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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 '나'가 문젭니다(3): 외치는 요나 (욘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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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나'가 변화된 요나의 외침이 있기까지>
요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선민의식과 민족적 우월감으로 가득찼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문제는 요나가 탄 배에 미친 듯한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배에 탄 사람이 꼼짝없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고요한 바다에 이 노도가 일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가리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털컥 걸려들었습니다.
요나는 이 모든 문제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 까닭에 생겨난
하나님의 징벌임을 깨닫고 자기를 들어 바다 속에 던져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을 깨닫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한 것이지요.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요나는 꼬박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모든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되돌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흘 낮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한 요나를 다시 육지로 내보내셨습니다.

요 '나'의 아집과 교만과 편견과 불신앙 때문에 고난과 위기의
바다에 빠진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위기이든지 간에 요 '나'의 잘못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징계를
달게 받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위기의 바다 한 가운데 풍덩
빠져 들어갈 때 절대로 그냥 내팽개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큰 물고기라는 피난처를 예비해두십니다!

그런데 그 큰 물고기 뱃속이 요나를 거듭나게 한 장소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나의 고집 사납고 불순종적이었던 요 '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진 장소였습니다.
옛 자아가 산산조각이 나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장소였던 것이지요!

물고기 뱃속이라는 것이 사방이 막혀 있고 무덤처럼 어둡기만 합니다.
출구가 없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요 '나'가 변화되었습니다.
철저한 각성과 회개를 통하여 요나의 요 '나'는 예전의 요 '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칠흑같이 어둡기만 한 물고기 뱃속에서 절망이 소망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요 '나'의 어리석음과 죄악 때문에 우리의 가정과 주변에
문제가 생길 때, 고난과 위기의 바다가 우리를 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물고기 뱃속은 고통과 연단의 세월을 의미합니다.
당장 그 어떤 해결책이나 출구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 침침하고 사방이 꽉 막힌 듯이 보이는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새사람으로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눈물과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삼일삼야라는 말처럼 요나가 정금처럼 연단이 되어서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물고기 뱃속의 연단은 저절로 끝이 납니다.

오늘 요 '나' 때문에 고난과 위기의 바다 한 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큰 물고기 뱃속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평안한 길이 아니며, 오히려 절망스럽고 사방으로부터의
도움이 완전히 차단된 곳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는 진짜 신앙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요 '나'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옛 자아가 산산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삼일삼야가 끝나게 될 때,
큰 물고기는 마침내 우리를 다시금 세상의 뭍으로 뱉어낼 것입니다.
이제 물고기 뱃속의 연단이 완전히 끝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의 요 '나'는 전혀 새로운 요 '나'로 바뀌어지기 때문이지요!

<요 '나'가 변화된 요나의 외침으로 일어난 니느웨의 기적>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물고기 뱃속의 시련과 연단을
통과한 요나는 전혀 새로운 요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고난의 바다에 빠져 그 어두컴컴한 물고기 뱃속의
시련과 연단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외쳤다고
할지라도 과연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마지못해, 억지로 말씀을 전하기 쉬웠을 테고
사람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꼬박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깨어지고 부서진 요나가 외친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몰고 왔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무후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할례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 바깥에 놓여있다고 생각된,
이스라엘 민족의 철천지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이 위로 가장 높은 왕에서부터
아래로 가장 낮은 무명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내남없이 구원받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요나가 뒤집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이지요.
첫 번째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1: 1-2절 참조).

그런데 그 반응은 첫 번째 반응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주님께서 처음 명령을 내리셨을 때 요나는 그
명령이 싫어서 주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다에 풍덩 빠져 물고기 뱃속을 통과한 다음의 요나는 예전의 요나가 아닙니다.

