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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907년과 W.E.S.T (사 49:5-7, 롬 15:8-12, 마 7: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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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서 세례지원자들에게 문답을 할 때 반드시 묻는 기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은 누구시냐, 성령님은 누구시냐는 것, 즉 3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묻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슨 책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또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교회가 무엇이냐 또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는 것을 묻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을 중요하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 전도, 봉사와 친교 그리고 교육입니다. 이 단어들 즉 예배(worship), 전도(evangelism), 봉사와 친교(service), 교육(teaching)의 영어 첫 철자를 모으면 WEST 곧 우리 교회 이름과 통하는 “서쪽” 또는 “서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회가 수행하는 본질적인 사역과 우리 교회 이름을 결부시켜서 “교회로 교회되게 하라”는 교회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교회를 섬기다 보면 이 5가지 사역에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명실 공히 본연의 교회 모습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새 성전을 갖게 된 우리로서는 이런 본질과 본연의 사역을 위하여 다양한 사역을 단계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중요한 일이야말로 우리 단순히 자신의 인간적인 열심으로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금년 들어 교회의 표어도 총회 것 즉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를 사용하면서 100년 전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이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Again 1907!”이 그것이요, “Rise up Korea!” 즉 “한국이여! 다시 서라”는 켓치 프레이즈도 역시 그것을 말합니다.

  이런 우리 주변의 현실을 기억하면서 오늘은 그때 1907년의 부흥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가 그 본질을 확인하였으며 어떻게 그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였는가를 살피면서 그것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맨 먼저 당시 교회가 부흥운동에 즈음하여 예배 대하여 어떻게 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은혜를 체험하고 난 다음 교회의 예배에 어떤 변화가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회가 개최되었을 때 그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300리를 달려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2주간 동안 진행되는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영하 수십 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이 사경회 장소까지 오는 교통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동안의 숙박비도 전부 본인들이 부담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경회 기간동안 먹을 양식을 등에 메고 왔습니다. 정말 모이는 일에 있어서 그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소위 날 연보, 성미, 새벽기도, 통성기도, 주일성수 등 한국 교회의 많은 특징들이 이 즈음에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적어도 예수를 믿으면 무엇인가 그에 상응하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5일마다 서는 장날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도 기꺼이 그날 돈벌이를 포기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예배에 목숨을 걸다시피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원색적인 모습입니다. 마땅히 본받아야 합니다.

(2)  처음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유명한 부흥사 무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순회 전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의무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같은 선교사들의 전도 열심이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사경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오전에는 반별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정오에는 기도회로 모였고, 오후에는 일제히 나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불신자들을 인도해 와서 대형 전도 집회로 모였습니다. 그 시간은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9월 17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최초로 일곱 분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는데 총회는 그 중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을 결의 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1908년 감리교에서는 이화춘 선교사를 만주 용정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교인이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이것이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전도의 열심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그들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은 그때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같은 역사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오늘 한국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 개인이나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가 전도하는 일보다 다른 사업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도 역시 성령님과 상관없이 인위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이룬다고 해도 교회에 새로운 신자가 증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서 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가 복음 전도에 있고,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이 전도에 있다면 오늘 우리야말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해야할 때 인줄 믿습니다.

(3)  1907년을 전후한 우리나라 정정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905년의 을사보호 조약, 1906년부터 일어나게 된 의병봉기, 1908년 이준 열사의 헤이그 순국사건, 그해 7월 20일 고종의 폐위, 1909년 안중근 의사사건, 결국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백성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오직 한 가닥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당시 민족 운동을 벌이던 수많은 지식층 인사들이 교회를 활동의 장으로 정하고 선교사들을 보호막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대거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교회만이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일제하에서의 역사진행을 살펴보면 교회는 이러한 민족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였습니다. 3.1운동을 위시하여 일제에 항거하던 당시 한국교회는 그 전국적인 조직을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또 각처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너무 자체유지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너무 개 교회 주의로 흐르다 보니 세상 사람들 눈에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이런 지리멸렬한 우리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또 내면으로만 집중하던 우리들의 눈을 밖으로 향하여 섬기고 나누는 교회가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개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성전 건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널리 섬기는 일에 새롭게 헌신해야 될 줄 믿습니다.

(4)  1907년 부흥운동의 특징이 성경공부 즉 사경회 중심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우 충실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니 당시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는 당연히 성경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진리와 행해야 할 도리를 배우는데 매우 열심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하여 당시 한국의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새로운 규범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흥운동을 겪고 난 성도들은 도박, 방탕, 술 취함, 흡연 등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술 담배를 금하는 것이 마치 기독교인이 되는 무슨 기준같이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철저했던 윤리적 기준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교인들은 당연히 그 생활에 있어서도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에는 오늘같이 무슨 새 가족반이라든지 새 가족 양육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어련히 성경공부 반과 기도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초기 선교사들과 교회가 한 일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학교설립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가능하면 교회가 세운 학교에 자녀들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 예배드리는 기회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많은 인재들이 외국 유학을 하게 되어 그들이 당시 한국사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마치 산봉우리처럼 우뚝하게 서서 빛을 발한 것이 교회, 학교, 병원이었습니다. 교회가 영혼을, 학교가 교육을, 병원이 육체적 건강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상호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삼중적인 구조가 교인들을 전인적으로 구조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주일 하루 교회 출석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종교적 의무를 대신한다는 것과는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옛 전통 그대로 장년 성경 공부반이 주일 날 시행되고 있지만 여기 참석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는데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개인의 신앙은 물론 교회존재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교회는 물론 성도들이 인식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을 교육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2.  나는 지난 일 개 월 이상을 1907년에 관한 역사를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거 교회적으로 염원하면서 기도하는 평양 부흥운동이 지금 여기 우리 교회에서 어떤 모양으로라도 나타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교회가 여기 태화동에서 새롭게 출발하면서 평양에서 일어났던 그런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 새 출발의 원동력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옛 말에 “好事多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작심하고 새롭게 출발하려고 결심할 때 사탄이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합심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은 “나의 기름 부은 자를 해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를 내 손에서...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 한다”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다짐해 주셨습니다.

이제 1907년 평양에서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오늘의 한국 교회와 특히 우리 교회에 역사하실 줄 믿으며,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그 놀라운 나타나심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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