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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 (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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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도 벌써 3주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때쯤 되면 신년의 기분은 어느 정도 가시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의 삶의 시간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시간의 끈을 놓치지 말고 신년의 기도한 내용을 붙잡고 결국 그 일을 이루어나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구원의 소망을 주고 구원의 확신과 삶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망하는 심정으로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그것이 온전한 모습을 이루어 완성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믿음의 백성의 아름다움을 시작하신 분께서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특별히 주님은 시작하셨으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를 믿게 하셔서 구원을 시작하셨다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제 삶의 은혜와 능력도 온전히 완비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는 매우 어설픈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차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모임입니다. 처음에 예배를 드리고 그 이외에 복음을 전하며 교제를 하며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어설픈 모습이 점차적으로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어져가는 것을 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마음속에 모든 것이 어렵고 무엇인가 어설픈 것도 있고 완전치 못한 모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완성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루어가고 있는 어떤 일이나 모습도 그렇습니다. 부족한 모습에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것은 조금 더 조금 더 완성된 모습을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교회도 개인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모든 모임도 마찬가지로 점점 완성되어져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생각하면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생각해보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든 시작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이 아름답지만 마침은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내 자신의 인격과 믿음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완전하고 아름답게 완성되어져야 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생활과 성품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정서적 설득은 이루어져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마음에 각오는 되는데 그것이 생활 속에서 직접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의지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일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낙심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내 마음에 원하는 것과 실제가 다른 것은 훈련의 기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차이를 훈련을 통해서 채우게 되고 그러하므로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마음먹음과 행동이 일치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심을 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는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직접적인 가르침을 보았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능력과 역사의 행적을 보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전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공과를 다투고 자리다툼을 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한 깨달음과 이해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은 후에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허물 많고 여러 가지 헛점이 많았던 제자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 주셨고 허물과 여러 가지 아픔들을 덮어 주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눈앞의 사실 뿐 아니라 그 뒤에 이루어지는 멀리까지의 사실도 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이와 같이 지금은 형편없는 모습이지만 언젠가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고 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지금 심어놓으면 시간이 지나 어떤 계기가 돼서 그것이 싹이 나고 가지치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판단은 역시 옳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다 도망치고 주님 앞에서 그들의 모든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다시 모이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을 다하여 기도 했을 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변화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실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미리 예측하는 사람, 바로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이 예지력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실망하지 않고 우리의 진정한 은혜입음과 변화를 갈망하며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현재의 내 모습이 전부 다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갈망하고 추구하고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길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한 번 해서 잘 안 되는 일, 두 번 해서 잘 안 되는 일도 열 번, 백번 하면 글 일이 잘 될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고, 끈기 있게 시도하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능력을 공급받기 전에 그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끈기와 인내와 시도와 용기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의 변화라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와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는 따라서 우리 자신을 기대해 봄직 합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직업이 어부인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다’라는 것은 ‘그의 최선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다가 주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깊은데 그물을 던져라 해서 그물을 던지니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혀서 자기 배에 다 싣고도 모자라 자기 동무의 배에 한 배를 더 실었습니다. 그런데 뭍에 나와서 베드로가 주님 앞에 인사할 때에 뭐라고 인사했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적 역사의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고백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신적 능력을 깨달았던 것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깨우쳐 주신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빌립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갑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니 함께 가보자. 그 때 빌립이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코웃음 치냐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예수님의 출신지를 들어서 비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빌립은 그와 같은 비난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단 한 마디로 제압해 버리고 맙니다.

“와 보라, 네가 와 보면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이야 말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이기 때문에 빌립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을 따라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시고 그가 무화과 나무아래에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아래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말씀 하실 때에 깜짝 놀랍니다.

처음 만난 예수님이 나의 삶의 모습을 아신다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그래서 믿느냐 너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고 나다나엘을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쫓게 됩니다.
나다나엘의 마음의 변화는 나다나엘이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압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할 때 이 여인은 감정이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동네사람을 피해서 땡볕에 물을 길러 나왔던 사람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어도 하나도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날카로운 날이 선 말로 반박하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변합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물 길러 왔던 물동이를 내려두고 사람 피해서 다녔던 동네로 내려가 사람을 일부러 만나 그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구원받게 합니다. 너무나 큰 변화지요.
