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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사람(1) - 아브라함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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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참된 경건의 두 가지 조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1)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
2)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긍휼의 마음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능력의 원천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 말씀과 기도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고,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동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작동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 그럴까?
원인은 분명하다. 자신의 삶 속에 진정한 경건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소아시아의 7교회 중, 사데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책망하셨다. “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듣기는 많이 들어서 귀는 커졌고 선생은 되어서 말은 많으나,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긍휼의 마음도 품을 수 없고, 세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도 없게 된다. 세상 가운데서 짓밟히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인식하고 가슴을 쳐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믿음 없음을 탄식하면서 주저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될 줄로 믿는다. 오늘부터 그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2007년도 우리 교회의 7대 중점 사역 중에 두 번째 사역, 기도로 무장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저녁예배시 기도학교를 개설하여 기도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기도학교의 사역이 기도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주일 오전 예배시에는 기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고자 한다. 특별히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기도의 사람들을 연구하고 소개해서 우리도 함께 기도자로 무장하고, 기도의 대열에 모두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위대한 중보 기도자로 알려진 아브라함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처음부터 존경할 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 받을 만한 그런 기도의 사람도 아니었다.

창세기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실망스러운 장면들을 여러번 목격하게 된다. 가뭄이 들어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 속이기도 했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자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장자로 삼으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그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중보 기도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중보기도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한다. 오늘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중보기도의 방법과 능력에 대하여 배우게 될 것이다.

창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영접하고 난 후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비밀의 말씀을 듣게 된다(창18:17-21).
(창 18: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그 비밀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증이었고,
2)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리고 거의 흥정에 가까운 대화 형식의 기도를 시작한다. 처음에 50명부터 시작한 기도가 끝에서는 10명으로까지 떨어졌다. 그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소돔과 고모라 성의 구원을 위하여 간청했다.

죄악으로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성은 결국 하나님의 불심판을 면치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조카 롯의 가정을 구원해 주셨다. 의인 10인이 없어서 결국 그 성을 불심판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되어서 롯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 응답받은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3가지 특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조카 롯과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기록에는 없지만, 이렇게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브라함아, 너는 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서있니? 네가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아브라함은 그대로 서있었다.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을까?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하셨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훗날 창성케 될 복된 약속의 말씀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며 감격하기 보다는 조카가 살고 있는 성읍이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인해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뒤로 물러가기 보다는 한 걸음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 하나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벧후 2:7에서 사도 베드로는 롯을 의인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롯은 그렇게 경건한 사람은 못되었다.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다툴 때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그러나 롯은 향락의 도시인 소돔쪽을 택하여 갔고, 그곳에서 불안한 낙을 누리고 있었다.

삼촌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수도 없이 권면했을 것이다.
- 야. 거긴 살 곳이 못된다. 나오너라.
- 야, 너 기도생활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그리고 삼촌의 충고도 듣지 않는 조카 녀석에 대하여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라도 잘 됐다. 그 놈의 성, 진작 망했어야 했는데. 너 좀 정신 좀 차려봐라.

이게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축복된 장래보다 당장 닥칠 조카 롯과 그가 사는 소돔성에 대한 심판으로 인해 마음이 다급해지고 근심이 앞섰던 것이다.

여기서 깨달은 사실! 중보기도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라는 것이다. 요즘 새벽기도회 말씀이 구약 미가서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미가서 1장의 내용을 증거하다가 제 마음이 한 구절 말씀에 걸렸다. 그래서 개인기도 시간에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다.
(미 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미 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미가 선지자는 애통하고 애곡했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누구보다 더 사람들의 죄가 눈에 잘 띠는데 왜 애통하는 마음은 없는가?! 탄식하면서 기도했다. 나의 마음 속에 사랑이 없음을 알고 괴로웠다.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 없이는 중보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이웃 사랑의 첫걸음이다.


2.겸손의 자세.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존재를 “티끌”로 비유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의식 속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주석가 매튜 헨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하고 이름 있으며, 공로가 있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초라하고 미천한 존재이며 비열하고 연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그분의 이름 앞에 겸손히 엎드린다.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대화가 흥정하는 장사아치의 대화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겸손을 이해한다면 결코 흥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박윤선 목사는 그의 주석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지 자기의 요구대로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억지로 겸손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성을 깨달았은 사람이었다.

(약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교만한 자는 결코 남을 위해 중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알고 겸손해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덧 입을 수 있다.


3.최선을 다하는 용기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에 적어도 소돔성에 의인 50명 정도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실로 무례를 무릅쓰고 의인 50명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용기 있게 피력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도전적 간구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국 사람들의 유교적인 관습에서 볼 때 부자지간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면 그 아들은 불효막심한 자식일 것이다. 그리고 유교적 관습을 기독교신앙에 그대로 접목시킬 때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봉건주의적이고 유교적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부자관계가 좋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수직적이면서 또한 수평적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이며 신뢰적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 만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뢰와 친밀한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용기 있게 하나님의 양보를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잠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성공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를 원치 아니하신다. 최선을 다했는가를 보신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기도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도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신앙생활에서 중보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조차 게으를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오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성령님과 성자 예수님의 탄식의 중보기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롯과 그 성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르짖는 중보의 기도가 있었다.

120년 전, 조선땅이 어두움에 덮혀 있었을 때 이 땅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 땅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나의 가정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세계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많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이다. 그 빚을 갚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의 거룩한 무릎을 꿇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구원과 타락한 성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했던 것 같이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죄로 관영한 이 세태를 보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가슴에 품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중보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의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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