3절을 보세요.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여기 보세요.
물고기 뱃속에서 뛰쳐나와 거듭난 요나는 똑같은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을 때, 이제는 아무 군소리 없이 즉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이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했다는 말을 해놓고서는, 니느웨는 굉장히
큰 성읍인데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 된다는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니느웨는 서울 못지 않게 큰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 저리 둘러보는 데에만 꼬박 사흘을 걸어야 한다니 대단히 큰 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옛날 자동차도 없이 사흘을 맨발로 걸어다닌다는 것은 보통 큰 고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요나는 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족(蛇足)같이 보이는 이 말씀이야말로 사흘이
걸리든 열흘이 걸리든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생도 감수하겠다는
요나의 달라진 모습을 암시하는 구절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자, 이렇게 해서 요나가 니니웨 성읍으로 들어가서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십 일도 아니고, 삼십 일도 아니고, 사십 일을 말한 것은 40이 완전 숫자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올 완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 외치지도 않고 겨우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는데 벌써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고난의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의 연단을 통과한 새사람
요나가 외친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5-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참으로 놀라운 것은 니느웨의 대각성 회개 운동이 저 일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왕에게까지 올라간 '밑으로부터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왕은, 무엇보다도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앗수르 제국의
왕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마 왕이 요나의 메시지를 먼저 듣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즉 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 회개운동'이었다면,
백성들은 권세와 외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개하는 시늉은 했을지
모르지만 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수도 니느웨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 운동은 풀뿌리, 저 낮은
백성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높은 자리 왕에게까지
파급된 '자발적 상향적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상명하달(上命下達) 식의 '하향적 회개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요나의 메시지가 그 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요나의 메시지는 앗수르 제국의 심장부인 니느웨에 떨어진 핵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요나의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그런 뒤,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금식한 뒤, 높고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베옷은 너무 거칠고 색깔이 어두워서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옷입니다.
그야말로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옷이지요.

이렇게 밑으로부터 온 백성들의 자발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위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을 들은 왕도 회개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6절을 보면, 소문을 들은 니느웨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어 던진 뒤,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아래로부터 일어난 거국적인 회개 운동에 자신도 동참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왕은 이와 같은 회개운동, 영적 대각성 운동을 더욱 더 조직적으로,
가열 차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니느웨 모든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7-9절 말씀을 보세요.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여기에 보면 금식을 하되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입는 베옷을
사람만 입지말고 짐승들에게도 입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요나의 말씀 선포로 촉발된 니느웨의 회개운동이 건성으로 적당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 총동원된 철저히 거국적인 구원운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영적인 회개운동이
윤리적 실천행위와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울부짖으며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할 뿐 아니라, 즉각 모든 악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윤리행위를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요나의 선포로 일어난 니느웨 회개운동은 '수직적인 영성 차원'과
'수평적인 윤리 차원'이 함께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물게 건전한 대각성 운동이었습니다!

자, 이러한 거국적인 회개운동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본래, 그 지은 죄 때문에 모조리 멸망당할 사람들이 남김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진실된 모습으로 회개하는 것에 감동을 받으셔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하나도 내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한 사람 요나가 변화되어 말씀을 선포하니 이다지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와 니느웨' 對 '하디와 1903 원산 대각성 운동>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泳, 1865-1949)에 의해 일어난 대각성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하디는 근 5년 동안 원산과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지만
눈에 띄는 열매를 거두지 못해서 항시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서 하디는 자신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자백했습니다.
민족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교만했던 죄,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요 '나' 때문에 선교적 결실이 없다는 사실을 회개했던 것이지요.
하디 한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 이내 감리교인들을
주축으로 한 조선 교인들이 하나 둘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털어놓고 울부짖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 한 사람의 변화로 촉발된 대각성 운동은
곧바로 요원의 불길처럼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민족회개운동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을 주축으로 해서 일어난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과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역사 기록물을 보면 1904년 1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우리 교회에서도
하디 선교사가 직접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집회가 수일 동안 계속되면서 1백 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뜨거운 성령충만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 집회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질투와 사랑이 없었던 죄를 회개한'
전도부인들과 여성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고서는 자원해서
부평, 남양, 강화 등지로 나가 전도하는 열기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1903년 하디에 의해서 촉발된 영적 대각성 운동이 한 해 뒤인 1904년에는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지역까지 파급되었던 것입니다.

1903년의 원산 대부흥 운동, 1905년의 개성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 등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철저한 회개와 윤리적 변화였습니다.
이 때 우리 선조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큰 죄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해오던 봉건적 행위들, 예컨대 축첩과 조혼, 노비제도, 주초 문제 등도
공중 앞에 낱낱이 털어놓고 대대적인 회개를 했으며 중단했습니다.

요나의 니느웨 회개운동과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요나와 니느웨,' '하디와 조선하고도 원산,' 너무나 비슷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니
사흘 길을 다 갈 필요도 없이 하룻만에 저 아래로 이름 없는
백성으로부터 위로 왕까지 대대적으로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멀리 캐나다로부터 날로 망국의 길로 치달리던 조선, 원산 땅에 온 푸른 눈의
이방인 선교사 하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했을 뿐 아니라,
은근한 인종적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인들을 우습게 여기기까지 했던 하디,
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되니 거족적인 대각성 운동이 파죽지세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요 '나'가 문제입니다.
요 '나'가 변화된 요나가 외치니 이방 민족 니느웨 사람들이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요 '나'에 기쁨과 확신이 없었던 하디가 변화되니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이 조선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요 '나'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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