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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를 아는 신앙인 (창 29: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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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편이 어느 날부터인가 부인하고 대화가 잘 안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을 해도 대답을 잘 안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 부인이 가는귀가 먹었다고 생각해서 부인 모르게 병원에 가서 상담을 했답니다. 의사에게“저의 아내가 가는 기가 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상담을 했더니 의사가 말하기를“그렇게 말하면 아내의 상태를 잘 알 수 없으니까 아내가 얼마나 못 알아듣는지 그리고 몇 미터에서 못 알아듣는지 측정을 해 봐야 합니다.”그러면서 정확히 알아가지고 오라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편이 집에 와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아내에게 10m떨어져서 말합니다.“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아내가 못 알아듣는지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5m떨어져서 말합니다.“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1m뒤에 가서“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하고 크게 물었더니 그 때 아내가 하는 말이“내가 불고기라고 아까부터 세 번이나 말했잖아요.”그러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가는귀가 먹은 사람은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남편이 가는귀가 먹은 채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이렇게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모른다는 것은 때로 불행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기를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행해지는데 까지는 가지 않을 정도는 자기를 알아야합니다. 분명히 자기인식의 한계는 있습니다마는 불행을 자초할 만큼의 자기를 모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철학자[키에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한번쯤은 읽은 분이 많을 줄로 생각합니다만 이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인간상을 지적하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아침 일찍이 양말도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시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궂은일을 해서 그날따라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한 켤레의 양말을 사서신고 또 구두를 사서 신었습니다. 그러고도 돈이 꽤 많이 남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는 술을 마셨습니다. 만취가 되어 비틀거리며 자기 집이 있는 시골로 돌아오다가 너무 취해서 길 한 가운데 큰 대자로 누워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는데 마침 마차 하나가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이 사람아 길을 비켜. 만일 비키지 않으면 다리 위로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만취된 농부는 눈을 뜨고 정신을 좀 차리고 자기 발을 봅니다. 양말도 신겨져 있고 구두도 신겨 있는 것을 보고 자기는 아침에 맨발로 나온 기억이 나서“지나가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시오. 이것은 내 발이 아니니까.”하고 다시 벌렁 드러눕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이러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마음의 눈과, 생각의 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밖을 향해 있습니다. 즉, 남과 비교하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려는 본능에 두고 살다 보니까 정말 알아야 할 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 나는 병들고 썩어져 가는데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누가 보더라도 나를 인정받을 만한 명예에 목숨을 걸고 삽니다. 요즈음 인기를 먹고 산다는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대부분이 인기를 누리는 그 내면에 밀려오는 외로움과 허탈감을 견디지 못해서 그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서 주어지는 인기나 명예란 물거품이나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서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물결 속에 서 있을 때는 내가 아닌 나입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나를 보니 공허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점점 나를 잃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시점엔가 그 동안 잃어버린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 때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그렇게 길들여져 살아 온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끝은 슬픔으로 막을 내리고 마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삶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나 나를 발견하고, 존재를 깨닫고 그 깨달음 속에서 행복해 하십니까? 눈을 안으로 돌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나를 먼저 알아야 진정한 모습의 자기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내 진면목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세상이 다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 비춰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도 중요하고, 전문가적인 안목도 중요합니다마는 그 보다 앞서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인정해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고서야 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입니다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것을 그대로 땅에 묻어 둔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 된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 된 이미지는 자신에 대한 잘못 된 이해를 형성했고, 비뚤어진 자기 이미지는 결국 자신의 재능을 묻어 버리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불행에 있어 가장 심각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불행에 계속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그 불행이 체질화된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문화 화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의고 무엇이 불의인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거짓인지 진실인지 혼동되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야곱이라는 사람은 본래가 좀 간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진실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나 외삼촌댁으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거기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평생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외삼촌의 딸인 라헬과 함께 양을 치면서 친하게 되었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외삼촌에게 청을 넣었습니다.“내가 7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7년 후에는 라헬을 나에게 아내로 주시기 바랍니다.”외삼촌은 이것을 허락합니다. 드디어 야곱이 그토록 기다리던 기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았더니 신부가 야곱이 바라던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노발대발합니다. 그리고 외삼촌을 원망합니다. 미웠겠죠. 하지만 외삼촌 라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라헬은 건강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야곱이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시집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이가 찬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생각한 것이 속된 말로“끼워 팔기”식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것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야곱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본문의 맥락으로 상당히 화가 난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외삼촌에게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속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지방의 풍습이 이렇고 저렇고 변명을 하려고 하지만 라반이 그를 속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 야곱은 자기의 수고한 것,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정당치 못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당당하게 외삼촌 라반의 부당함을 공격합니다. 이 사건만을 놓고 볼 때는 당연히 야곱은 억울하고 라반은 백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 대해서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함이 없습니다.‘왜 나에게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엄연한 사건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나쁘다는 생각에 분노만 했지‘나는 어떤 사람이더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내가 속은 것에만 분노 할 줄 알았지 내가 속인 것과 그로 인하여 분노했던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인간이란 언제나 이렇습니다.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고, 나로 인해 남이 당한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오늘 야곱이 그렇거든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도 여태껏 회개하지 않은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이 바로 회개 할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는커녕 오직 외삼촌 라반은 나쁘고 자기는 정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각시키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지금 야곱은 라반과 자기와의 관계만 놓고“내가 수고했다느니, 내가 정당하다느니, 당신이 분명 잘못했다느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나는 옳고, 나는 어떻고, 눈곱만큼도, 손톱만큼도...”하면서 자기정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다시 한번 잃어버린 자기 진실을 찾아야합니다. 헛된 맹세나 자기교만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얼른 돌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사실 야곱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많은 불행이 한 여자 라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라헬을 너무 예뻐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워했기에 라헬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도 야곱은 말리지 못했습니다. 훗날 그가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 이니이다...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아마도 그 험악한 세월의 상당한 부분이 이 라헬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렇게 자기가 예뻐했던 라헬 곁에 묻히지 않고 레아가 묻혀 있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깊이 뉘우치고 생각한바가 있기도 하거니와 흔히 말하는 죽기 직전에 철이 난 것입니다. 진작 그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쨌든 죽는 사람이 아무데나 묻힌들 어떻겠습니까만 그 질투 많은 여자 라헬은 혼자 묻히고 레아 곁에 야곱이 장사됩니다. 이제야 잃어버린 자신을 찾은 것입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한 승무원이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연방 혼잣말로“아이고 큰일 났네, 큰일 났어.”합니다. 이윽고 기차의 한 칸을 모두 검사하고 나서 승객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말합니다.“승객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셨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안내방송에 의하면 분명 브뤼셀로 가는 기차가 맞는 것입니다. 기차를 잘못 탄 것은 승객이 아니라 승무원이었던 것입니다. 승객 모두가 브뤼셀로 가는 기차표를 지니고 있었다면‘혹시 내가 기차를 잘못 탔나.’를 생각해 볼 일이건만 이 승무원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 강한 확신을 지닌 나머지 이런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몰라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역사도 더욱이 우리의 신앙이 혹시 다른 방향으로 굴러 가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기를 다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살피며 그 앞에 선 연약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겸손히 산다면 행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안다면 불행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를 모르는 것은 불행입니다. 자기를 잃어 가는 것은 참으로 아픈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신앙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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