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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 도시 사회에서 신앙인의 반응 (행 17: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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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사회에서 신앙인의 반응
사도행전17:16-23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인구 1백명 중 87명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90% 가까운 사람들이 전국토의 14.9%에 불과한 도시지역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1960년 39.1%에 불과했으나 70년에 50.1%로, 80년 68.7%, 90년 81.9%, 96년 말 87.1%로 높아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추세보다 훨씬 빨리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U.N.통계에 의하면 1800년에 2.4%, 1900년에 9%, 1950년에 21%, 1970년에 27% 2000년에는 55%로 증가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도시화는 많은 유익도 있지만 많은 문제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인구가 좁은 곳에 모여 살다보니 도시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문제가 4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가 주택문제입니다. 둘째가 교통문제입니다. 셋째가 환경문제입니다. 넷째가 사회문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공통점은 잘 살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40대 이상 되는 분들은 어릴 때 늘 들어본 노래가 있을 것입니다. 산업화 시절 우리 나라의 지정곡입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기 위해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잘 살고 계십니까?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잘 못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장에 들어가서 나중에 사장이 된 사람도 있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술집에 팔려간 사람도 있고, 도둑이되고 강도가 되어 감옥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연탄 가스로, 사고로 일찍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네모 상자로 되어 있는 도시에서 태어나 늘 네모 상자에 갇혀 일하는 도시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아파트형 납골당으로 안치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성공적인 도시에서의 신앙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이해 추구형 인간이 아니라 가치 추구형 인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다 잘 살기를 원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계산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손해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상대를 정복해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도시 문화의 시류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 우상적 생각입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은 꼭 일치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과 정복하는 삶과는 꼭 일치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습니다. 지금 말하면 이번 올림픽이 개최된 아테네입니다. 당시 최대의 도시 국가입니다. 아덴은 BC5세기 이래로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이스토텔레스, 에피쿠르스, 제논, 등과 같은 철학자의 고향입니다. 풍부한 경제력, 세련된 철학적 전통, 아름다운 문학과 예술,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정치적 업적을 자랑할 만한 도시입니다. 세계의 문화적 수도입니다. 서양 문화의 두 기둥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면 헬레니즘이 발생한 곳이 바로 아테네입니다. 바울이 이 곳에 도착하여 이런 것들을 보고 황홀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이런 도시에서 출세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쫓겨다니는 자신의 삶이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한 첫 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16)
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독특한 바울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였습니다. 바울도 구경하기 위해 돌아 다녔을 것입니다. 아크로폴리스의 거대한 건축과 조각들은 그를 황홀하게 했을 것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함, 유명한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 등에 매료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맨 먼저 본 것은 도시의 화려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우상 숭배였습니다.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우상으로 완전히 덮여 있는 도시였습니다. 아덴은 우상의 숲이었고 하나의 거대한 제단, 거대한 제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5000-30,000개의 공공의 신상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30,000개의 신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민보다 더 신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상의 반짝이는 창 끝은 64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폴로의 상, 주피터, 비너스, 바카스, 다이아나, 이런 신상들은 헬라의 가장 솜씨있는 조각가들에 의해 돌과 놋쇠, 금과 은, 상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최고의 지성, 최고의 철학과 문화의 도시에 우상이 널려 있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우상을 섬겼습니까? 잘 살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혹 벌을 받지 않을까바 알지 못하는 신까지 만들어 섬겼습니다(23).

오늘날 도시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돈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10억을 벌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와 딸이 5천만원으로 10억을 벌기 위해 주식과 복권을 사서 망하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신앙인도 이것에 목적을 두고 살 수 있습니다. 빌딩을 지을 때 고사를 지냅니다. 최첨단 의료 장비를 병원에 들여 오면서도 의사들이 나와 돼지 머리 갔다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도시 문화가 화려한 것같지만 우상적 사고가 밑바닦을 흐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며 마음이 분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지속적으로 일정한 반응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아름다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예술적 창조성이 우상숭배에 쓰임받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인생관입니다. 그는 이해타산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입니다. 복음을 붙들고 참 가치를 추구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빌 3:8)"긴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가치를 추구하며 사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2. 타락한 도시 문화에 흡수되거나 도태되지 말고 신앙인의 핵심을 붙들고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않든 거대한 도시 문화에 밀려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 도시 문화에 흡수되어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핵심을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인생의 핵심을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도시 문화에 살든 신앙인에게는 두가지 큰 핵심이 주어집니다. 첫째는 문화명령입니다. 이 땅의 문화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 명령입니다. 생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시켜 행복한 천국의 백성으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대 사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대마다 사상이 지배합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허무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현실주의, 유물주의, 실용주의 등 시대 마다 각종 사상이 도시를 지배했습니다. 그 시대 사상을 복음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잘 못된 사상에 휘말려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당시의 문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사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에피쿠로스 학파입니다. 쾌락 지상주의 자들입니다.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270)에 의해서 시작된 철학입니다. 현재를 중요시 합니다. 죽음은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보이지 않고 죽을 때는 이미 현실과 죽음에서 떠나 있으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느냐?'것입니다. 쾌락이 선이고 고통이 악입니다. 도시 문화에서 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느 정도 돈을 벌게 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하고 삶의 최고의 목적은 쾌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나만 혼자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주의적입니다.

