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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이레 의 축복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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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의 축복
창22:1-14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가 믿은 축복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더니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주십니다. 그것은 애지중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도 아버지만큼이나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고, 아닌 밤에 홍두께 식으로 새벽부터 예고도 없이 무조건 잠자는 아들을 두들겨 깨워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가야 한다고 끌고 가는데도, 그냥 끌려갑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바로 네가 제물이란다.’라고 하면서 무조건 아들, 이삭을 오랏줄로 결박을 하는데도, 청년의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묶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 해도 일체의 반항을 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믿음이요, 순종입니다.

1. 진정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정말 번제를 원하셨을까요?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제사가 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는지의 사랑의 확인인 것입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짐승이든 사람이든 모두 도륙하라고 하시는 명령에 사울은 불순종하여 살지고 좋은 짐승은 살려 두어 따로 빼냈습니다. 이것을 무섭게 사무엘 선지자가 질책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 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15:22)고 말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6-8)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제물을 받으시려 하겠습니까?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충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아무리 자식이 귀하여도 우리 하나님보다는 귀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이삭을 결박하고 제물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 찌르려고 했던 그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급하게 멈추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주 다급하게 말입니다.

우리 12절을 다 같이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의 확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고, 참석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이 예배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예배의 요소이지 예배 자체는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의 참 믿음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지를 보여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런저런 예배의 요소를 다 갖추었지만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 사랑함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사실은 죽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12:1절 이하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참된 예배를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3절을 보니 수풀에 걸려 있는 수양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수양이었습니다. 사실 아들을 드리느냐? 소를 드리느냐? 양을 드리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과 마음의 정성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함을 담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참 믿음으로 드린 아브라함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이었습니다. 14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 축복의 원리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축복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들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아들을 데리고 가서 제물로 드린 것 밖에는 없는데, 이삭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수풀에 걸린 양을 준비해 주심으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 안에서 무엇을 하려 할 때, 내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순종하기만 하였더니 그 다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더라는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체험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그렇게 순종했더니, 그들의 믿음을, 중심을 하나님께 보여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언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도 아니었습니다. 산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제단을 쌓았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할 때였습니다. 바로 순종 할 수 없는 순종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변에서 어떤 일이든지 하다가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도 하다가 중단합니다. 섬기다가 중단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어렵습니다. 계2:26절에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마24:13절에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느 날 존 웨슬리의 아버지가 그의 아내 수산나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은 도대체 저 돌대가리 같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스무 번이나 똑같은 말로 타이를 수 있단 말이요?” 그때에 수산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만일 내가 열아홉 번만 이야기했더라면 내 말은 헛수고가 될 뻔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끝까지 참고 사랑으로 설명하고 타이르는 그 가정에서 영국을 영적, 도덕적으로 뒤집어 놓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요단강 물에 나가서 씻으라고 할 때에 한두 번 하고 그만 두었더라면 여호와이레로 준비해 두신 건강한 몸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결과도 열매도 보이지 않지만, 약속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이 어디에 있을 때에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모리아 산에 있을 때였습니다. 모리아 산은 하나님께서 가

라고 지시하신 장소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곳을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디서 준비하셨습니까? 14절에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의 산’은 물론 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있는 그 장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갔을 때에 그런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게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여 주시는 여호와이레의 축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것은 꼭 필요한 것으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니 “한 숫양이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하늘에서 떨어진 양이 아닙니다. 천사가 가져다주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준비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수양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양이 뚝 떨어지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어느 날 갑자기 산삼을 캐거나 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필요를 채워주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을 크게 인정하시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는 우리 대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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