사람을 피했던 사람이 사람을 찾아 나섰고, 사람을 피했던 사람이 사람을 설득시켜 데려올 능력도 생겼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면 이와 같이 변화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해서 깨달을 만한 신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나다나엘도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던 마음이 오히려 예수님을 깨닫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처럼 눌리고 있던 사람이 자신있게 사람을 초청할 수 있는 담대한 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은 일을 가지고 작은 불씨로 시작하신 예수님이 마침내 우리들에게 온전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작은 소원하나를 주셨던 주님이 어느 날 그 소원이 마침내 실현화 되고 그것이 온 세상을 덮을 수 있는 큰 능력과 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란 결국 나 자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주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착한 일, 선한 일, 영원한 생명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모함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것이 더욱 진보되고 발전되고 확장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약함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약한 것을 강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간악함이 우리자신이 선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을 우리는 분연히 뿌리쳐야 합니다.

요나는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기회를 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니느웨는 이스라엘 백성의 적국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원수 갚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모르고 멸망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고 마침내 요나는 갖은 고초 끝에 거기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서로 대함도 시간이 지나면 더욱 더 아름다워져 가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좀 부족한 듯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더욱 더 괜찮아 보이고 만나면 기쁘고 도전받고 참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될 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은 내 자신의 인격과 내 자신의 관계와 내 주변의 모든 상황까지도 변화시키는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처음 볼 때는 좀 부족한 듯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훌륭해 보여야지요. 만나면 기쁘고 도전받고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야지요. 우리 믿음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뭔가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해요. 그 사람 만나면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 사람 만나면 뭔가 마음에 도전이 생기고 그 사람 만나면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서 말씀을 들어도 설교말씀을 들으면 뭔가 깨달음이 있어. 마음에 용기가 생겨. 마음에 자신감이 생겨. 마음에 확신이 생겨.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대화 할 때도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인가 마음에 아이디어를 얻어야 되요. 그 사람과의 삶을 통해서 무엇인가 용기를 얻어야 해요. 저 사람 저렇게 사는 것 보니까 나도 저렇게 살면 되겠어. 저 사람 저렇게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 보니까 나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어. 저 사람 저렇게 하는 것 보니까 아 나에게도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하는 이와 같이 돕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럴듯한데 시간이 지나면 지겹고, 피하고 싶고, 안 만났으면 좋겠고, 어느 날 내 옆에 없어졌더니 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옆의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 사람 보기만 하면 아이디어도 생기고, 용기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쁩니까? 아니면 괜히 피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이와 같은 마음의 진보와 발전,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가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 지금 제 말씀을 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잘 하면 여러분 참 잘한다고 칭찬 받습니다. 그 사람 참 노력 많이 했어.열심히 애썼어. 능력 좋은데. 이런 칭찬을 받아요.
아주 잘하면 “참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해”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잘 하면 여러분의 능력이 칭찬 받지만, 아주 월등하게 잘하면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신 거야, 이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골리앗을 넘겨 뜨렸을 때 다윗이 위대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기드온이 삼백명의 용사를 가지고 미디안의 대군을 무찔렀을 때 기드온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왕 잘할 바에는 아주 잘하고 특별나게 잘 해야 합니다. 그냥 어느 정도 잘하고 이정도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 성가대가 여기 있는데 어느 정도 몇 년하면 악보도 잘 보고 음도 제대로 낼 수 있죠? 그럼 이만하면 되겠다하고 연습시간을 줄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잘하면 이왕 잘하는 김에 아주 잘 해 버리자 하고 더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으며 우리는 점점 진보하는 믿음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잘 할 바에야 아주 탁월하게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비교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절대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주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경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루어져 가는 우리 삶의 모든 주변 여건과 모든 삶의 주변 세력들과 이루어지는 경주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에게 어떤 발전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또 나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이 나로 인하여 무엇인가 발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전을 주고, 감동을 주고, 무엇인가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 번 인사 합시다.
