 청년은 계명을 지키고 있으니까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한 것입니다. 뭐가 더 부족한게 있냐고 되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이는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그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여기에는 영생을 위해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은 제자가 되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 장에 제자가 되는 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청년은 제자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영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오기 전에 이미 영생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선한 일이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계명을 지켜왔기 때문에 당연히 영생할 줄 알았습니다. 천국에서 계속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를 이어 누릴 줄 알았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청년은 그것을 굳게 믿고 살았습니다. 이제까지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을 착실히 잘 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얻었듯이 천국도 영생도 그렇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에 그런 기대를 깨뜨렸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정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인가? 그 다음 얻는 것은 무엇인가? 재산을 내 놓으라니? 전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일부분만 말하는 것인가? 재산과 영생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 다닌다? 옆에 서있는 제자들을 보니 궁상맞아 보입니다. 행색이 자기 스타일이 아닙니다. 제자와 한 무리가 되어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청년은 이것저것 따져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재산은 청년을 지금까지 만들어 준 것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힘입니다.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도 영생을 얻는 길이 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청년은 깨달음을 얻고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영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기가 막힌 처방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재산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그 보화들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보화는 땅에서 그가 내놓은 재산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으려면 먼저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리에서 붕어빵을 파는 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한 손에는 과자를 한 손에는 막대 사탕을 들고 있었습니다. 붕어빵 장사하는 분이 아이에게 붕어빵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입을 내밀고 붕어빵을 입으로 받았습니다. 입으로 받는 모습을 보고 욕심은 타고 나는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붕어빵이 뜨거웠나 봅니다. 입을 데인 아이가 붕어빵을 떨구면서 울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워서 울었는데 그 다음은 떨어뜨린 붕어빵이 아까워서 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모조리 움켜쥐려고 듭니다. 그러다가 이것도 저것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성지수인 EQ를 측정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고는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잠간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과자를 먹지 않고 있으면 더 많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과자를 먹지 않고 기다리는 아이는 감성지수가 높은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먹으면 당연히 EQ가 낮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장은 잃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더 큰 보화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청년은 EQ가 아주 낮았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생을 얻으려면 EQ도 높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과감하게 포기하고 버리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기억하시고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실 때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귀한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야 갚아주신다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바로 갚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성경에 그런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29-30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금세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여러 배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빚을 지고는 못 견디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는 가장 위대하고 큰 빚은 순교입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서만 갚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는 하나님이 가장 부담스러워하시는 빚입니다. 결국 그 후손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온갖 것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돈은 그 원하는 대부분을 해결해 줍니다. 그러나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 영생은 돈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 영생 구원을 위해, 주님을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눈 딱 감고 내놓으시겠습니까? 더 큰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이 청년은 돈이 있습니다. 젊음이 있습니다. 명예가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선한 일도 많이 하고 율법을 지키며 산 바른생활 사나이입니다. 예수님께 달려 나오는 종교적인 열정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겸손의 미덕까지 갖췄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인생의 최고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런 최고의 것들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는 욕심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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