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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온유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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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두 번째 특성은 온유함입니다. 다른 한글판이나 영어판에서는 “kind”라 하여 “친절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또 ‘자비롭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드럽다’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불친절한 것, 무자비한 것, 딱딱한 것과는 반대됩니다. 어떤 분이 ‘온유’를 표현하는데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온유는 거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거인은 힘이 있지만 아기에게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온유한 사랑은 무기력한 사람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의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배우자 상이 아마 부드러우면서도 능력 있는 남자일 것입니다. 이번 주로 드라마 ‘주몽’이 막을 내렸습니다. 시청율이 50%를 오르내리는 국민드라마였지만 저희 가정은 오히려 ‘대조영’을 즐겨보는 편입니다. 그러나 대조영 캐릭터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최수종 씨가 그 역할을 하는데 너무 강한 이미지예요. 위기의 순간은 자기 혼자 힘으로 다 극복해 내지요. 전근대적인 람보형 주인공이라 할 것입니다. 흔히 나오는 대사가 “제가 하겠습니다” 인데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우 또 저래” 하며 야유를 합니다.

반면에 주몽은 가끔 보았지만 그 캐릭터는 마음에 듭니다. 연예인 송일국 씨의 이미지가 부드럽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유약한 듯 한 모습입니다. 흔들리고 고민하는 모습이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필합니다. 주몽에 나타난 캐릭터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할 것입니다. 능력도 있으면서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근육질의 사람에 질렸습니다. 강한 것, 힘센 것만 강조하던 산업화 사회의 남성상은 이제 매력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만 잘났다고 폼 내지 다른 사람은 괴롭게 하고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큰 저수지에 담긴 물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물이 그대로 쏟아지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수문을 통해서 적절하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수도꼭지를 통해 조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먹을 수가 있고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온유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온유하지 않는 사랑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두 가지는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불의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비진리를 싫어하시며 그렇게 잘못을 행할 때마다 막대기와 채찍으로 때리시며 심한 경우에는 전쟁으로 다스리십니다. 이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편에서는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시내 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무기는 율법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것은 하지 말라 하며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채찍으로만 다스리면 사람은 정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율법형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은 아마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선한 심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38년 동안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5:10)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바른 것 같지만 안에는 공포심이 가득하고 부자유한 인생을 삽니다. 항상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받아들여질지 그렇지 않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를 제창하기 전의 모습이 그렇다 할 것입니다. 루터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알기 전까지 그의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도 곁에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는 모습을 보면서였습니다. 원래는 법학자의 길을 가려했던 루터는 이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면서 “성 안나여(당시 광부들의 수호신), 나를 도우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로마의 ‘스칼라 상타’라는 곳에 있는 빌라도의 계단이란 곳을 무릎으로 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한 계간 한 계단을 오르내리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자기를 만족하게 보신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만큼 집요하게 고해성사를 했던 인물도 없습니다. 죄를 고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지만 만약 생각나지 않는 죄가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안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루터의 모습을 보면 그의 가정 환경이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했을 것이고, 그 어머니는 무능력했을 것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워래 농부였지만 구리광산을 해서 부유하게 된 졸부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자신의 부 못지않게 자녀들이 그것에 맞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기 원했습니다. 루터는 장남이었고 그런 기대가 루터에게 쏟아졌습니다. 자수성가형 사람들이 그렇듯이 루터의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과 절약정신으로 엄격하게 교육시켜야 함을 알았으며, 자녀들을 어떤 경우에서라도 출세시켜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키우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나이 4살 반이 되던 해에 라틴어 학교로 보냅니다. 소심했던 루터는 학교 생활이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학교 선생님은 엄격하고 때리기 일쑤였다”고 전하며 그 시절을 지옥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아들이 법학의 길을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간다고 했을 때의 루터 아버지의 분노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루터가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길 정도였으니까요.

여러분 어렸을 적 육신의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어렸을 적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 끌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못 믿는 분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부모의 사랑을 잘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가장 신기했던 것은 가족의 경험이었습니다. 누가 내 곁에서 나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 아이들이 아빠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몇 명 왔나 하고 숫자를 가장 먼저 세는 것은 우리 둘째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린 시절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은 현실을 넘어선 과도한 사랑을 꿈꾸기도 합니다. 자기가 사랑을 받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반대로 나는 모든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대단한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용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저 거지와 하룻밤을 잘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병적인 사랑입니다. 실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그렇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만났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에게서 발견한 놀라운 점은 그 분 앞에 있을 때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상대방에게 완전한 관심을 쏟습니다. 그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완전히 몰입이 되어 있어서 그분의 개인적인 힘이 상대방을 휘어잡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기를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 연필과 같다고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몽당연필처럼 작은 체구지만 그 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깨닫게 했습니다. 사랑의 그 온유함 곧 그 부드러움과 수용성이 우리를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만듭니다.

루터가 결국 확신을 얻었던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이 죄인 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허물을 가리고 있다는 확신이 드니까 루터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루터는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을 만났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부족하지만 사랑의 어머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십니다.