“당신만 보면 용기가 나고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우리 서로 보면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소망이 생겨야 합니다. 여러분 일하다 잘 안 풀리는 것도 갑자기 그 사람 보면 생각이 바짝 나야 합니다. 또 그 사람 보면 정신이 번쩍 나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마음에 용기와 소망과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루는 모든 삶의 사역과 봉사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더욱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부족한 모습이 점차 완성된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점점 나빠지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참 이상하죠?
교회에 나와서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일년 이년 나오면서 믿음이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점점 굳어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보하지 않으면 굳어지는 겁니다. 관성적으로 돼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날마다 상향 진보적 자세로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지경과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그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네 단계를 말할 텐데 여러분은 어떤 단계인가 봅시다.
첫 번째, 나 하나 일 잘 감당하는 사람.
두 번째, 다른 이들과 일을 세워주어 그들에게 그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세 번째,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사람.
네 번째는 그 영역이 자꾸 넓어져 현 시대뿐 아니라 후손에게 까지 물려줄 유산을 축적해가는 사람.
여러분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나하나 잘 하는 단계, 다른 사람 세워주는 단계,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사회에 도움을 주고 기여하는 사람, 마지막은 이 시대를 넘어서 후세대까지 물려줄 유산을 축적해 가는 사람.
우리들은 대부분 네 번째죠?
능력이 없으면 믿음이라도 있어야 해요.
믿음이 없으면 말이라도 잘해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말이라도 ‘아멘’ 하고 그것이 우리 마음에 믿음이 되고 믿음이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보의 한계를 둘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실지 몰라요. 저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발전시키실지, 우리를 어디까지 사용하실지 아무도 몰라요.
여러분 형들에게 빵하고 치즈, 위문품 갖다 주러 다윗이 전쟁터에 위문품 갖다 주러 갔었어요. 그런데 그 길이 왕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어 버린 겁니다. 어떻게 다윗이 그 길을 알았겠습니까?
모세는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광야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그 길이 광야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나 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심부름꾼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민족을 이끌어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아무도 몰라요. 기드온은 먹고 살려고 소심하게 포도즙 틀의 밀가루나 빻아서 먹고 있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민족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어찌 그가 그 자신의 길을 알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두 번째 의지와 결단력 추진력의 부족으로 인한 좌절이나 혹은 인간의 한계로 인한 문제까지도 주님께서는 결국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들에게 뭐가 필요한가 보니까 대강 이런 것입니다.
첫째 모든 상황을 잘 분석해서 판단하는 판단력이예요. 어떤 일이 옳고 그르고 어느쪽인지 정확히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는 판단한 것을 가지고 결심하고 결단하는 결단력이 필요한 겁니다. 판단은 해 놨는데 자신이 없어서 결단을 못해요.
셋째는 결단은 했는데 끝까지 추진해야 하는 추진력입니다.
그 다음에는 추진한 것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지구력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판단력, 결단력, 추진력, 지구력 이 네 가지가 있어야 결국 우리들에게 주어진 우리의 사역을 이룰 수 있는데 대부분 네 가지 능력을 다 갖춘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능력과 은혜를 부여하시는 겁니다. 우리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셨으면 마침내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열심과 소심사이를 방황하던 사람입니다. 어떤 한계선상에 있던 사람입니다. 갑자기 열심이었다 갑자기 소심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주를 위해서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는 멀쩡히 예수님 부인하고 살아남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도저히 앞뒤가 구별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달라졌어요. 오순절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달라졌어요.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걸인을 보고 마음에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은과 금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전까지 베드로는 자기에게 예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전에는 예수의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에 안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 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에는 한 가지 믿음으로 그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예수님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담대히 얘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제거되니 자신감에 그를 따르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유대주의의 한계가 있었지만 주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함으로 그 한계를 깨뜨리는 역사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본인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부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무지와 교만을 깨뜨리고 그를 사용하셔서 아름답게 은혜를 이루시는 주의 손에 들림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도바울은 원래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 많이 하고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만 가장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도를 다 망가뜨리고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는 도구 밖에 안됐어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납니다. 그의 삶이 바뀝니다. 그 다음에 그는 주를 위해 그의 삶을 드립니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막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막아요. 선생님 예루살렘으로 가면 사람들이 선생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백하죠.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나의 달려갈 길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행함에 있어서 내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붙잡혔어요. 감옥에 갇혔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죽음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 감옥으로 이송돼 그의 마지막을 맞으면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졌어요.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달라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마침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마침내 끝날 까지 이루신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혈기로써 주의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혈기는 광야에 묻혀 지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를 볼 때 가장 영화로운 장면이 뭡니까?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는 장면이에요. 홍해를 가르는 장면입니까? 반석을 내리쳐서 물을 내는 장면입니까? 모세의 맨 마지막 장면을 보면 모세의 모든 것들이 집대성되어 나타나지요. 뭐죠?
