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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라 (욥 4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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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고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욥이 고난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고난을 통과하기 전에 욥은 정직했습니다. 욥은 예배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눴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귀로 들어서 알았던 수준입니다. 지식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점쟁이를 세 종류로 나누더군요. 첫째, 점치는 것을 배워서 점쟁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부모가 점쟁이였는데 가업을 잇듯이 물려받아서 점쟁이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귀신이 내려서 점쟁이가 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 진짜 점쟁이는 세 번째인 귀신이 내려서 점쟁이가 된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세 종류의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을 공부해서 지식으로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모태신앙으로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성령을 받아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의 세 종류의 신앙생활 중에 진짜 신앙생활은 세 번째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 그의 행위는 고귀했으나 위의 세 종류의 신앙생활을 놓고 볼 때는 첫 번째나 두 번째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신앙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신앙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론으로,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욥이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교만했던 사람이 겸손해 진다(1-6절).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16:5에서는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잠 16:18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욥의 행위가 의롭고 정직했지만 욥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항상 옳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 의로 가득했습니다. 자기 의가 얼마나 충만했던지 욥 32:2에 보니까 욥이 하나님 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욥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자기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욥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질문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알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욥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분적이며, 욥이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불의한 것들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선 욥은 42:3에서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자랑했던 지식들이 사실은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한 것이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때는 교만합니다. 지식으로 알던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인격적으로 알게 되어 질 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영적이고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게 된다(7-9절).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라고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욥은 극한 고난 중에 있었는데 그의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그들은 욥의 친구라고 하기보다는 과거에 욥이 잘살았을 때 욥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며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비교하자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욥과 신분의 차이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욥 30:1에 보면 욥이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만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분의 차이가 크다는 뜻입니다.

욥의 형편이 좋을 때는 욥의 도움을 받았고 욥 앞에 감히 설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욥에게 상처를 줍니다. “네가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형편없는 믿음이었구나. 네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니 아주 못된 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는 식입니다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찾아와서 욥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극한 고통 중에 있었던 욥은 그 친구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내가 먹지 못해 배고파 죽겠는데 자기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서 고기 덩어리 한 조각도 주지 않으면서 “좀 먹고 다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욥을 만나신 후에 그 친구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8,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데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원수 같은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욥이 원수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인격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영적인 체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3.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10절).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원수를 축복한 후에 10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회복과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회복, 부흥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나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1절에 보니 사람들이 욥을 찾아오는데 진정으로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옵니다. 그런데 위로만 한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고대의 화폐인 케쉬다를 하나씩 가져오고 금고리 하나씩을 가져옵니다. 결국 1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의 복이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셔서 갑절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2007년도 한국 교회의 화두는 부흥입니다. 1907년 평양에 일어났던 대부흥을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일으키자는 운동이 한국교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에 한국 기독교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해마다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1년에 4만-5만 명의 신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1주일에 1천 명 정도의 신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한국기독교의 위기입니다. 정말 100년 전 평양에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가 이 시대의 한국 땅에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부흥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부흥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것,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포로 된 곳에서 자유함으로, 어둠의 하늘에서 빛의 하늘로 바뀌는 것이 부흥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병든 자가 치료를 받는 것, 방황하는 자가 방향을 잡는 것 모두가 부흥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에게 태의 축복을 주시고, 살맛을 잃은 실직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하루하루 복잡한 머리로 사는 백수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부흥입니다. 삶의 포기, 삶의 불안, 삶의 무능으로부터 해방되어 삶의 이유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을 찾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때 일어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암 5:1-3을 보십시오. 아모스 선지자는 어느 날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곧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었기에 그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애가’라는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하여 부르는 조가’를 뜻합니다. 아모스가 판단하기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목숨과 같았습니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아모스는 현재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 무너진 시대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녀 이스라엘이란 가장 활동적이고 강한 전성기를 의미합니다. 그 시기는 감히 어떤 외부의 세력도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천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백 명만 살아남고, 백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열 명만 살아남는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쓸 수 없는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엎드러진 절망의 때가 임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이런 파멸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길이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참으로 간단했습니다. 암 5:4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구원의 길, 희망의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한국의 백성이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부흥이란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 쇠하였던 것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재건과 복구를 의미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살다,’ ‘살아있다’라는 말로 리바이브/리바이벌(revive/revival)입니다. 암 5:6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8의 말씀입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다시 말하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출발은 분명히 믿음입니다. 언제나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일한다는 말이 정확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특히 ‘찾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누구를 찾아야하는가? 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암4:9-11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범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특별한 일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풍재와 깜부기 재앙, 팟종이 재앙, 염병 재앙으로 청년들이 죽고 성읍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통의 때, 부흥이 필요한 때에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제 2의 부흥의 근원지가 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2의 부흥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잠 8:17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두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예배의 회복입니다.

