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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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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적의 30%에 불과한 좁은 땅덩어리에 각각 다른 인종들이 약66억에 가까이 살고 있다보니 조용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각각의 삶의 방식이 다르고 사고구조가 다르다보니까 언제나 충돌이 빚어집니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에서든지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과 현실 속에서의 고민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 쪽에 기울어 삽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죄인 된 마음으로 말씀대로 보답하며 살기를 애씁니다. 반면 다른 사람은 현실 편에 치우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을 하셨어도 그건 그 옛날의 일 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교훈이 될 뿐이지 현실의 내 생활을 좌지우지 할 절대적인 표준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삽니다. 그런데 말씀 쪽에 기울어 사는 사람은 별 문제가 없는데 말씀과 현실을 별개로 생각하며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심심찮게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때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는<시험>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하는데 정말 넘어야할 산입니다. 현실 속에서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시험에 들지 말아야하겠고, 혹시 시험에 빠지더라도 그 시험에서 이겨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왜 생기느냐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기다리지 못해서입니다. 참지를 못합니다. 인내가 없어서 우리는 시험 아닌 것도 시험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 놓고는 그 시험을 견뎌 내지를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빨리 끝장내어 버려야 속이 후련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문제가 있어야 옳습니다. 왜냐면 시험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통하여 인격이 완성 되어져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나를 넘어뜨리려는<시험>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나를 강하게 연단하는<시련>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시험과 시련은 같은 개념같이 보이지만은 시험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있고, 시련이란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험은 남을 넘어뜨리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하면 시련은 이것을 통해서 강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비록 나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는<시험>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을 나를 연단시켜 정금 같이 나아오게 하려는<시련>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믿음의 자세가 인내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인내>란 무엇입니까? 참고 견디는 것을 인내라 합니다.“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인내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반근착절(盤根錯節)>이란 말이 있습니다.“비틀어져서 꾸불꾸불한 뿌리와 헝클어진 마디에 부딪쳐 보지 않고서는 날카로운 칼도 그 진가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얼크러져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을 말할 때 사용되는 고사성어 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근착절 같은 곤란한 일을 겪어 보아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살아가다보면 뜻이 있는 고통을 겪을 수가 있는데 그 고통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깊이 생각해보면 곧 시련이 없는 인생이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험을 어떻게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인내를 말하면서 이러한 시험마저도 만나거든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인내란 우리 인생을 부족함이 없게 하는 가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이 인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을성이 없고 기다리지는 것을 참 잘못합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생활화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걸 잘못합니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영국 사람이 혼자 있으면 줄이 생기고, 이스라엘 사람이 둘 있으면 세 개의 정당이 생기고, 일본 사람이 셋 있으면 네 개의 회사가 생긴다.”는 이야긴데 국민성이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개화기 때 영어 한 마디도 못하고 영국에 외교관 생활을 떠나는 사람은 한마디 말만 외워서 가면 되었다고 합니다.“애프터 유(after you!)”라고 하는 말인데“당신이 먼저 하라 나는 당신 뒤에 줄을 서겠다.”는 이 말과 이 말 뒤에 숨은 정신만 지키면 영국에서는 살 수 있었을 만큼 영국에서는 줄서서 기다리는 것이 생존조건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임기다리다 기다리다 망부석처럼 굳어버릴 만큼 우리 한국 사람도 혼자 기다리는 데는 도사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데는 철부지입니다. 급해집니다. 즉시 되어야 됩니다. 보세요, 얼마나 못 말리게 급한 사람들인가 아빠들이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간호사가 나와 한 사람에게 손짓을 하면서“축하합니다. 아들 이예요”하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읽고 있던 잡지를 팽개치면서 버럭 화를 내면서“뭐 하는 거야 차례를 지켜야지, 내가 저 사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왔는데”우리는 이 정도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술을 끊지 못하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술을 끊겠노라고 큰 결심을 하고 참아 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술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술집으로 전화한다는 것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로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그 전화를 담임목사님이 받으셨는데 집사님은 술집으로 오해하고 술 배달을 시켰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이 무안해 할까봐 모른 척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교인이 먼저 목사님 목소리를 알아듣고 하는 말이“아니, 목사님께서 왜 술집에 계세요?”하더랍니다. 이래가면서 먹어야 됩니까? 술을 끊는다는 것, 안 먹고 참아내는 것, 이걸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도 이제는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신앙 안에서 배워야합니다. 특별히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오더라도 인내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믿음 없는 인내는 고통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절망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소망, 이것이 그 속에 있을 때 넉넉하게 어엿하게 참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로 그 인내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참고 인내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는 시련의 원인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면서“정신병이 왜 걸렸을까? 또 어떻게 해야 정신병자가 나았나? 어디서부터 치료가 되기 시작하나?”하는 문제들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해 주는 유명한 의사들의 말을 들으면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정신병 치료의맨 먼저 중요한 것은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50%는 병이 낫는답니다. 내 불행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세상에 있다고, 남을 원망하는 동안은 절대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불행의 원인은 나 외에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병에 걸리는 겁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병이 걸립니다. 그러나“이것이 현실이요, 나 자신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벌써 치료가 되기 시작한답니다. 그런데 그걸 말해주고 설득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걸린답니다. 여러분, 고통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이건 내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겨야 할 현실입니다. 문제 해결의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참고 인내하며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시련이 유익한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시련이 있지만 이것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 이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 발전하고, 이것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궤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고. 새로운 정신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당한 지금 어려움에 몰두하지 말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음의 균형을 잡게 될 때 치유는 가능하게 되더라하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이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련이 반드시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여 그 초점을 믿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시험과 시련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입니다. 이 시험이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이 고통을 통하여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이 시련이 마침내 믿음을 온전케 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나에게 시련이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에서 무려40년을 헤매게 합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믿음을 주시려고 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고파 원망할 때는 만나를 주셨는데 자세히 보면 한꺼번에 많은 만나를 주지 아니하시고 매일매일 그때마다 주셔서 아침마다 거둬들여서 식사하게 했습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시간시간 매일매일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시련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물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고, 자존심이 중요하다고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은 오직 믿음만 중요합니다. 깨끗한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시련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시련 앞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 아주 겸손한 왕이 있었는데 그는 누구에게나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 왕을 백성들이 모두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신하 중에 한 사람이 왕이 지나치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못 마땅해 하다가“왕이시여 왕은 이 나라 지존이십니다. 머리는 몸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이요, 더구나 왕이십니다, 함부로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하고 고했습니다. 왕은 신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고양이 머리뼈, 말 머리뼈, 사람의 머리뼈를 하나씩 주면서 시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고양이 머리뼈는 집에 걸어 두면 쥐가 없어진다며 사가고, 말의 머리뼈는 걸어두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사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뼈는 사가는 사람이 없어 그냥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왕은 그 신하에게 말합니다.“사람의 머리가 귀한 것은 그 머리 속에 착함과 의로움과 지혜가 들어 있을 때 귀한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빈 해골이라면 고양이나 말의 해골만도 못하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슨 시험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이 아니라 시련으로 바꾸어 받아들이고 극복하며 인내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고통이 여러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그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원하여 여러분의 머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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