모세야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죠?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 제가 가나안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은 제 뜻에 의한 결정이 아니니 하나님의 뜻에 저는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인도하여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제게 맡겨주신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었기에 저는 이것을 이루니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오히려 그 백성들을 손을 흔들어서 축복하는 거룩한 믿음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믿음의 백성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야곱이라는 사람 보세요. 잔꾀와 열정은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을 받기 위해서 갖은 능력과 열정을 다 부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야곱은 어떻게 됐지요? 인생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형들의 팔림에 의해서 애굽으로 가서 과정을 거쳐서 애굽의 총리가 되잖아요. 형들이 곡식을 사러와요. 요셉은 자기를 모르게 하고 형들에게 너의 마지막 동생을 데려오면 내가 곡식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었죠. 그 동생을 데리러 집에 갔더니 야곱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사랑하는 요셉도 죽었는데 베냐민까지 가서 죽으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사느냐 라고 얘기합니다. 이미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한들 원하지 않는 들 결과는 똑같은 겁니다. 내가 베냐민을 보내려고 한들 보내지 않으려고 한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는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는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지요. 하나님의 뜻에 순응했던 것입니다. 그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줄 아는 성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모리아 산의 재물로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그도 알았어요. 내가 yes라고 말하나 no라고 말하나 결과는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 길이다 라는 것을 안겁니다. 결국 믿음의 백성이 깨달은 마지막 뜻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간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내 갈 길은 유일하게 정해진 한 가지 길이예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는 이러 저러한 많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길이고 따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길을 우리가 스스로 따를 때 그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리로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풀지 못하지만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일을 이룹니다. 여러분 마음에 어떤 선한 일이 시작되셨습니까?
한 사람이 천명을 돕기로 마음에 작정하셨습니까? 마음먹은 일이 실제화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일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드렸지요? 끈기를 가지셔야 돼요. 인내를 하셔야 됩니다. 용기를 가지셔야 됩니다. 기대를 가지셔야 돼요.

마지막 세 번째 우리의 마지막 빈 공간, 고독과 소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느끼고 베풀고 나눔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일을 이루어도 이루지 못해도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외와 고독으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지 못할 때 사람은 좌절과 소외 속에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실패한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주님의 실패를 보여주시며 승리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그의 실패했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은 실패의 못 자국이 아니라 승리의 못 자국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인간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공했어요. 귀신을 쫒고 병든 자 고치고 배고픈 자를 기적으로 먹이셨고 자연을 정복하셨어요.
가는 곳마다 성공하는 주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실패로 평가해 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실패로 평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은 실패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궁극적인 승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를 딛고 일어서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주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느냐, 그 실패를 통해서 너는 결국 성공과 승리의 자리에 이를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예수님이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어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요.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 이후에 그들은 모두 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자리에 나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좌절과 소외와 고독을 넘어서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다 이루었도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주님은 결국 실패의 장면 장면을 겪으면서 최종적인 승리로 나가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승리라는 것은 실패를 한 계단 한 계단 겪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실패가 없이는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패라는 것은 승리에 이르는 계단임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이루었을 때 우리의 자만으로 인하여 소외와 고독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작은 것을 이루었을 때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고립되고 소외되고 고독 속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이 조그만 것을 이루고 교만해지게 되면 첫째는 사람이 주변에서 떠납니다.
두 번째는 그가 이루었던 모든 일도 주변에서 다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무엇인가 작은 것 이루고 그것으로 자만하면 결국 우리 는 모든 것 다 잃어버리고 홀로 고립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리석어서 세상 사람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능력이 없던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들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들은 지혜가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그들이 무능하고 어리석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자 따라서 합니다.