온유하지 않은 사랑의 대표자로서 들 수 있는 것은 루터 이후에 등장했던 종교개혁자 칼빈일 것입니다. 이 분은 청교도 신앙과 장로교의 창시자입니다. 또한 예정론과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칼빈의 모습 속에는 전형적인 엄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입니다. 칼빈은 스위스의 제네바를 성시화된 모범 도시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장로들도 구성된 종교 법정을 만들고 말씀에 입각해서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그 결과 그의 종교법정은 당시 카톨릭의 종교 법정처럼 잔인하기로 유명합니다. 당시 제네바 시 인구는 1만 3천 명에 불과했는데 4년을 다스리면서 참형만 58명을 시키는 공포정치를 했고 그 중 35명은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 죄목들도 큰 잘못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정론을 부인했다고 해서, 목회자를 모독했다고 해서,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또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주창했고, 또 자기 묘비명을 세우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이었지만 유감스러웠던 것은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이 없는 공의는 마치 칼집 없는 칼과 같다 할 것입니다.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자신도 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 없는 공의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살기가 느껴집니다.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지난 번 인도네시아 해역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수십 만명이 죽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회교권, 향락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했습니다. 미국 뉴올리안즈의 카트리나 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그들의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만 보이지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 율법도 제대로 적용했는지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에서 남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타종교의 눈에는 배타적인 전투적 집단처럼 보입니다. 지난번 사학법 반대 한다면 머리를 삭발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목회자들이 마치 총 칼을 들고 싸우러 나가 전사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특히 목회자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지 십자가를 무기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인도를 의료선교차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힌두교도들의 성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성지는 돌로 된 거대한 산이었는데 브라만 계급의 승려들이 그 산을 뱅뱅 돌며 순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이마에 점을 한 그들의 얼굴에는 전투적인 호전성만 담겨 있지 종교인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종파와의 싸움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간 데 없고 메마른 진리만 남아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모습이 만군의 여호와라 하여 군사적 지도자의 모습이었다면 신약시대에 나타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품에 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김용옥 교수가 요한복음을 강해하며 구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해서 한창 논란을 빚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을 새겨들을 필요도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품에 안으시는 사랑의 예수님의 눈으로 공의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엄격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이 사랑을 받은 후 다시 아버지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 사랑의 흔적을 찾는 느낌으로 성서를 읽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이스라엘도 그렇고 또 온 인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 있습니다. 공의가 칼이라면 사랑은 칼집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지만 또 사랑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을 떠나던 날 하나님은 밤새도록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마치 우리 하나님은 먼 길 떠나는 자녀들을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의 옷을 짓기 위해 베틀 짜는 어머니와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에서 이런 하나님의 어머니적인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젖먹이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셨던 하나님의 눈은 감시자나 매를 든 심판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품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46:3-4)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고 안고 기르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도 언젠가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어딘지 두렵고 엄격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어머니이십니다. 부드럽고 온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 두가지 속성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하고 살린 것은 무서운 공의가 아니라 이처럼 어머니 품 속처럼 온유한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속성중 공의와 사랑중 어느 것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속성이지만 우리 인간을 하나님에게 무릎 꿇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 무소부재하시다 이런 모든 속성들보다 우리 마음을 열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단단함보다 영원한 것은 부드러움입니다. 이는 노자가 그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인 노자를 불렀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있는 이유를 아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것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온유한 사랑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에 대한 사랑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하였다고 하며 예수님을 곤궁에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의 비정함을 봅니다. 한 여인의 목숨이 위태한 순간인데 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말 악랄한 생각을 합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의 예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요, 돌로 치지 말고 살려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완악함 마음에 화가 나셨던지 아니면 곤혹스런 처지여서 그랬는지 주님은 이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을 연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예수님은 그때서야 허리를 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이 모두 물러가고 그 여자와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고 요한복음은 증거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말씀하시고 여자를 돌려보냅니다.

예수님의 이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분명 여자가 간음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정죄하는 대신 온유한 마음으로 용서해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는 오늘 장면에 묘사된 그대로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자는 드러난 죄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또 여자의 죄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죄이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죄인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온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동병상련의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암 병동에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어가는 인생들에게는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서로 껴안고 불쌍히 여기는 일밖에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 여자의 곤궁한 처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간음을 했다면 둘이 했을 터인데 남자는 달아났는지, 혹은 용서받았는지 없고 여인만 남아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이 이렇게 간음할 정도로 위기를 맞게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강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수절 끝에 외로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돈이 궁해서 몸을 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 이유를 안다면 미워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눈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눈입니다. 설사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 중심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죄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온유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연을 알기 위해 온유해야 하고 그 사연을 알고 나면 우리는 또한 온유해질 수박에 없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고 뛰놀며 난장판을 칩니다. 사람들이 모두 언짢아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자녀를 자제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서 당신 아이를 나무래 라고 말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을 차린 듯 사람들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이 아이 엄마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아이 엄마를 화장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나무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이런 갈등에 이르게 된 데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온유한 사랑입니다.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 여자를 용서하신 이유는 용서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죄를 정죄하자면 그녀는 모세의 법대로 투석형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사회적 정의는 세웠을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은 죽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용서해야 이 여자가 스스로의 죄 뉘우치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딱딱한 매보다 온유한 사랑입니다. 매는 사람으로 타율적인 존재가 되게 합니다. 두려워서 일단 피하자는 심리에 발로입니다. 그러나 온유함으로 품는 것은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함입니다. 사람 안에는 정의의 마음이 있고 또 무한한 능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만날 때 마치 봄 날에 부는 훈풍처럼 우리 안에 있는 능력들이 새순을 내고 피어나게 만듭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온유함을 대해야 합니다. 자녀를 대하여서도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함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번 돈으로 먹고 자고 공부하니 내 말 들어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온유가 아닙니다. 자녀 쪽에서는 자기가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처럼 부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키 높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말이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욥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온유입니다. 먼지만도 못한 한 인간에게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욥에게 말을 걸고 욥을 설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유입니다.

온유함은 부부간에도 필요합니다. 부부간의 온유는 상대방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모났건 자기 이상과 맞지 않건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받아줄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됩니다. 사람의 옷을 벗긴 것은 사나운 광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래 사람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늘 깐깐하게만 보여 그 앞에만 가면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아래 사람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대하면 사람을 만만히 보고 기어오른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권위를 부리고 가끔 심술을 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온유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앞에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딛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온유함으로 사람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고 모두가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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