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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귀한 깨달음 (전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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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7, 8)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깨닫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더욱 바르고 온전하며 가치 있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 119:73)라고 기도 했습니다. 성서에서는 이 깨달음 때문에 고난까지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 인간에게 살아있는 큰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찍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때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깨달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되 늦게 깨닫기에 깨달음의 가치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가룟사람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그 때에서야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결국 늦게 깨달은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깨닫되 이미 늦었기에 아쉬워하는 깨달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죽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중 부자와 같은 깨달음입니다. 부자는 죽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부자는 살아서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전도서는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이라는 말로 우리로 하여금 일찍 깨닫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작고 큰 많은 사건들과 삶의 과정 속에서 무엇을 깨닫고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꼭 깨달아야 할, 중요한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인감 삶의 헛됨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가 헛됨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면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수고하는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사업을 크게 확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얻고자 지식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번뇌와 근심만 커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으로 즐거움을 얻고자 많은 낙을 누려 보았습니다. 술로 육신을 즐기고자 했고 쾌락을 추구하며 아름다운 여인들과 즐겨보았지만 그것도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나 우매한 자나, 소유와 성취, 인생 즐거움의 모든 것들은 죽음을 직면하는 세월의 헛됨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도서 기자는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 하였노니 이는 해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전 2:17)고 했습니다.

  불교인들이 존경하는 ‘성철’ 스님은 1993년 11월 4일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상좌승들을 불러 모으고 “때가 되었다”며 마지막 임종하면서 一筆揮之(일필휘지)로 임종게를 手書(수서)한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生必(생필)을 欺誑男女群(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미천죄업)이 過須彌(과수미)로다/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계벽산)이로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가 되는 도다/ 둥근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 분은 불교에 입문하여 59년간 수행하고 8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분이 인생을 마감하며 우리에게 남겨준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59년 동안 불도를 닦으며 인간 속에 있는 죄가 만들어 놓는 인간번뇌의 고통에서 자유 하고자 노력한 수고의 결과 그 깨달음은 이 인간노력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헛됨의 깨달음  다음에 반드시 깨달아야 할 또 다른 깨달음인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소유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삶의 헛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서 인간은 진실 되고 삶은 가치 있고 복된 것이 됩니다. 헛됨을 깨닫는 데서 인간의 본분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헛됨을 깨달은 전도서 기자는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절) 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고 했습니다.
  인생의 삶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인생의 헛됨을 바로 깨닫는 데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 본분을 찾게 되고 그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분은 인간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기뻐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무엇을 인정해야 합니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로 삼으셔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그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과 성령의 사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직한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는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더욱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기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20)
  그 밖에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을 기뻐함과 함께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그 분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헛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온전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결산하십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우리 인생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반드시 깨달아야 할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 모든 은밀한 일, 선과 악의 행실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 중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종들과의 결산하는 것은 심판의 결산입니다. 한 달란트를 쓸모없이 그대로 땅속에 보관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 25:26, 29)고 심판받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예배 후에 한 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최근의 목사님들은 성경에서 지옥을 뽑아버린 것도 모릅니까?” 목사님은 그 교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옥이란 제목은 뽑아버릴 수는 있어도 지옥의 장소를 없앨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대교회는 천국은 이야기 하지만 지옥을 말하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사람들이 기피하고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과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심판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데서 인간의 심각한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바울의 재판을 맡은 이스라엘의 총독 벨릭스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릭스는 노예출신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 성공하여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인 드루실라라는 여인의 미모에 반하여 그 여인을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뇌물로 재산을 모은 사람입니다. 바울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바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바울을 불러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강론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강론을 듣고 찔림을 받고 두려워했지만 곧 무시하고는 오히려 바울에게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벨릭스는 후에 총독에서 파면되어 수많은 재산과 함께 아름다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베세비우스에 가서 행복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세비우스 화산 폭발로 용암에 묻혀버리는 비참한 인생의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자의 종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심판으로 결산하신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귀한 깨달음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시간의 흐름을 말합니다. 인생의 삶에 곤고한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고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구부러지고 기력이 쇠해지는 곤고한 인생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이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일찍 깨닫는 깨달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은 헛될 뿐입니다. 그 헛된 인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데서 헛된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삶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으로 결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 20)
  가치 있는 깨달음을 가짐으로 하늘에 나의 가치를 쌓아감으로 영원한 삶을 만들어 가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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