삶의 축복은 내 주변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축복은 내 주변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아내의 소중함, 내 남편의 소중함, 내 자녀의 소중함,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소중함, 내 건강의 소중함, 호흡하고 있는 것의 소중함,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한 소중함 그것들을 깨달아 갈 때 비로소 우리 삶의 행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애틋하게 여겨지고 애틋하게 여겨지니 정성을 다하게 되고 우리는 그 가운데 모든 힘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소외와 좌절과 고독으로부터 해방되어 따뜻한 은혜의 훈풍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을 이해의 심정으로 바라볼 때와 오해의 심정으로 바라볼 때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것을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다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해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 마음 상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삐뚤게 매고 오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얼마나 바빴으면 저랬겠어? 하고서 잘못 매어졌네. 내가 한 번 매줄까?’ 하고 얼마든지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요.
그런데 넥타이 삐뚤어졌으면 ‘아이 저것도 모르고 칠칠치 못해’ 라고 생각하면 벌써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애정이 없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주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으로 채우시겠습니까?
훌륭한 사람으로 채우시겠어요? 아니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하다 생각하면 불행한 것이지요. 삶이라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전혀 새로운 삶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가 이루었을 때 가졌을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며 내 주변의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하며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 속에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일 잘해서 승리하고 성공했다고 합시다. 그 잘되는 과정 속에서 나 때문에 그 자리에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내가 잘 되는 것 때문에, 내가 합격하는 것 때문에 불합격한 사람이 있는 겁니다.
내가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내 승리와 성공이라는 것은 나 하나의 힘 때문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배려함이 있었던 거예요.
나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었고 달리는 사람에게 발 한번 걸어보세요 그냥 나가 넘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 발거는 사람 없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발 걸려고 달려드는 사람 있을 때 주변에서 ‘그러지마 달려가게 좀 놔둬’ 하고 말려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잘 가는 사람 그냥 놔둬’ 하고 주변에서 방해하는 사람 막아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잘 달려온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냥 잘 된 게 아닙니다. 그냥 어떤 일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배려해주고 보호해주고 방어해주고 도와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이른 겁니다. 그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었다는 것 자체가 모두가 내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는 나를 배려했던 사람, 나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 나 때문에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쫓겨났던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려야 할 모든 것은 나 혼자의 몫이 아니라 나누어져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나하나 잘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못 됐습니까? 내가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오르고 싶었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같이 애쓰고 고통을 나누었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의 심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 올랐다고 휘두르고 과시하는 사람들이 돼서는 안 되지요.
늘 말씀드리지요. 한번 또 따라서 합시다. <겸손함과 탁월함>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겸손과 탁월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겸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탁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까요. 또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없이 탁월해지면 그 자리에서 금방 내려올 수밖에 없게 돼요. 그런데 또 겸손한데 탁월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체험해야 돼요. 그리고 다른 이를 언제나 배려하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순간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일 상황 내 자신 모두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나를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실 것이야 라고 해서 나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린 나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린 또 상대방을 기대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우린 옆의 사람 대할 때도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될 모습을 생각하며 그대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옆의 사람이 앞으로 20년 후에 대통령이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지금부터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15년 후에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접하겠어요. 지금부터 잘 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친척만 되어도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사람 대할 때 항상 지금의 모습대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루실 모습을 생각하면서 대하면 누구든지 예수님 대하듯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옆의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당신의 최고의 모습으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을 대할 때 극진한 모습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더 잘 할 수 없다 하는 모습으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슬플 일이 없어요. 아무리 슬퍼도 위로받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도 최고의 모습으로 이룰것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기대합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도 믿고 기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일에 대한 근본적인 심정은 기대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대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기대 이상이셨습니다.
자 우리 오늘 마지막으로 따라합시다.

올해는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보고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고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 능력의 범주 안으로 들여오고 한 번도 내 지경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 지경 안으로 들여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것 한 번도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한 번도 내 지경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보며 소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오늘도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기대합니다. 도대체 우리들을 어디까지 데려가실지 어디까지 이루게 하실지 어떤 만큼의 능력을 주실지 우리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주를 바라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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