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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1계명 (출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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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명 (출 20:3) 

법률은 최고의 목표나 이상적인 표준을 제시하지 않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그어줍니다. 구약의 율법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규범입니다. 따라서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목표하고 있는 신령한 표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의미를 충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내 힘으로써는 지킬 수 없지만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런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3)는 십계명의 제1계명도 문자적으로는 동시에 두 가지 종교를 가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94문은 제1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잘 설명했습니다. “나의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만큼 모든 우상숭배, 점술, 마술, 미신, 성인에게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간구하는 일을 피하고 멀리할 것과, 또한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정하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 복종하며, 모든 선을 오직 그분에게만 기대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높이며, 그리하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들을 버리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신 것은 단지 불쌍한 노예 백성에게 행복한 삶을 주시려는 이유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주신 목적 역시 동일합니다. 모든 성도는 참된 하나님만을 종신토록 순결하게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제1계명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불상이나 다른 우상을 집에 모셔놓고 섬기는 성도는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들조차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께만 신뢰를 두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님을 나타내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a)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 계시되었던 그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은 아마 이런 분이실거야’라고 나름대로 상상한 어떤 존재를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골로새서 3:5절은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정죄합니다. 비록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을지라도, 그분 외에 다른 것에 신뢰와 소망과 사랑을 두고 있다면 역시나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95문은 우상숭배를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은 그분과 더불어, 다른 존재를 만들거나 지니고 거기에 우리의 신뢰를 두는 것”으로 잘 정의했습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우상은 다양했습니다. 애굽에는 각종 동물 형상의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들도 바알과 아세라 등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시돈 족속은 밀곰과 몰록을 모압 족속은 그모스를 섬겼습니다. 이 외에도 태양과 달을 신으로 받들거나 오래된 고목나무를 신령하게 여겨 그 앞에서 빌기도 합니다. 로마제국도 각종 잡신들이 많았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인간은 다양한 우상들을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조차 장래가 불안해지면 그러한 우상들을 함께 섬겼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런 형태의 조잡한 우상들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다른 형태로 변했을 뿐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바알과 아스다롯은 폭풍과 풍요의 신이었는데 그들을 섬기면 한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고 이 신들을 예배한 후에 신들을 기쁘게 한다는 명목으로 음란파티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던 것은 풍요와 쾌락에 대한 탐심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도 풍요와 쾌락에 대한 탐심의 우상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돈’ ‘출세’ ‘건강’ ‘명예’ ‘성공’ ‘웰빙’ 등 좀 더 고상한 이름으로 바뀌어졌을 뿐입니다.

우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보다 혹은 하나님만큼 신뢰하는 무엇, 하나님보다 더 소망을 두는 무엇,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입니다. 하나님보다 적금통장이나 보험이 더 든든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고 자식에게 더 소망을 둔다면 역시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은 이처럼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 숭배는 곧잘 우상시하는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나타납니다. 성공을 우상시하면 성공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돈은 우상시하면 돈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발전합니다. 외모를 우상시하면 외모에 대한 집착을 할 것이고 건강을 우상시하면 건강에 대한 과도한 욕구를 가질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보다 다른 어떤 것에 목말라 주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결혼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도 묘사합니다. 이미 남편을 둔 여인이 남편 대신 다른 남자를 사랑하거나 남편보다 더 의존한다면,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느낌으로는 남편도 사랑하고 그 남자도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남편의 입장에서는 전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과연 무엇에 신뢰를 두고 살아가는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꼼꼼한 자기 점검이 늘 필요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신뢰의 대상이시며 사랑의 대상이시며 소망의 대상이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도 하나님만을 순결하게 예배하는 모습인지 아니면 세상을 교회로 끌어드리고 있는 공동체인지 점검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순결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을’ 두지 않는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신 6:4-5).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순결한 삶을 살려면 먼저 성경을 통해 계시된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느낌이나 통상적으로 불신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좋은 신에 대한 개념을 따라서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계시해주신 그 계시를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려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서는 참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필연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믿음의 조상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고 했습니다. 이삭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은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창 26:28a)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10번이나 품삯을 바꾸며 야곱을 등쳐먹었던 라반도 야곱에게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창 30:27)라고 했습니다. 노예시절 요셉의 주인이었던 보디발과 요셉에 대해 성경은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고 증거합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의 세상 속에서 작은 공동체로 존재했었습니다. 나그네였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서러움과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강대하고 풍족히 가진 이방 세상 속에서 힘없고 미약한 자들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노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삶의 과정 속에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며 살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거창한 어떤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웅장한 신전을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세계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기들과는 독특하게 구별된 삶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었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써 마침내 주변 사람들과도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고 손해보는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갚아주셨고 그들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삶의 현장에서 이 세속적인 시대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구별된 삶을 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유별난 신앙인이 아니라, 구별된 성도로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시고 계심을 불신자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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