둘째는 스토아 학파입니다. 범신론자들입니다. 숙명론자들입니다. 제논(Zenon B.C.340-265)이 시작한 사상입니다. 신은 자연이고 자연은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의 뜻대로가 아니라 신의 뜻대로 되어지므로 모든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정욕을 억제하고 쾌락을 멀리하는데 있다고 금욕주의를 강조합니다.
오늘 도시 사회도 각종 그릇된 사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들을 변화시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1)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붙들고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혐오와 경악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선포하고 설득하고 변론합니다.
(1)안식일날 회당에서(17) 유대인들과 이방 예배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17)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라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정 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시장에서(17-18)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들과 날마다 변론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논쟁을 즐기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코아 학파를 설득합니다.
(3)아레오바고에서 설교(19-21)합니다. 학문적으로 당시에 독보적인 곳이며 아덴에서 최고의 기관 원로원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공개 강연장입니다.

2)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24)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시며(25)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고(26) 모든 인간의 아버지시며(28) 세상의 심판자이신 것(30)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헬라인들은 제우스가 우두머리 신이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주(創造主)이시요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시다고 전합니다. 역사나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핵심을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문화를 변화시키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3. 변화되는 도시에서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결실을 맺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두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한 편의 사람들은 기롱합니다. 조롱합니다. 우습게 여깁니다. 가치없게 여깁니다. 이 말장이가 무슨 말 하고자 하는가(18)라고 조롱합니다. 예수님도 하나의 신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편의 사람은 진지하게 다시 듣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하는 여인과 몇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적은 결실같지만 이 결실이야 말로 참으로 가치있는 결실입니다. 바울이 아테에서 가장 귀하게 얻은 결실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종착역에 이를 때 무엇인가 결실이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결실을 맺어야 할까요? 평생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정도로 끝내야 할까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결실을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시적인 것을 남기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것을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변화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가치있게 됩니다.

도시화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거대한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우리가 사는 분당도 신도시로 12만 4000여가구에 40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해에 우리 나라는 1/5이 이사를 한다고 합니다. 7/10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되는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가면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복음이 도시인들의 갈등을 극복하고 분열과 차별에서 화해를 시켜 줍니다.
복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발생된 빈부격차를 극복하고 공존하게 해 줍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정 파탄과 자살과 범죄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서 복음이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줍니다. 복음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낮선 이웃으로 가득 찬 도시생활에서 참된 교제를 회복해 줍니다. 친구와 이웃이 없는 고독한 도시인들에게 복음이 참된 친구와 이웃을 되찾게 해 줍니다. 복음이 지나친 경쟁과 물질적 허영, 향락문화와 병든 정신으로 황폐화 된 정서와 비인간화 된 정신에 새 힘을 주고 참 자유를 줍니다. 복음은 도시인을 치유하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도시의 각종 병리 현상을 치유하고, 비윤리적인 문화를 추방합니다. 도시인들은 온갖 향락문화 속에서 기쁨을 찾지만 타락한 상업성으로 감성은 더욱 둔화되며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복음이 매마르지 않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도시인들은 호화스러운 상품들을 쇼핑하고 재미있는 대중문화를 즐기며 불야성의 밤문화를 향유하므로 안식을 누리려 하지만 그와 같이 영리에 이용당하는 안식은 순간적일 뿐 환상에서 깨어나면 허무와 우울 뿐입니다. 복음이 참된 기쁨과 안식을 줍니다. 복음이 도시인에게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알려 줍니다. 복음이 힘들고 지친 도시인들에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회복시켜 줍니다. 복음이 위로를 주고 복음이 용기와 희망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남겨야 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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