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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열매(무화과나무의 교훈) (막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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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이란 분이 쓴 책 가운데 "나는 왜 크리스찬이 아닌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그는 자신이 크리스찬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변명하고 있는데, 러셀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1: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 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셨는데, 무화과 열매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버트란트 러셀'은 열매 맺을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라고 하는 분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사건이 과연 비합리적이고 상식에 어긋난 예수님의 실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특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본격적인 무화과 열매를 추수하는 시기는 6-7월경입니다. 그 때 무화과나무에는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이른 봄철인 3-4월에도 열매를 맺기도 하고, 때에 늦은 때인 9-10월에도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맺기 전에 먼저 잎사귀를 냅니다. 그리고 잎사귀가 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무화과나무의 특징입니다. 그러기에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했다는 것은 곧 열매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당연히 열매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나무에 다가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화과를 본격적으로 추수하는 시기는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무화과 열매를 본격적으로 추수할 때는 아닐지라도 잎사귀가 무성하게 있다는 것은 열매 또한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버트란트 러셀'이 이런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향해서 비합리적이요 비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께서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잘못된 신앙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가리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 외에는 별로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습니다. 무화과라는 말은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무화과나무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나무가 멋있는 것도 아닙니다. 건축용이나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입니다. 뿐만 아니라 땔감으로도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쓸모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안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원지기에게 이 무화과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이 있습니다. 7절에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가 땅에서 양분만 빨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를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에는 포도원의 땅만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 나무를 베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단순히 나무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무화과나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화과는 길거리 아무데서나 자라는 나무입니다. 이런 무화과나무가 어쩌다가 포도원으로 옮겨 심겨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받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를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얻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려면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못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19,21에 보면"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매가 없다는 것은 못된 나무이거나 죽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열매가 있습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제부터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먼저 물으실 질문은 저는 틀림없이 이것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위대한 성취를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영광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너는 나를 믿고 얼마나 변했는가? 네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는 사실입니다. 갈5:22에 9가지 열매가 있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열매는 바로 예수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세요?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십니다. 평화가 충만하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격이예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뭘 기대하실까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 예수님을 닮아 가는 존재,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인격을 기대하시겠지요. 저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많은 우리들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인격이 되기 위해서 역사 하시는 사건들이라고 생각해요. 주님이 그것을 위해서 허용하십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놓아두십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배워갑니다.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기쁨을 발견합니다. 때로 평화를 누리기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은 나를 집어넣으시고 이 요동치는 이 삶의 환경 속에서도 마침내, 마침내 견고한 평안의 사람이 되도록 주께서 나를 훈련해 주시는 줄을 믿습니다. 참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마침내 오래 참음의 인격을 내 안에 연단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열매는 사역의 열매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질문과 함께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 이것이 사역이에요.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열매! 자,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내 삶의 존재의 이유요, 예수님 때문에 기쁨을, 보람을 삶의 감격을 얻었다면 그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역의 과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열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 앞에 왔습니다. 주님 앞에 와서 은혜 받고, 주님 앞에 와서 구원받고, 주님 앞에 와서 용서받고, 주님 앞에 와서 기쁨을 얻고, 주님 앞에 와서 인생의 의미를 얻었어요. 그렇다면 이제는 가야돼요. 가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런데 우리가 왜 안가요? 왜 안가요? 가는 게 두려울지 모릅니다. 전도하다가 내가 그냥 사람들 앞에 창피를 당하지는 않을까, 왕따 당하지는 않을까,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요. 아마 예수님 말씀을 듣던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상명령, 마지막 명령에서 마태복음 마지막장에 보시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그러면서 무슨 약속을 하셨어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뭡니까? 항상 함께 하리라." 주님이 같이 가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가고자 한다면, 순종하고자 하면 함께 가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도의 현장에서 열매가 일어날 때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요15:8절을 보시면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두 번째로 이 무화과나무의 저주의 사건을 통해서 그 분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마가복음 11장 12절부터 14절까지, 그 다음에 20절부터 25절까지 읽었어요. 무화과나무의 스토리만 추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그 가운데 15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은 뭡니까? 그것은 소위 성전 청결의 사건이예요.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서 장사꾼을 쫒아 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보시니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과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에 의해 성전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신앙을 물질로 바꾸어버렸고, 성전을 시장터로 변질시켜버린 죄악을 향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섬기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이렇게 화를 내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단을 꾸짖은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채찍을 들어 내리치시고, 상을 둘러엎으시며, 사람들을 쫓아내신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어쩌면 제자들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화를 내셔야만 했습니까? 무엇이 예수님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습니까?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이 세속에 물들어 거룩함을 상실했고, 가장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곳에서 가장 인간적인 욕망에 노예가 된 사람들에 의해서 타락의 장소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이방인의 뜰에서 제사를 드리러 오면 제사 제물을 사야 돼요. 제물을 사는 과정에 있어서 흠 없는 제물을 사도록 권고하면서 거기서 막대한 이익을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그 이익을 제사장들이 취하고 있었던 거예요. 또 심지어는 외국에 서 오는 유태인들이 이제 헌금을 드려야 하는데 외국돈 드리면 않된다. 그래서 돈을 바꿉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이방의 뜰에는 환전소가 다 있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 있어서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막대한 이익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제사장들이 밤낮 그들이 제사를 집행하지만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요? 돈에 대한 이익 - 그것이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어요. 이런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참된 예배가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익밖에 없었어요. 신앙의 본질은 외면되고 그리고 잘못된 것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라면, 뭐 아무런 감동도 없고 그저 싸늘한 침묵 가운데 드려지는 냉담한 예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침묵은 바로 교회의 죽음을 알리는 침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묘지에 깃드는 적막 같은 것과 같은 침묵이 아닙니까?. 그 침묵은 경건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시체와 같은 침묵과 냉담한 무관심 속에서 예배를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발걸음 속에서, 어떻게 에스겔 골짜기에 울려 퍼지던 생기를 힘입은 군대의 행진을 들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사라지는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아무런 영적 감화도 없이 마치 패잔병처럼 세상을 향하여 걸어나가는 그들을 통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을 기대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예배의 회복을 통해 우리의 영성이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것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얼마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 예배의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삶이 얼마나 변화되고 있는지에 가장 커다란 관심이 갑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대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유일한 관심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시들어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주한다고 그렇게도 잎이 무성했던 무화과나무가 금방 말라버릴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22-24을 보십시오. " "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 앞에서는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곧 시들어 말라죽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믿음이 모든 문제를 여는 열쇠요 모든 일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근심합니까?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가 다 지고 가기 때문 아닙니까? 믿음이란 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근심할 일이 있어도 주님께 맡겨서 주님께서 맡아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왜 우리에게 열매가 없습니까? 믿음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왜 없습니까? 우리의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노력해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노력해서 맺는 열매라고 하면 나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안목사가 열심히 노력해서 맺은 열매라면 안목사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통치하실 때에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를 성령님께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입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그래서 생명의 땅으로 이 세상을 가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찬란한 열매를 맺는 그 비전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안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부어주신 십자가의 그 사랑 앞에 내 삶을 드려야합니다. 그것은 영적 불모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 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복음의 씨앗을 뿌렸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열매가 없을 때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갈 6:9에 말씀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만약 내 인생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잎 파리만 무성한 나무라면 주님은 내 인생의 나무 앞에 오시면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존재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로부터 영원히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이 저주가 두렵거든 열매를 맺는 인생을 향해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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