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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관원의 질문 (눅 18: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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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

오늘 상고할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나왔던 이 사람에 관해서 누가는 관원이라고 하였고, 마태는 청년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9:20).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에 이 사람을 대단한 부자로 소개합니다. 그를 관원이라 한 것을 보면 그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젊고, 부유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서 10장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진리를 갈망하고 예의바른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일전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였을 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면서 물리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 12:).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관원은 재산 문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영생에 관하여 물으러 나왔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이는 주님께서 그에게 진지하게 대답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시면서 그가 한 말 가운데서 잘못된 부분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만일 이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그렇게 말했다면 맞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관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선에 대한 기준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온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야 외에는 전적으로 선한 분이라는 칭호를 들을 자격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 사람의 선에 대한 기준은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지 훌륭한 랍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양심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고 그들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스스로를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쁜 사람이야, 악인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사람은 다 멸망 받을 죄인이라”고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관원은 드물게 보는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을 때, 그는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서 인륜에 관한 계명만을 거론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한편만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관원은 놀랍게도 그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 관원이 율법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있지 못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 선생들이 다 그런 식으로 가르쳤으므로 그 관원의 무지가 그 사람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그는 당당하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하였는가 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관원의 말을 들으시고 언짢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생에 대한 그의 진지한 관심과 율법을 준행하려는 노력을 귀히 보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관원을 사랑하사 이르시기를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관원은 주님의 물음에 분명한 어조로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계명들을 요약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관원에게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의 말의 진실함을 입증해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님의 이 권면을 실천한다면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그의 말이 사실로 입증될 것이고,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주님의 권면을 실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보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하였고, 마가복음에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에 대한 갈망을 안고 주님 앞에 달려 나와 꿇어 앉아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던 청년의 빛나던 얼굴이 근심으로 어두워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관원은 예수님의 테스트에 실격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복음서는 그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는 주님의 권면을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그를 막았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 관원은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힘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선량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 한 온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현대는 경제가 모든 것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회사와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문에 보면, 국가경쟁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려면 국가경제를 일으켜서 국민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 주어야지, 경제가 잘못되면 다른 것을 잘해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돈이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에 관해서는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한 부자는 물론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더라도 그 부를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벌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러면서 가진 자의 책임을 거부한다면, 주님을 찾아왔던 관원과 같이 그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관원이 근심하며 떠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늘귀로 낙타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말하기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보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동족으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돈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기왕에 동족의 멸시를 받는 처지라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고 웬 은혜인지 자기 집에 주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만나서 그의 집에 머물려고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 날, 삭개오는 주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9:). 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열 두 제자가 하나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보화를 위해서 지상의 재물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성도님들의 가진 재물을 다 구제 사업을 위해 내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위주의 시대에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누어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냐, 재물이냐,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오거든, 그 때는 지체 말고 주님을 위해 재물을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재물을 주님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주님 보다 더 위하면 반드시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영생

이제, 주님과 이 관원이 주고받은 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관원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무엇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의 생각이 맞다면 영생은 인간이 무엇을 행한 대가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슨 선행의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관원의 무지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그가 주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였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하신 것도 사람이 계명들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원은 알지 못하고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물었고,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청년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여전히 이 관원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가 지금까지 모든 계명을 다 지켜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자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생 곧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대한 대가나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6)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7)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를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표준새번역 사 64:)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실로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은 대가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믿은 데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면 예수 믿은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것은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그리고 구원은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단순한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으면 믿기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누가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판사로서 상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그는 직무와 관련해서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러나 그가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 할 그 때나, 판사가 된 지금이나 그의 인간적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 사람일 뿐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적인 신분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일어난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는 영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 생각에 좋은 대로 살았으나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행합니다.

이전에는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오락을 즐기는 것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적인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였고, 골로새서 3장 10절에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누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된 것처럼 자격시험을 패스해서 어떤 법적인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에 보면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생에 불과한 우리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어낸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실재로 행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7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양자의 영,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신 대로, 만일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이 관원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맺는 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는 것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평생을 눕지 않고 앉아서 도를 닦아도 그것이 공로가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설령 무엇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 깨달음이 그 사람의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진실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므로 결국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하신 말씀이 이런 경우를 의미합니다.

구원 곧 영생을 얻는 길은,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 관원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줄로 알았다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 걸려 넘어져서 슬픈 빛을 띠고 물러갔습니다.

그는 재물을 주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이 관원처럼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기 때문에, 또는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이전에는 우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그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온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이 큰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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