성경은 예배의 역사입니다. 성경에서 예배가 빠지면 성경은 빈껍데기입니다. 믿음의 핵심도 예배입니다. 예배가 잘못된 믿음은 절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그의 믿음의 특징은 예배였습니다.
요4:23에 보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온전한 예배자입니다. 온전한 예배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요 4:23에 보니까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형식에 얽매인 예배가 아니라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예배입니다. 다윗이 법궤가 들어올 때 성령에 감동하여 체면도 내려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처럼 우리의 예배도 성령의 역사를 따라 감동이 있는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진리를 따라드려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약시대에 드려졌던 제사는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예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드렸던 모든 예배(제사)는 시기도, 방법도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내 맘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나면 드리고 바쁘면 안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제쳐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안 됩니다. 틈나면 예배드리고 틈나지 않으면 예배를 빠지는 것도 안 됩니다. 예배는 내 맘대로 정하고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기도, 때도, 방법도 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예배를 받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뜻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 중에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입 맞추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종이 주인의 계획이나 일정을 짜는 법은 없습니다. 주인이 종의 일정을 정하고, 할 일을 정하고 감독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의 중심은 주인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 편리에 따라서 예배를 드렸다 안 드렸다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는 정성된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최선을 다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드리는 헌금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정해진 곳에서 드렸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소에서 드렸지만 성전이 세워진 후에는 성전에서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교회가 정해져 있지 않을 때는 여러분이 계신 곳에서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해졌으면 자기 교회에서 드려야 합니다. 집이 멀든지 가깝든지 여러분이 예배를 드려야 할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집에서 TV보면서 예배드리고, 바쁘다고 집 가까운 곳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여기서 드려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예배가 회복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새벽기도입니다.

시 46:5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새벽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아들을 아버지가 깨웁니다. “얘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단다.” “아버지, 그 보세요. 저는 일찍 일어나면 큰 일 나요. 나는 새가 아니라 벌레거든요.” 여러분, 이런 벌레 여기엔 안계시지요.
내일 새벽부터 모두 일찍 일어나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가족들은 앞으로 21일 동안 특별새벽기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프리카 깊은 산골 한 마을에 작은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성도들은 마을 뒷산 조용한 숲속에 오두막을 지어 놓고 거기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 오두막을 드나드는 발걸음들로 인해 숲속엔 오솔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열대지방에서는 식물이 빨리 자라기 때문에 이 길 사용을 조금만 뜸하게 하면 금방 잡초가 무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마을 성도들은 이 거룩한 발자취가 선명하게 나 있느냐 아니면 잡초가 우거져 있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의 건강을 측량한답니다.

여러분의 기도 길은 선명하게 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잘 닦여 있습니까? 아니면 잡초만 우거져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쌓이는 잡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한국을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계를 순회하며 인상 깊게 감동을 받은 몇 나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의 나라였다. 내가 캐나다에 갔을 때에 아름다운 새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캐나다는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일본에 갔을 때에 출근하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아침에 돌아가는 공장의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요 발전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다. 고요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교회 가는 성도들의 발자국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 시대에 마지막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잠을 깨우는 새벽을 깨우는 함성이 한국교회에서부터 시작될 것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늦은 밤을 깨워놓고 새벽을 졸리게 하는 괴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T.V.입니다. 이번 21일 동안은 T.V. 와의 전쟁을 선포합시다. 결단하십시다! 사순절, 주님께서 날 위해 채찍 맞고 피 흘려 죽으시는 그 시간만이라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리라.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바쳐보리라. 혼자 결단하고 혼자 나오지 말고 가족이 함께 나오십시오. 자녀들도 깨우십시오. 셀 가족에게 전화도 하시고 차도 함께 타고 나오십시오.

미국 농구계의 영웅 마이클 조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소속팀 시카고 불스 팀이 우승을 했던 해였습니다. 대통령이 그 팀을 백악관으로 초대했습니다. 조단은 대통령의 초대를 무시하고 골프를 치면서 그 날을 보냅니다. 그러자 많은 국민과 언론들은 일제히 마이클 조단은 미국시민 의식도 없고 예의도 모르는 불학무식한 사람이라고 비난을 퍼 부었습니다. 일개 대통령의 초대를 거절했던 것이 이토록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특별히 새벽에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21일 특별새벽기도회 [여호와의 행적찾기]입니다. 주제는 성경의 축복을 발견하라!입니다.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동안 하나님을 만납시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참된 부흥이 교회와 가정과 여러분 개인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속에 약속된 축복을 발견하고 소유하기를 축원합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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